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20
집정관이 차갑게 돌아서며 문을 열었다.
“말로 할 때 듣는 게 좋을 걸세.”
왕성에 도착한 시로네는 고관대작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랜드 홀에 들어섰다.
“환영합니다, 위대한 지성의 별이시여.”
파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로네보다 머리 하나가 큰 거구가 여실히 드러났다.
“네, 반갑습니다. 시로네라고 합니다.”
소개하는 이름부터 짧다는 점에서 다른 별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하하! 역시 기개가 출중하시군요.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조철한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10미터 길이의 테이블에 온갖 음식들이 놓여 있는 반면 만찬을 즐기는 사람은 두 사람이 전부였다.
사소한 것까지 꼬집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기에 시로네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시는 길에 보셨겠지만, 현재 퍼레이드가 한창입니다.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아뇨.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을 해서 기분이 좋아요. 멋진 축제인 것 같아요.”
마족들과 싸우는 것보다 싫은 건 없었다.
“다행입니다. 마족과의 전쟁으로 각국이 심란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즐겁게 살아야지요.”
세계 미인 대회는 아라크네 왕국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 주는 문화 사업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간 시로네는 기밀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보를 전달했다.
“아라크네 정부에서 망명자 기록을 열람하는 일에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다만 이름과 특징만 가지고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근 10년 내외의 모든 망명자 기록을 검토해야 하니까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얼마나 걸릴까요?”
“아시겠지만, 아라크네는 자유 망명을 지지합니다. 그래도 인력을 총동원해서 내일 아침까지는 처리하겠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나, 이토록 순순히 자국 기밀을 전달한다는 것이 미심쩍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어쨌거나 아라크네 쪽에서 전폭 지원을 약속했으니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뱅골의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아 두었으니 거기서 지내시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로네가 집마차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세계 미인 대회 관리자는 미스 아라크네의 숙소에 도착했다.
“란기, 들어간다.”
문을 열자 갈색 천사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아름다운 여성이 속눈썹을 올리고 있었다.
미스 아라크네, 바르호 란기.
중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역사학을 공부하다가 이 세계로 뛰어든 재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찾아오고?”
무심한 얼굴로 화장에 열중하는 란기의 모습에 관리자는 말을 돌리는 것을 포기했다.
“접대를 해야겠다.”
마스카라를 잡은 손이 우뚝 멈췄으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현은 그것이 전부였다.
“왜죠? 어디 타국의 통령이라도 왔어요?”
관리자가 이를 악물었다.
“통령 정도면 이러지도 않지.”
란기는 다시 화장을 이어 나갔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돼. 아니, 물론 싫겠지. 하지만 직접 들어야 내가 움직일 수 있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너는 미스 아라크네야. 네가 싫다고 하면 누구도 어찌하지 못해. 만약 발설되는 순간 왕국의 주요 사업이 망신을 당하게 되는 거니까.”
대답조차 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관리자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럼 거절하는 것으로 알고…….”
“할게요.”
란기가 화장을 끝내고 일어섰다.
“진심이냐?”
“새삼스럽게 진심은……. 정치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제가 더 잘 알아요. 그냥 눈 한번 질끈 감아 버리고 넘기는 게 낫죠.”
관리자의 앞을 걸어간 란기가 손을 넘겼다.
“어디로 가면 돼요? 프로필이나 줘요.”
이미 준비해 왔다는 것이 수치스러웠기에 관리자가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서류를 건넸다.
“대회가 있으니, 상처는 안 된다고 요청하마.”
배려는 고작해야 그 정도였고, 차갑게 입꼬리를 올린 란기가 서류철을 넘겼다.
“응?”
제국의 고위직 정도를 예상했던 그녀가 눈을 깜박거리며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마법사?”
무풍지대 (3)
***
“누구세요?”
노크 소리에 시로네가 호텔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누구……세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저는 이번 미스 아라크네로 뽑힌 바르호 란기라고 합니다.”
“미스 아라크네?”
밝은 인사에 경계심이 조금 풀렸지만 그녀의 정체가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왔다.
“그런 분이 저에게는 무슨 일로?”
어디에서 공수했는지 란기가 토르미아 왕국의 스피릿 잡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팬이거든요. 알페아스 마법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만 들어갈 수 있다는 상아탑에서 활동하고 계시죠.”
시로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마법에 관심이 많거든요. 괜찮으시면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란기가 펼친 스피릿 잡지에 이천번 대결에서 단테를 이긴 시로네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내가 저렇게 촌스러웠나?’
영락없는 산골 소년이었지만, 솔직히 지금도 얼마나 도시적으로 변했는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알았어요. 일단 들어오세요.”
란기를 방으로 불러들인 시로네가 펜을 찾는 동안 그녀는 스위트룸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나도 처음인데.’
왕립 아라크네 호텔은 VIP들이 머무는 곳으로, VVIP가 머무는 아래층만 해도 40개가 넘는 방이 있다.
하지만 현재 시로네가 사용하는 방은 꼭대기 층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극빈을 부를 때에만 사용하는 방으로, 그녀가 알기로 이곳의 문이 열리는 건 1년에 두 번이 되지 않는다.
‘상아탑의 마법사라…….’
그녀가 독사라고 표현하는 정치인들이 술자리에서 치를 떨며 두려워하는 초국적인 인물.
‘순진하게 보이는데.’
스위트룸에 있는 최고급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넓은 침대에 낡은 책 한 권만 달랑 놓여 있었다.
‘성격도 소박하고.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무섭다는 거지?’
펜을 찾지 못해 넓은 방을 이리저리 달리는 모습을 보자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맞다!”
시로네가 마루의 중앙에 멈춰 서더니 천장을 쳐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펜이 없으시면 제 것으로…….”
란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로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에이, 나 완전 바보잖아!”
“응? 바보?”
한숨을 내쉰 시로네가 빈손으로 다가오더니 식탁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마테리얼.’
정보가 무서운 속도로 조립되면서 어느새 손에 한 자루의 사인펜이 쥐였다.
“호오?”
란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런 마법도 있나?’
마법협회 고위직들이 허세를 부리며 이런저런 마법을 부리는 것은 봤지만 펜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재밌네요. 꼭 마술 같아요.”
란기는 모른다.
만든 것은 펜에 불과하지만, 이 마법에 담긴 이론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전지라는 사실을.
“헤헤, 맞아요. 항상 물건을 찾는 습관이 있어서 이렇게 깜박한다니까요.”
“어머? 그럼 다른 것도 만들 수 있어요?”
시로네가 난처하게 웃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죠.”
야훼가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행위를 싫어할 뿐, 원한다면 다이아몬드를 무한정 찍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란기는 시로네의 겸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하긴, 아무거나 다 만들 수 있으면 신이게?’
평생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 준 적이 없는 시로네는 침이 바싹 마르고 손이 떨렸다.
‘실망하면 안 되는데. 실수하면 되돌려야겠다.’
시폭감이라는 회심의 무기를 장착한 덕분인지 사인은 그럴 듯하게 성공했다.
“여기 사인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란기가 잡지를 끌어안았다.
‘이제 나에게 사인을 할 차롄가요, 호텔 스위트룸에 머무는 대마법사님?’
시로네가 설령 좋은 사람이라도 미스 아라크네를 호텔 방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당신이 나쁜 게 아니야.’
접대를 받는다는 느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일류, 란기는 자의로 마음을 열었다.
‘남자니까, 나를 원하는 게 당연한 거야.’
그러니.
‘잊어 줄게. 전부 다.’
오늘 하루의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기를.
이곳에 머물 방법을 찾고 있는 그녀의 배 속에서 때마침 꼬르륵 소리가 났다.
란기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대회 준비 때문에 며칠째 굶었더니 이제는 움직이기도 힘드네요. 혹시 같이 저녁이라도…….”
“잠시만요. 오면서 산 빵이 남아 있어요.”
굶주린 그녀가 안쓰러운 시로네가 황급히 가방을 뒤졌으나 잠시 후 민망한 상황이 생겼다.
“어라? 이거…….”
여행자들이 애용하는 딱딱한 빵이었고 반쯤 씹어 먹은 자국이 선명했다.
“죄송해요. 다른 음식을 달라고 할 게요.”
“괜찮아요. 다 똑같은 사람인데요. 그리고 이 빵 되게 좋아해요. 다이어트에 최고거든요.”
미스 아라크네에게 먹다 남은 빵을 주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던 시로네였다.
란기가 빵을 빼앗아 가더니 절반을 토막 내어 남은 부분을 건네주었다.
“반만 먹을게요. 딸기로 만든 잼이 있을 거예요. 아, 그리고 퍽퍽하니까…….”
능숙하게 물건을 찾아 식탁에 올려놓은 그녀가 선반에서 최고급 와인을 꺼냈다.
“술도 조금.”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고, 빵을 다 먹었을 무렵에는 취기가 올라왔다.
“시로네 씨는 애인 있어요?”
“네, 있어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물어본 것이기에 란기가 의외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인데, 지금은 떨어져 있어요. 직업이 군인이거든요.”
“호오? 군인이라.”
시로네와의 궁합을 계산한 란기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좋을 듯하다고 판단했다.
“마법 실력도 그렇지만 의지도 정말 강해요. 졸업 시험에서 네이드란 친구에게 주먹을 날릴 때는…….”
처음으로 신이 나서 떠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에이미란 여자를 정말로 좋아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앞에 두고 주야장천 애인 얘기만.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시로네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란기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꼴딱 삼키고 일어섰다.
“맞다. 제가 어깨 좀 주물러 드릴까요?”
란기가 뒤로 돌아가서 어깨를 만지자 시로네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으으, 저는 괜찮아요.”
“가만히 있어 보세요. 저 안마 잘해요. 아니면 뭐예요? 애인 아니면 몸에 손도 못 대는 거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란기의 눈이 빛났다.
‘역시 이거구나. 감 잡았어.’
남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마법사의 어깨를 주무르다니. 정말 행운아인 것 같아요.”
“유명하기로는 란기 씨가 최고죠. 미스 아라크네인 데다가 세계 대회도 나가잖아요.”
“후후, 그러네요. 그럼 약속할래요? 오늘 일은 평생 우리 둘만 간직하기로.”
“네? 아, 네.”
란기가 구설수에 오르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시작 좀 하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괴롭힐 거야.’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그녀가 시로네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너무 행복해요.”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면 입을 맞출 것이고, 그때부터는 어떤 남자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왕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시로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것인지, 시로네는 목석처럼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네에, 잠깐 저 좀 봐 줘요.”
“란기 씨.”
분위기를 깨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란기 씨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분명 제 착각이겠지만…….”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시로네가 란기를 돌아보며 취기가 사라진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