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23
“그래요. 저는 상아탑 소속의 마법사입니다.”
“상아탑?”
흑발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마법을 연구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이야, 놀라운 우연의 일치네. 나도 유치원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제이스틴이 비꼬자 흑발이 어깨를 으쓱했다.
“왕보다 높다고 합니다.”
“좋아.”
시로네의 사회적 지위를 직감한 제이스틴이 자세를 뒤틀며 협상을 시작했다.
“잘 들어. 제이스틴 용병단은 소수지만 정예야. 너에게 당해 놓고 이런 말 해서 웃기지만…….”
“아뇨. 모두 뛰어난 실력이었어요.”
“알면 얘기가 빠르겠네. 아라크네 최고의 용병 길드, 가디언 킹에 가입시켜 줘. 물론 그냥 가입이 아니야. 최소한 조장 자리를 나에게 주어야 할 거야.”
“그건 좀…….”
“이건 낙하산이 아니야. 우리가 여태까지 숨죽이고 살아온 것에 대한 응당한 보상이지.”
야훼는 전지전능하지만,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길드 생활을 잠깐 한 적이 있어요. 실력도 그렇지만 공헌도를 중시하죠. 길드에 분란이 일어날 겁니다.”
끈끈한 전우애로 뭉쳐 있는 건 제이스틴 용병단만이 아닐 것이기에.
“뭐야? 고작 그 정도도 해 주지 못하면서 무슨 큰소리야?”
제이스틴이 성질을 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가디언 킹 정도가 아니면 절대로 거래하지 않겠어. 이건 내 삶을 위한 투쟁이라고.”
“흐음.”
실버링은 라둠에서 와해되었을 테고, 개인적으로 부탁할 수 있는 길드라면 앵무 용병단뿐이었다.
“마르샤 누나…….”
“뭐?”
시로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제이스틴 대원들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마르샤? 클레이 마르샤?”
“네. 앵무 용병단을 아세요?”
오히려 제이스틴이 황당했다.
“당연히 알지. 앵무라면 세계 10대 용병 길드잖아. 타락한 성모. 이 바닥에서 마르샤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계 10대 길드?’
갈리앙트를 떠난 지 4년 만에 이루어 낸 성과였다.
‘하긴, 똑똑한 사람이니까.’
언더코더에서 미로를 도운 대가로 우오린에게 받은 막대한 지원을 제대로 굴린 모양이었다.
‘그래, 앵무라면 가능하다.’
타락한 성모, 클레이 마르샤.
버림받은 승냥이들의 대모라면 제이스틴 용병단에도 길을 열어 줄 터였다.
“좋아요. 앵무 용병단을 소개해 줄게요.. 조장직도 제의하겠어요. 그럼 이걸로 거래가 된 거죠?”
“아니지. 무슨 거래를 이렇게 해? 당연히 마르샤의 승낙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야.”
제이스틴이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론 왕국에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말이야. 가급적 빨리 찾아오는 게 좋을걸.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한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시로네의 반응을 살폈다.
“직접 찾으러 갈 필요는 없어요.”
시로네가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근처에 테라포스 교단이 있나요?”
***
유명한 망명 국가답게 아라크네에는 수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테라포스 교단도 작지만 뱅골 외곽에 사원을 두고 신도들을 모집 중이었다.
“실례합니다.”
시로네는 아무나 사제를 붙잡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테라포스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혹시, 테라포스를 진실로 믿으시나요?”
트랜스 상태가 아니면 채널링이 어렵다.
“물론입니다. 위대한 테라포스 신께서는 모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신답니다. 악으로 치부하는 무리는…….”
“그러면 그 신 좀 바꿔 주세요.”
“네? 지금 뭐라고…….”
사제가 불경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자 시로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법관님, 듣고 계시죠?”
동시에 사제가 전율을 일으키더니 흰자를 드러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헥사, 이번 파계 건은 운이 좋았다. 의회에서 내가 필리버스터를 하지 않았다면…….”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아, 그건 다음에 얘기하고요. 클레이 마르샤라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급해요.”
“……무슨 내용이지?”
사제의 목소리에 담긴 대법관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시로네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전했다.
2시간 후.
아이론 왕국의 한 선술집.
건물 전체를 3일 동안 빌린 앵무 용병단의 간부들은 대낮부터 술판이었다.
그들의 대모 마르샤가 구석에서 발톱을 정리하는 가운데 문이 덜컹 열렸다.
“대장. 마르샤 대장.”
10번대의 부조장이 감격에 겨운 백구 머리 소년의 뒷고대를 붙잡고 들어왔다.
간부 중의 1명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술 빌리러 온 거면 나가.”
“아니, 그게 아니고요. 이 녀석이 낮술을 잘못 처먹었나, 한숨 자더니 헛소리를 하잖아요.”
백구 머리 소년이 말했다.
“헛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보았습니다. 신, 신이 저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어요.”
“이리 와, 우리 귀여운 꼬맹이.”
백구 머리 소년을 부른 마르샤가 눈 밑을 내리며 그의 정신 상태를 진단했다.
“약은 안 했는데? 무슨 꿈을 꿨는데?”
“저의 위대한 신께서 대장에게 꼭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아라크네로 가야 합니다.”
담배를 문 마르샤가 배시시 웃었다.
“뭐야? 신도 내 미모를 알아보는 건가? 날더러 미인대회에 참가하라는 말이라도 하디?”
“서른 살 넘으면 서류도 안 받아 줘.”
프리먼의 말에 입술을 이기죽거린 마르샤가 소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그래, 우리 꼬맹아. 그 위대한 신께서 왜 날더러 아라크네로 가라고 하는 거야?”
“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년은 한 글자도 빼놓지 않았다.
“그곳에 헥사, 아니 야훼, 아니 시로네가 기다리고 있다.”
“……흐음.”
소년을 물러세운 그녀가 생각에 잠기더니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무슨 신이 말을 더듬어?”
베타피시 (3)
***
“일! 일이다!”
제이스틴이 길드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을 때, 부하들은 허물어진 건물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전부 일어나, 이 놈팡이들아!”
6명의 사내와 1명의 여성이 부스스한 표정을 고치지 못한 채 상체를 일으켰다.
“으, 속 쓰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
간밤에 게운 토사물의 체취를 느낀 애꾸가 인상을 찡그리며 제이스틴을 돌아보았다.
“뭐? 아침부터?”
제이스틴이 건에 마정탄을 장착했다.
“그게 내 길드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놈이 할 소리냐?”
건의 총부리를 확인한 순간 멍한 표정의 얼굴들이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날렸다.
“튀어! 죽는다!”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마정탄의 폭음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라고. 제발.”
제이스틴이 한숨을 내쉬며 건을 내렸다.
대충 나무판자로 바람만 막은 길드 안에서 제이스틴 용병단 전원이 원탁에 앉았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계에서 제일 잘빠진 아가씨들을 경호하게 되었다고?”
애꾸가 황당하게 되물었다.
“그래. 물론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너희들 6명은 외부 경호를 할 거야.”
협박범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아라크네 정부는 경호에 총력을 기울였다.
없는 전력이라도 끌어다 써야 하는 실정이었고, 제이스틴이 여자라는 점도 주효했다.
카운터의 여자가 물었다.
“돈은 얼마나 준대요?”
“성과제야. 하지만 계약금만으로도 길드 보수비는 충분해. 게다가 이번 일을 성공하면 용병단의 이름값이 오를 거야.”
애꾸의 한쪽 눈이 빛났다.
“말인즉슨…… 드디어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얘기?”
제이스틴 용병단의 부활이다.
“그래. 급하게 정해졌지만 리허설 시간에는 맞출 수 있을 거야. 10분 뒤에 공터에서 브리핑한다.”
***
세계 미인 대회 행사장에는 참가자들과 행사 관계자들의 대기실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후우. 후우.”
이제 막 데뷔를 앞둔 마야는 초청 가수 대기실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왜 이러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기획사 대표 팔머스가 대기실로 들어와 마야에게 진정제를 건넸다.
“아직도 그래?”
“네. 하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노력한 만큼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침착해. 열심히 했잖아. 리허설 때도 실수 하나 없었어. 잘할 수 있을 거야.”
‘차라리 실수를 했어야 했는데.’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더욱 불안한 이유는 프로 무대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시로네…….’
마야는 ‘빛 비’라는 곡명이 적힌 악보를 펼쳤다.
‘언젠가는 내 노래를 들어 주겠지.’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빛이 쏟아졌다는 뜻으로, 시로네에게 사랑을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 곡이었다.
가사를 읽는 마야가 눈에 띄게 진정되는 것을 보며 팔머스는 입맛을 다셨다.
‘누군지는 몰라도 축복받았군.’
처음 그녀가 제출한 가사를 읽었을 때, 단지 가사를 위한 글귀가 아니라는 것은 관계자 모두 알았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이야. 욕심을 버리고, 네 마음 하나 던질 수 있으면 되는 거야.’
팔머스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참가자 대기실.
32개국을 대표하는 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방은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여성으로 차출된 경비대의 생각은 똑같았다.
‘통제하기가 쉽지 않겠어.’
속옷 차림으로 다리를 지지벌개고 앉아 있는 미스 바이덴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아, 지루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경쟁자들의 감시망이 전원에게 퍼져 있으니 몰래 피우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드랑이를 드러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그녀가 옆자리에 있는 미스 토르미아를 돌아보았다.
생금발이 훤칠한 이마를 드러내며 좌우로 내려오고, 순금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가진 여성이었다.
“얘,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드레스 입고 있으면 안 답답하니? 어차피 갈아입어야 하잖아.”
알프레드 포니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왕족의 품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머, 너 왕족이야?”
토르미아 마법학교의 졸업 시험에서 마야의 규정외식에 당해 아쉽게 탈락한 그녀는 휴학계를 냈다.
‘이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야.’
시험에 탈락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가문이 시로네에게 강짜를 부렸던 일로 세상을 알게 되었다.
‘우승하면 나도 기득권에 들어갈 수 있어.’
어느 나라든 미인 대회 우승자는 정부로부터 우대받고, 그것은 왕가의 정치력과 직결될 것이다.
“얘, 너 진짜 왕족이냐니까? 그럼 잘생긴 사람들도 막 너한테 굽실거리고 그래?”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포니가 다시 책을 펼치려는데 눈앞으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미스 아라크네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있었다.
“반가워. 나는 바르호 란기.”
아라크네 왕국은 대대로 많은 세계 대회 우승자를 배출했고 란기도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알프레드 포니야. 반갑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후후, 직설적이네. 확실히 마법사다운데?”
아마도 참가자들의 프로필은 모두가 입수했을 테지만 포니에게는 아픈 과거였다.
“마법사 아니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을 적시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사고방식이 마법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알아. 그래도 멋지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