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58
“스밀레.”
오젠트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스밀레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아, 오빠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어떤 얘기를 듣고 싶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다. 다음에 하자.”
스밀레를 놓아줄 수도, 그렇다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좋아.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을 거라면 영원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몸을 돌리자 스밀레가 여느 때와 달리 화가 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할 얘기 있지? 이제 곧 산의 일족 사람들이 올 거야. 지금 아니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요즘 들어 나한테 차갑게 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분명 산의 일족과 혼사가 잡힌 뒤부터야.”
“스밀레, 나는…….”
“내가 시집가는 게 싫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강의 일족과 산의 일족은 대대로 협력하며 살았어. 이건 중요한 혼사야.”
“나는 지금 오빠를 말하고 있는 거야. 이번 혼례에 불만이 많잖아. 내가 맞혀 볼까?”
오젠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빠, 혹시…….”
정신이 멀어질 정도로 긴장이 되는 그때, 스밀레가 손으로 허리를 척 짚으며 말했다.
“내가 시집가면 놀아 줄 사람 없어서 그래?”
“뭐?”
식은땀이 차갑게 말라 갔다.
“오빠는 사교성도 부족하고 친구도 없으니까. 그래서 떠나려는 거잖아.”
사라진 긴장감을 대신한 것은 서운함이었다.
‘뭘 기대했던 거지?’
위태로운 균형을 무너뜨릴 가공할 한 방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것일까?
“그런 게 아니야.”
거친 숨결을 따라 말이 튀어나오려는 그때 다미안이 수련장의 문을 열었다.
“여기 있었구나.”
오젠트는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어? 아빠? 벌써 일어났어?”
복잡한 감정으로 남매를 바라보던 다미안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산의 일족 사람들이 도착할 거다. 혼전 예식을 치러야 하니 빨리 집으로 들어오너라.”
멀어지는 다미안을 바라보던 스밀레가 오젠트를 돌아보며 잠시 기다렸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자는 눈빛이었으나 다미안의 한숨을 들은 오젠트는 그저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들어갈게.”
스밀레가 돌아가고, 오젠트는 수련장의 문을 닫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느리게. 더 느리게.’
최고가 되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지면 기적처럼 스밀레가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서.
‘강해지자. 그러면 되는 거야.’
오젠트가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산의 일족이 찾아왔다.
일족 간에 우열은 없지만 신부가 있는 곳에 7일간 머물면서 화합을 다지는 게 전통적인 의례였다.
강과 산의 물건을 교환하는 식으로 자주 왕래가 있었기에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늘 산에 처박혀 수련만 했던 오젠트는 스밀레의 약혼자인 레아드를 처음 보았다.
거구의 덩치에 호남형의 얼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전형적인 산의 일족이었다.
‘쳇, 저런 놈이 뭐가 멋지다는 거야?’
아예 끔찍했다면 말도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오젠트는 모든 것을 정치적인 이유로 떠넘겼다.
‘스밀레는 희생당하는 거야.’
대하처럼 고요하고 넓은 심성의 스밀레는 어떤 큰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오젠트가 절대로 갖지 못한 것으로, 어쩌면 그녀를 경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결혼은 말도 안 돼.’
레아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는 스밀레의 모습을 보자 더욱 속이 뒤틀렸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레아드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오젠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스밀레의 오라버니로군요. 반갑습니다. 산의 일족 레아드라고 합니다.”
내민 손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일족이 바라보는 앞에서는 한 걸음도 엇나갈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듣자 하니 최고의 전사라고 하던데, 언제 시간이 나면 자웅을 한번 겨뤄 보시죠.”
오젠트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조만간 멀리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서.”
“여행? 설마 연옥으로 가신단 말입니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레아드가 멍한 표정으로 강의 일족을 돌아보았으나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야? 오빠라면서.”
레아드는 오젠트를 이렇게 정의했다.
“완전 쪼다잖아?”
스밀레의 머리 검은 오빠가 냉랭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혼전 예식은 화기애애했다.
산과 강에서 나오는 푸짐한 음식에 연거푸 술잔이 돌아가고 모두들 알큰하게 취한 초저녁이었다.
“하하하! 그래서 제가 산왕류 세 마리를 동시에 때려잡았다는 거 아닙니까!”
딸을 보내는 입장으로서 다미안은 레아드의 무용담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것 참 대단하군. 역시 산의 일족 최강의 전사답네.”
“그것도 그렇지만…….”
사발에 채워진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레아드가 말석에 앉은 오젠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그저 삐친 여자처럼 뾰로통하게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수 없는 성격이군. 하긴 친자식도 아니라니…….’
어차피 연옥으로 떠날 인간이라면 남자의 진정한 멋을 가르쳐 주는 것도 재밌을 듯했다.
“오라버니께서는 산왕류를 잡아 본 적 있으십니까?”
오젠트가 대답이 없자 스밀레가 끼어들었다.
“오빠는 정말 강해요. 천재거든요. 며칠 전에는 수장류 수십 마리도 베었어요.”
“푸하하하! 스밀레 양, 오빠를 너무 띄워 주는데요? 물속에서 수장류 수십 마리를 잡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진짜예요. 오빠, 맞지? 그때 나랑 수영하다가 보여 준 거 있잖아. 하늘을 나는 기술.”
“하늘을 날아?”
누구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에 산의 일족은 물론 강의 일족까지 주목했다.
“그런 기술이 있단 말입니까?”
오젠트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서 뭐 하게?”
하지만 역시나 냉랭한 말이었고 분위기 또한 급격히 가라앉았다.
“오빠, 아까부터 도대체…….”
레아드가 고개를 쳐들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거 무시무시한 형님을 모시게 되었군요. 하긴, 그래도 쪼다보다는 낫죠.”
“쪼다?”
오젠트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으나 레아드는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나저나 멋진 기술이 있다면 저에게도 가르쳐 주는 건 어떻습니까?”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레아드가 자신의 목검을 쥐고 공터로 걸어갔다.
“설마 용맹한 강의 일족이 도망치는 건 아니겠죠?”
일족의 자존심을 두고 쐐기를 박아 버리자 오젠트는 비로소 실수를 깨달았다.
‘빌어먹을.’
목검을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다미안이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오젠트, 잠깐 나 좀 보자꾸나.”
모두 세기의 대결을 기다리는 가운데 그늘로 들어간 다미안이 말했다.
“스밀레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다.”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사과하고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죽이지만 말아 다오.”
“네?”
오젠트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자 다미안이 어깨를 다독였다.
“실컷 두들겨 패도 좋다. 네 분이 풀릴 때까지, 네 마음속에 남은 게 없어질 때까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분노 (1)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오젠트는 레아드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이거 재밌겠는데?”
목검을 요란하게 휘두르며 대련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살심이 불끈 치솟았다.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오젠트의 마음을 폭력으로 드러낸다면 레아드가 먼지가 되어도 모자랐다.
그래도 때리고 싶다.
‘쪼다구나.’
마음속의 살심을 깨달은 오젠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미안이 말했다.
“오젠트,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지 오젠트는 알지 못했다.
“너를 내 아들로 거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기에.
“아버지가 미안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말이 오젠트를 화나게 했지만 그에게 인생을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분노는 더욱 강해졌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이 오젠트는 결투장으로 걸어가 목검을 손에 쥐었다.
‘고작 이런 걸로…….’
여태까지 누군가와 진심으로 싸운 적은 없었기에 오젠트는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과 싸운 적은 없지만 그는 수장류를 벨 수 있었고, 다른 인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살 해 드리고 싶지만…….”
레아드가 목검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진정한 전사는 부상이 두렵지 않은 법. 이깟 나무토막으로 해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화끈하게 가죠.”
‘어리석기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자에게는 상식 같은 말이었지만 오젠트는 헛웃음이 나왔다.
‘젓가락 하나로도 사람은 죽일 수 있다.’
“오빠! 강의 일족의 힘을 보여 줘!”
어느 한쪽을 응원하기 난감한 상황일 텐데도 스밀레는 오젠트의 승리를 단언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해맑은 건지…….’
아니, 스밀레는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를 하기 전에 온갖 리스크를 검토하는 오젠트와 달리 그녀는 언제나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생각을 지운 오젠트가 목검을 내밀었다.
“시작하지.”
선전포고를 하자 여태까지 웃고 있던 레이드의 표정이 무섭도록 차분해졌다.
‘허접한 놈은 아니군.’
거인의 힘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기운이 레아드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론 오젠트의 감각만이 느낄 수 있는 기질이었다.
“타하!”
레아드가 먼저 돌진하고 오젠트가 뒤늦게 몸을 틀었다.
“우와…….”
지켜보던 자들은 예상보다 강력한 레아드의 검술에 금세 빠져들었다.
여태까지 오젠트가 최고라고 믿었던 스밀레조차 검의 속도에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가 없는 오젠트는 그저 담담하게 공격을 흘려 내고 있었다.
‘강한 남자구나.’
약하다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산의 일족을 대표할 만한 실력이었고 거인의 힘을 다루는 것도 능수능란했다.
‘도대체 나는…….’
그렇기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얼마나 강한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섬뜩한 기분마저 드는 이유는 차원이 다른 무위를 확인했기 때문.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나?’
수치로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 속에서 레아드의 동작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피하는 게 아니야.’
거의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레아드의 동작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불과 열 걸음을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오젠트의 감각은 결국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신경의 1퍼센트만으로도 레아드를 상대할 수 있는 그는 남은 99퍼센트의 신경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가 스밀레의 남편이 된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한순간도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는 그녀가 가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