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68
“카샨의 상업 도시 베나포드를 점령했습니다.”
베나포드는 이곳으로부터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부유한 도시였다.
하비츠를 대신해 발칸이 지시를 내렸다.
“오늘 밤은 그곳에서 머물겠다. 너희들은 쉬지 말고 계속 전진해라.”
전령이 즉각 명을 받들고 떠나자 발칸이 하비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로써 카샨의 영토 3분의 1을 먹은 셈이군요.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카샨의 영토 절반을 점령하면 중부 대륙으로 침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스모도가 말했다.
“카샨과 국경선을 마주하는 자이브, 몰튼, 보르나이. 이 3국이 관문이 되겠군. 여기만 뚫으면 중부 21왕국은 물론 남부 대륙까지 거칠 것 없이 먹을 수 있지.”
“나는 우오린에게 간다.”
전략, 전술, 심지어 전쟁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하비츠의 지시에 발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병력을 쪼개죠. 베나포드에서 천만 군대는 카샨을 치고, 남은 군대는 남하하겠습니다.”
나탸사가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중부 대륙에 4천만이나?”
“아직까지 성전의 움직임이 없어. 아마도 중부 대륙의 국경선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일 생각인 거지. 천만 병력으로도 카샨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발칸의 말이 그렇다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고, 그날 밤 하비츠의 부대가 베나포드에 도착했다.
한때 카샨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던 부유한 도시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건물이 폭삭 무너진 지대에 막사를 꾸린 하비츠는 도시의 지배자들을 불렀다.
시장을 포함한 고위 귀족 20명이 밧줄에 묶인 채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미 하비츠의 성향을 알고 있는 그들은 얼굴에 핏기가 없었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차피 죽는다. 그게 무서운 게 아니야.’
대체 이 광인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괴롭힐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절반은 살려 주마.”
하비츠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절반? 절반이라고?’
2명 중에 1명.
죽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걸릴 리는 없다고 기대하게 되는 확률이었다.
“대신 나머지 절반은 고문하겠다.”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고문이 아닐 것이기에 귀족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살고 싶은 놈은 손들어라.”
처음에는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상황을 분석하기 위한 시간 벌기.
‘어차피 죽는다. 도박을 거는 게 맞아.’
판단이 빨랐던 3명이 동시에 손을 들자 남은 자들이 고개가 부러질 듯 돌아보았다.
당혹감과 분노, 어쩌면 그들이 죽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풀어 줘.”
하비츠의 지시에 병사가 3명의 밧줄을 풀어 주고 일으켜 세웠다.
“떠나라. 너희들은 자유다.”
남은 17명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절반은 살려 준다고 했다.”
이제 살 수 있는 사람은 7명, 희망을 본 그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살려 주십시오! 저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야 합니다! 하비츠 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들의 아우성을 잠시 듣고 있던 하비츠가 제타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사위 2개를 넘겨받아 가장 왼쪽에 앉아 있는 자에게 던졌다.
“이제부터 2명씩 짝을 지어 주사위를 던진다. 높은 숫자가 나온 사람은 자유다.”
“어…….”
무릎 앞에 떨어진 주사위를 내려다보던 귀족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굴려.”
하비츠의 짧은 말에 흠칫한 그가 떨리는 손으로 주사위를 들고 굴렸다.
“흐으으윽!”
6면체 주사위 2개가 만든 숫자는 3과 4를 더해 7.
“다음. 옆 사람.”
차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옆에 무릎을 꿇은 자가 주사위를 붙잡았다.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던진 주사위가 바닥을 구르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 아아…….”
주사위의 숫자는 6과 2를 더해 8.
“으아아아아!”
8을 가진 남자가 일갈을 내지르고, 반대로 7을 가진 남자는 의식이 혼미해졌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아무것도 아닌 주사위 놀음, 그것도 고작 1 차이로 자신의 운명이 정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끌고 가. 죽기 전까지 고문해라.”
병사에게 붙잡혀 막사를 벗어날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발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진실이다. 주사위를 굴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인간의 자유의지란 고작해야 그 정도.
‘하지만 어떤 인간은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다음. 굴려라.”
주사위는 계속해서 옆 사람에게 넘어갔고, 환호의 함성과 절망의 비명이 반복해서 터졌다.
“1명이 남는데요?”
3명이 손을 들고 나갔기 때문에 남은 1명은 주사위 대결을 벌일 상대가 없었다.
“아, 부디…… 자비를…….”
절반의 기회마저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귀족을 바라보던 하비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하면 되겠군.”
“네? 제, 제가 어찌 황제 폐하와…….”
귀족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은 하비츠가 주사위를 넘겨주며 말했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사실 해 보고 싶었거든. 나를 이기면 네가 황제가 된다. 그리고 나는…… 흐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비츠가 제타로에게 말했다.
“그래. 제타로, 네가 나를 죽여라.”
발칸이 말했다.
“폐하, 그런 제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타로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 알겠습니다! 완전 살 떨리는 승부로군요. 그럼 제가 심판을 보도록 하죠.”
하비츠에게 다가온 제타로가 목을 칠 듯이 검을 치켜들자 겁에 질린 귀족의 동공이 위로 말려들었다.
‘미친놈들. 정상이 아니야.’
“굴려. 일생일대의 기회다.”
막사의 분위기가 폭발할 듯 팽팽해지고, 그렇기에 가장 재미있는 판이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난 귀족이 눈을 질끈 감으며 주사위 2개를 던졌다.
한순간 공기가 얼어붙고, 살며시 눈을 뜬 귀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아! 아아아!”
주사위의 숫자는 6에 6을 더해 12.
‘기적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비츠의 간부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 제타로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설마 황제께서 뱉은 말을 번복하지는 않으시겠죠?”
여느 황제 같으면 제타로의 목을 치겠지만 하비츠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가 최고다.’
최고로 재밌다.
“이제 내 차례로군.”
진실로 목숨을 건 하비츠였으나 주사위를 던지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에잇.”
모두의 시선이 주사위를 따라갔다.
“…….”
6에 6을 더해 12라는 숫자가 나오자 넋이 나간 귀족의 입에서 침이 질질 떨어졌다.
“동점이군. 한 번 더.”
“흐으으윽.”
아이처럼 울상을 지은 귀족이 눈물을 쏟아 내며 주사위를 붙잡았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 으아아아.”
쇼크를 먹은 신경이 마음대로 널뛰면서 주사위 2개가 손바닥 아래로 흘러내렸다.
결과는 또다시 6에 6을 더해 12.
“으아아아! 으아아아! 으아아아!”
반쯤 미쳐 버린 귀족이 눈물콧물을 흘리며 연거푸 악을 질러 댔다.
발칸의 눈빛이 비로소 매서워졌다.
‘주사위에 조작은 없다. 그런데 12가 연속으로 세 번 나왔어. 독립사건이긴 하다지만 이건…….’
하비츠가 주사위를 낚아챘다.
“제법이군. 그렇다면 이번엔?”
주사위 2개가 거침없이 공중을 날아 떨어졌다.
“우아아아아!”
질식할 정도로 긴장하던 병사들이 주사위를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12다! 또 12야!”
확률에 불가능은 없지만, 살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귀족이 빌었으나 하비츠는 단호했다.
“굴려.”
육체는 이미 탈진한 상태였으나 마지막 기적을 바라며 그가 주사위를 던졌다.
1과 2를 더해 3.
“그렇다면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하비츠가 주사위를 쓸어 담는 그때, 귀족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꾸에에에!”
한 바가지의 핏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눈을 뒤집어 깐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타로가 상태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졌습니다.”
“아쉽군. 살려 주려고 했는데.”
자리로 돌아간 하비츠는 진절머리가 난 얼굴로 다리를 까닥거렸다.
“지루해. 뭐 재밌는 거 없나?”
다음 날 아침까지, 베나포드에 생존해 있던 2만 명의 시민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용서해라. 사랑해라.’
30시간째 명상에 잠겨 있는 시로네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아니야. 흔들리면 안 돼.’
박애와 분노의 싸움은 한순간만 삐끗해도 정신이 파괴될 정도의 외줄타기였다.
“흐으으으.”
감은 눈에서, 코에서,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면서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참아. 분노마저 삼키는 거야.’
야훼의 빛이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아탑 대소집(2)
***
하비츠 군대는 베나포드를 떠나 계속해서 서진, 카샨의 왕성을 향해 진격했다.
거칠 것 없는 행렬이었으나 군사의 자리에 앉아 있는 발칸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손안에는 2개의 주사위가 계속 맴돌고 있었고, 눈빛은 외부 자극에 무신경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타샤가 물었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12가 연속으로 네 번 나왔다.’
발칸이 입을 열었다.
“하비츠가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그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는지 스모도와 제타로가 관심을 드러냈다.
“어젯밤의 주사위 놀음 말이지?”
“그래. 마법이나 속임수 같은 게 아니야. 하비츠는 어제 높은 확률로 죽을 뻔했어.”
스모도가 말했다.
“세상이 아직 그를 살려 두고 싶은가 보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발칸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은 누군가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 주사위 몇 번 같은 숫자가 나왔다고 선택받은 거라면 어리석은 사고방식이야. 그보다 훨씬 낮은 확률도 있잖아. 하나의 정자가 난자에 수정될 확률은 수십억 분의 1에 이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제타로가 요지를 파악했다.
“그렇게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지.”
“생각해 보면 하비츠는 언제나 그랬다. 따라서 사고를 역전하자. 하비츠에게 행운이 따른 게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 있기에 하비츠가 정의되는 거야.”
스모도가 말했다.
“기적 같은 게 아니라는 거로군.”
발칸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