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69
“어제 하비츠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지도 않지. 그냥 그렇게 하비츠의 역사는 끝나는 것. 하지만 살았고, 훗날 전설의 한 부분이 될 이야기를 만들었어.”
생각에 잠겨 있던 스모도가 물었다.
“시간이란…… 무엇이지?”
“이 세계를 진행시키는 율법. 따라서 율법에 엮여 있는 자들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물론 상아탑의 오대성이 시간을 파계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발칸이 설명을 이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몰라. 결국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시간의 끝에 하비츠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느냐야.”
나타샤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누구도 장담은 못 하지. 몇 번의 극적인 고비를 넘기다가 허무하게 죽는 게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하비츠는 사탄이 되었다.
“완벽한 혼돈. 율법의 바깥에 있는 존재라면 이 세상의 어떤 현상을 이용해서도 죽일 수 없어. 기적이랄지, 갑자기 방어막 같은 게 생기는 게 아니야. 이미 그런 결과에 도달해 있는 것이지.”
“을 막은 것도, 어제의 주사위 놀음도, 애초부터 정해진 사건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래. 율법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파계라 할 수 있다. 지옥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만, 인간 중에도 강자는 많지. 특히 상아탑에는 바글바글해. 하지만 우리는 하비츠의 미래를 알고 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어떤 일이 생기든, 어떤 망측하고 흉악한 도박을 하든 하비츠는 죽지 않아. 하비츠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불변하는 미래 그 자체야. 우리는 이 점을 십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발칸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긴다.”
***
상아탑 2성급 주민, 트웰브 미니가 시로네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400층을 찾았다.
평소에는 손바닥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체형을 유지하지만 오늘만큼은 정상적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 단정하게 정장을 입은 그녀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랐다.
“상아탑 대소집. 나는 처음인데.”
태성의 지시에 따라 상아탑의 모든 주요 인물이 모이는 가장 큰 회담.
미니가 알기로 마지막 대소집은 미로가 차원의 벽으로 들어간 20인의 심판이 있었던 직후였다.
미니의 옆에서 걷고 있는,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 말했다.
미니의 위성 아리아나였다.
“아라카 씨에게 들은 적이 있어. 당시에 5개의 부서에서 힘 싸움이 치열했다던데.”
치열한 정도가 아니라 상아탑이 와해될 뻔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지. 별의 칭호를 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외골수니까. 보르보르 같은 경우도 엄밀히 말하면 외골수가 아닌 쪽으로 외골수잖아.”
아리아나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래서 짜증 나는 거지. 전체 별들의 소집이라니. 그것도 위성까지. 상아탑이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태성께서는 무슨 생각인 거야?”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지. 아무튼 우리도 다른 부서에 눌리지 않게 시로네 씨를 잘 보좌해야 돼.”
아리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스물두 살이라면서? 솔직히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마법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아탑 오대성이 되는 거야? 전대인 마하가루타 씨라면 인정하지만…….”
미니가 주의를 주었다.
“아리아나, 이건 통합우주관리부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 그리고 마하가루타 씨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그 나네를 단독으로 막아 낸 분이라고.”
“율법의 4대 초인超人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박애, 그게 지금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보냐?”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거겠지. 이를테면 율법의 극한에서 작용하는…….”
아리아나는 성격이 급했다.
“아, 몰라. 나는 너랑 ‘페어’를 하는 게 좋아서 있는 거야. 별 볼 일 없는 놈이면 드롭킥으로 날려 버릴 거야. 그런 다음 너랑 태그해서 더블백드롭으로 땅에 꽂는 거지, 히히히.”
충분히 그럴 만한 여자였다.
“게다가 이런 것도 기분 나빠. 다른 부서는 대소집 명령에 바쁘게 움직이는데, 심지어 데리러 가야 하잖아? 이제 막 별의 칭호를 받았는데 너무 오만한 거 아니야?”
거기에 대해서는 미니도 의문이었다.
“그런 사람은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시로네의 집에 도착했으나 문안에서는 흔한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없나? 여기로 가 보라고 했는데.”
노크를 해도 응답이 없자 아리아나와 시선을 교환한 미니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례합…….”
눈앞의 광경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대성님!”
마루의 가운데에 서 있는 시로네의 눈에서 끝없이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룻바닥이 피로 흥건한 가운데 미니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시로네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로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시뻘건 눈으로 무섭게 전방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로네 씨……!”
시로네를 만지려는 그때. 아리아나가 말했다.
“멈춰. 내버려 둬.”
“하지만 이대로 두면 출혈이…….”
“침착해. 이쪽으로 와서 자세히 살펴봐.”
아리아나의 말에 미니는 천천히 물러섰다.
시로네의 전신에서 성스러운 광채가 물방울처럼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화하는 거야.”
“정화라고? 무엇을?”
“분노.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일말의 분노까지 제거하려는 거야.”
미니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냉철한 사람이야. 박애의 경지에 오른 마당에 이제 와 분노할 게 뭐가 있어?”
“그래서 이런 비참한 과정을 겪는 거지.”
아리아나가 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초인이라고 해도 사람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하고 싶은 것들도 있지. 세상을 위해 희생한다고? 그것은 인간과 가장 멀리 떨어진 감정이야.”
“……대체 얼마나 이 상태로 있었던 거지?”
대소집 명령이 떨어진 것이 일주일 전이었으니 최소한 그보다는 더 오래 번뇌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야 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나 봐.”
“분노에 이성을 잃었어. 야훼의 경지로 정화시키고 있지만, 실패하면 죽을 거야.”
“그럼 살려야 되잖아!”
“하지만 돌아올 수 있다면, 지금의 야훼하고는 전혀 다른 경지에 들어가겠지.”
미니가 입을 다물었다.
“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들었어. 거기에 대한 책임감일지도 몰라. 혹은 파국을 맞는 세상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일지도.”
“연인이 있다고 들었어.”
“박애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지. 하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거야. 공겁의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괴하는 거지.”
“반대로 말하자면, 희망이 없다는 거구나.”
극악을 이길 방법이 없다.
발칸이 말한 고정불변의 미래에 대한 개념을 상아탑의 상층부도 짐작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번 대소집과 맥락을 같이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싸워 보려고 하는 거야. 더 강해지기 위해서.”
“분노를 정화시키는 게?”
“머리로 깨닫고 행동했을 때 인간은 정의되지. 하지만 마음은 달라. 경지를 넘어 진짜로 야훼가 되려는 거야. 그리고 그 정도는 되어야…….”
아리아나가 본론을 말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오대성이라고 할 수 있지.”
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제발.’
피는 고통, 흘러내리는 광채는 시로네의 마음이 흘리고 있는 눈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로네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빛의 구체가 흐물흐물 풀어지기 시작했다.
“뭐지?”
그리고 급기야 전신으로 쏟아져 내리며 그의 몸을 환한 광채로 뒤덮었다.
‘아아, 그렇구나.’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색깔이 점차 투명해지면서 눈물로 바뀌어 갔다.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저 주사위를 잘 던져 높은 수를 얻은 것일 뿐.
하지만 그것조차 냉혹한 도박판에서 가끔 벌어지는 행운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 나네.’
가올드에게 패배한 나네.
그런 그가 부처를 내려놓으면서까지 모든 존재의 파계를 허락한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에 살아가는 게 아니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이 지옥 같은 현세에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룰을 깨서라도 끝까지 가 보자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싸운다.’
나네의 깨달음을 받아들여 더 높은 경지로.
어차피 모두가 고통스럽기에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지고.
‘만물이 통합된다.’
그저 하나의 우주.
마치 육체를 불태우는 것처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빛이 시로네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오, 오대성…….”
미니와 아리아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공겁의 분노가 일시에 소멸하면서 시로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넘어, 사랑을 관철시키는 존재로.
“이제는 싸울 수 있어.”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지만 시로네가 옮겨야 했던 마음의 크기는 우주에 육박할 터였다.
아리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넘어섰다.”
야훼의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시로네의 모습에서 번뇌는 찾아볼 수 없었다.
“후우우우.”
비로소 긴 명상을 끝낸 시로네가 호흡을 고르며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검은색 정장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두 여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금발은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검은 머리의 여성은 낯이 익었다.
“미니? 여기에는 어쩐 일로?”
레슬링을 좋아하고 성적인 농담도 거침없이 하는 작고 귀여운 여자.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정상적인 비율이었고 정장까지 입어, 영락없는 요조숙녀였다.
‘무슨 일이 있구나.’
미니가 말했다.
“역시 못 들었군요. 대소집이 있어요. 아, 그리고 이쪽은 제 위성이에요. 인사해.”
혹시라도 무례를 저지를까 긴장이 되었으나 아리아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2성급 미니의 위성, 아리아나라고 합니다.”
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아탑 대소집(3)
“그런데 대소집이라고?”
시로네가 미니와 아리아나를 거실로 안내하며 물었다.
“네. 태성께서 직접 내리신 지령이에요. 별의 칭호를 받은 모든 주민은 위성을 데리고 모일 것.”
“그래요…….”
차를 따르는 시로네의 얼굴은 차분했다.
“알고 계셨나요?”
명상에 잠기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으니 기별을 받은 건 전무했다.
“아니요. 하지만 짐작은 가네요.”
현재 하비츠는 극악이지만, 프로젝트가 실패한 순간 이미 직감적으로 느꼈다.
‘죽일 수 없어.’
어떤 상황에 몰아넣어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의 바깥에 있기 때문.
지옥의 군대가 세상을 물들이는 지금 태성이 전 인원을 소집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많이 힘드셨군요.”
전에 봤을 때보다 초췌해진 시로네의 얼굴을 보고 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상아탑의 어떤 부서도 시로네 씨처럼 싸우지는 않아요. 휴식이 필요해요.”
상아탑 5개의 부서 중에서 임무의 범주가 가장 넓은 것이 통합우주관리부였다.
“가장 좋은 휴식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아리아나의 눈이 퀭해졌다.
‘듣던 대로 외골수네.’
애초에 야훼라는 경지 자체가 인간이 감당할 스트레스가 아닌 것이다.
인류 최강의 구도자라는 미로조차 율법의 반경은 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시로네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괜찮아요.”
아리아나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귀엽네.’
땅에 눕혀 놓고 잔뜩 압박해 주고 싶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것은…….’
환상의 페어답게 남자 보는 취향까지 똑같은 미니가 스케일 마법을 발동했다.
마치 사물을 확대한 것처럼 그녀의 몸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오대성의 피로 회복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시로네가 멍하니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특단의 조치?”
정장 코트의 앞섶을 풀어 헤친 그녀가 가슴골을 드러내며 시로네에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여자 가슴에 파묻히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거예요.”
확실히 시로네가 들어가기에 충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