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74
미네르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거야, 시로네.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이다.’
오대성, 별의 칭호를 받은 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수많은 인간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점이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래서 미쳐 가고 있는 거잖아.’
함께 싸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오대성이 가진 우울증의 원인이었다.
“이 세상에 인류는 없습니다. 인간, 인간, 인간만 있을 뿐이죠.”
씽의 지론에 따르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곳에 홀로 떨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솔직히 모르겠네요. 이 세상에 여러 명의 인간이 산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오직 저만이 인간이고, 여러분 모두는 허상일 겁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 인형이다.
세상 모두에게 접목시켜도 씽의 말에서 모순을 증명할 인간은 없을 터였다.
“따라서 저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 오직 저만의 세계를 가꾸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허상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시로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저런 생각을 가질 수 있지?’
하지만 그 철학이야말로 씽이 극단적으로 율법을 조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프리드라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의 뜻에 어울리려고 했으나…….”
여전히 거대한 씽이 광활한 바닥에 서 있는 시로네를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시로네라는 허상도, 상당히 독특하네요.”
‘대체 뭐야?’
씽이라는 여자에 대해 분석할 수 없었다.
우울증 (3)
율법부의 씽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자 상아탑 주민들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율법부의 인원은 5명이지만 보유의 별의 개수는 17개로 가장 높았다.
어떤 부서에는 1명도 없는 4성급을 둘이나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강력한 율법이다.’
시로네가 눈에 힘을 주고 화신의 힘을 높이자 점차 씽의 존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프리드와 아만타, 미네르바가 씽의 율법을 이겨 내고, 4성급과 3성급이 뒤를 따랐다.
‘크윽! 안 되겠어!’
하지만 2성급 아래의 주민들은 여전히 씽의 존재감에 눌린 채 힘을 쓰지 못했다.
프리드가 씽에게 물었다.
“설마 너, 통합우주관리부에 붙을 셈이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너하고는 상관없어. 하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씽이 덧붙였다.
“아직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야. 다만 시로네라는 허상이 독특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가 시로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인류를 구하려고 하지? 너는 다른 허상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인가?”
나도 인간이에요, 라고 답하고 싶었으나 시로네는 결국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씽의 논리를 바꿀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망상도 아니야. 율법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
그런데 전부 허상이라.
반대로 생각하면, 씽이야말로 자신에게 허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허상…….’
인간은 참으로 외로운 존재다.
‘그게 싫은 거야.’
오늘따라 통합적 정신 체계를 이룩한 가이아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짜든 진짜든 상관없잖아요. 이대로 두면 지옥의 군대에 세상은 멸망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는 상아탑도 있어요.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돼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시로네는 움찔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이 자리의 모두는 세상을 제법 이해하는 레벨로 설계되어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지?”
프리드가 동의했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시로네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대소집에서는 어떤 의견도 관철시킬 수 있지만, 거짓말은 하면 안 되지. 지옥의 군대가 어디서 왔을 거라고 생각해? 살인자? 강간범? 물론 지분은 좀 있겠지만, 아니야. 그냥 우리들에게서 나온 거라고.”
프리드가 두 팔을 벌렸다.
“너는 아마도 야훼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했겠지. 하지만 모두 마찬가지야. 그래서 남은 게 뭔데? 인간에 대한 사랑? 아니, 사실은 우리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전 인류가 경쟁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프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인간이 없어서잖아.”
“…….”
“꿈? 성취감? 어떤 말로 포장해도 마찬가지야. 인간과 얽히고 싶지 않고, 치이고 싶지 않지. 네 눈에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가장 빛나 보였던 이유는, 단지 그 자리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아탑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얼마나 많은 시시껄렁한 논쟁을 벌였지? 얼마나 네 생각을 부정당하고, 조롱받았지? 하지만 저곳에 가면 아무도 없다. 정상의 메리트는 그거 하나로 충분해. 인간의 본성을 피부로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시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또한 알고 있을 텐데? 세상에 환멸을 느끼지 않았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인간을 구하자고? 우리는 각자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뿐이야. 나네의 말을 빌리자면 대정화라고도 하지.”
태성이 입을 열었다.
“프리드, 나네의 철학은 이미 가올드에게…….”
“태성님.”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제가 계속 말할게요.”
서늘한 한기를 느낀 태성이 입을 다물고, 미네르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시로네가 프리드에게 시선을 겨누었다.
“당신의 말이 옳아.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해. 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을 용서했어. 왜냐하면,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나는 야훼가 아니야.”
시로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화가 나더라고.”
프리드가 그제야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왜 나는 행복할 수 없지? 너무 화가 나고 분해서 결국…….”
시로네가 자신의 가슴을 엄지로 짚었다.
“여기에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 버렸지.”
굳이 가슴을 열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시로네의 위태로운 기운이 분노의 크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다시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이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여기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똑같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건 네 사정…….”
“알아 달라는 게 아니야.”
시로네의 눈빛이 변했다.
“왜 나에게 모두를 구원할 기회가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로 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야훼의 경지를 나 스스로 놓아 버리는 순간…….”
그것은 시로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줌의 분노였다.
“아무도 행복할 수 없어.”
각 부서의 오대성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갑자기 시커먼 괴물이 시로네의 옷을 찢고 튀어나오더니 별들을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
“흐읍!”
2성급 주민들이 놀라서 상체를 젖혔다.
‘아니, 괴물이 아니야.’
정신을 차리자 형태만으로 압도했던 수많은 가시들이 사라지고 한 자루가 진동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질만으로 이 발동했어. 저건 내 전성기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건데.’
가히 세상 전체를 향한 살의에, 프리드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협박하는 거냐?”
“그래. 하지만 내 의지는 아니야.”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야훼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끔찍한 내면의 괴물.
‘그 분노를 가둘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면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박애였던 것이다.
‘한 번만 더…….’
시로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인간이 싫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사랑했다는 얘기잖아. 사실은 모두 함께 살아가고 싶은 거잖아?”
입술을 굳게 다문 씽이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모두 함께?’
그녀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인간 따위, 온갖 감정을 연기하며 날 괴롭게 하는 허상이잖아.’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생겼다.
시로네가 허상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절대자가 나타나 그가 인간이라는 보증만 해 준다면.
‘어쩌면 생각을 달리할지도…….’
모든 별들의 시선이 프리드에게 집중된 가운데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보통의 인간은 1분도 버티지 못할 분위기지만 별들은 1시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때 시스템감찰부의 3성급 주민 람파가 손을 들었다.
100세가 넘는 노인이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등에는 어느새 노란 빛을 내는 새가 올라와 있었다.
‘람파. 세계 최고의 정보 마법사.’
그의 정보 전달 마법 텔레버드의 반경은 행성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 감시를 받으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던 프리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처럼 중요한 시국에.”
“판단을 내리시기 전에 알려 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조금 전, 카샨 제국의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시로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황제가 바뀌었다고요?”
람파는 프리드의 지시를 기다렸다.
“계속해 봐.”
“현재 계승식이 끝났습니다. 새로운 황제는 테라제 미스트라의 생물학적 아들 간도입니다. 또한 카샨은 성전에서 탈퇴, 구스타프의 편에 붙을 것 같습니다.”
‘우오린이…… 카샨을 포기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스타프의 세력이 지금보다 월등히 강해진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태성이 가이아의 능력으로 카샨의 영토를 비췄다.
***
“이랴! 달려라! 달려!”
하비츠는 지옥의 군대를 등 뒤에 이끌고 카샨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질주했다.
지평선 저 멀리에서 수도를 지키는 카샨의 방위군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만날 자기들만 재미 보고 말이야.’
점령지의 포로들을 괴롭히는 것도, 높은 차에 앉아서 하루 종일 이동하는 것도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간다!”
하비츠의 돌발 행동에 화들짝 놀란 스모도가 황급히 말을 타고 뒤쫓았다.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율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지만 결국 인간, 칼에 찔리면 죽는 수밖에 없다.
스모도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는 발칸에게 소리쳤다.
“이래도 되는 거야? 저러다 죽어!”
“아니.”
발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 죽어.”
3만에 달하는 카샨의 방위군과 지옥의 군대가 뚜렷한 경계선을 만들며 충돌했다.
하비츠의 모습이 병장기 속에 파묻혔다.
“나도 좀 죽여 보자!”
아이처럼 전장을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르는 하비츠의 무위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를 죽이지 못했고, 피 맛을 본 그는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뭐야? 저거 황제잖아?”
궁수 부대의 천인장이 급격히 방향을 선회하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쏴라! 저 녀석만 잡으면 전쟁은 끝난다!”
천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하늘로 솟구친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자 최고급 마정탄이 폭발했다.
반경 일대가 초토화되고, 거대한 덩치의 마족들이 살점이 터져 나간 채 바닥을 뒹굴었다.
“끝났나?”
천인장의 눈에 희망의 빛이 담겼다.
하지만 그 순간, 포연을 가르며 사지 멀쩡한 하비츠가 튀어나왔다.
“제길! 전원 재장전…… 아니, 내가 직접 해치우겠다!”
천인장이 검을 빼 들고 돌진하자 하비츠도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 마주 달려왔다.
‘멍청한 놈. 죽으려고 작정했군.’
주위에 수많은 마족들이 싸우고 있지만 사탄을 돕겠다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잡을 수 있어! 내가 잡는다! 영웅이 된다!’
일 합을 겨룬 것만으로도 하비츠의 검술이 중급이나 겨우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진짜야! 내가 황제를…….’
심장이 거칠게 뛰고.
“이야아아아!”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일검을 내질렀다.
“뭐……!”
상체를 젖힌 하비츠의 목젖을 스치고 칼날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