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75
‘운이 좋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연거푸 검을 휘둘러 보지만 하비츠의 옷깃만 아슬아슬하게 베여 나갈 뿐이었다.
‘제길! 갑옷도 없는 놈을! 사실은 검의 고수인 거야?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동작은…….’
보고 피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
하비츠의 얼굴을 본 순간, 천인장의 몸이 얼어붙으면서 전율이 치밀었다.
‘눈을…… 감고 있어?’
발칸이 미소를 지었다.
“기적이 아니다.”
역사를 살았던 모든 인류가 주사위를 던졌을 때, 마지막에 남은 자가 하비츠인 것뿐이었다.
‘확률이야, 확률.’
어쨌든 누군가는 남을 수밖에 없기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수십억의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듯이.
“폐하! 재밌으십니까!”
천인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린 발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멈췄다.
“그럭저럭. 하지만 빨리 우오린이 보고 싶군.”
“조만간 수중에 들어오겠지요.”
스모도가 뒤늦게 도착하자 발칸이 아가노스로 전진하는 지옥의 군대를 넘어다보았다.
저 멀리 하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울증 (4)
***
하비츠의 군대는 카샨의 수도에 무혈입성했다.
집집마다 하얀 깃발이 걸려 있고 주민들은 겁에 질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지 전쟁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선봉이 휩쓸고 지나갔는지, 거리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싱싱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스모도가 미소를 지었다.
“사태 파악이 빠르군. 역시 카샨의 여황이야.”
발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황위 계승식이 있었다고 들었어. 이미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게 왜 중요하지?”
“여황을 숨긴 채로 협상을 할 생각이겠지. 조건만 맞으면 받는 것도 좋아. 어차피 우리야 즐기면 그만이니까.”
황성 아가노스의 입구에 도착하자 지옥의 군대가 사방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황성 내부의 진풍경이 드러났다.
“흐으으으…….”
천 명이 넘는 인간들이 다양한 고문 기구에 구속당한 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고문 기구는 다시 기계장치를 따라 사방에 놓여 있는 악기처럼 생긴 물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제타로가 만든 거로군.”
외성 문을 넘어가자 이번 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마족이 하비츠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키에 가시가 박힌 검은 철갑을 입은, 빼어난 미남자였다.
지옥의 군대 제7군단장 아몬.
사탄의 직계로 불리는 10명의 군단장 중 1명으로, 지옥 불에 달구어진 흑철검을 사용한다.
마의 군단장들은 누구 하나 약한 자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서열 10위 내의 자들은 무력의 차원이 달랐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탄이시여.”
하비츠의 외모는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아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하비츠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4개의 붉은 삼각형이야말로 율법 외의 존재라는 징표였다.
발칸이 물었다.
“카샨의 지배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성 문이 있는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막 황제가 된 간도와, 여태까지 카샨을 지배했던 최고 귀족들이었다.
아몬이 하비츠에게 말했다.
“이번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제타로가 준비한 이벤트입니다. 모쪼록 즐겨 주시길.”
그렇게 말하고 지시를 내리자 마족으로 구성된 음악단 100명이 각자의 위치에 포진했다.
머리카락이 온통 촉수로 이루어진 붉은 피부의 여성체들이 악보를 들고 섰다.
작달막하고 살이 피둥피둥 오른 지휘자가 악단을 둘러보더니 지휘봉을 휘저었다.
수많은 악기가 연주되자.
“……!”
천 명이 넘는 인간들이 저마다 다른 음높이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첫 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간도를 위시한 귀족들은 온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지독한 녀석들.’
간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옥의 군대!”
인간의 비명으로 만든 음악에 맞춰, 성악대가 복부를 한껏 부풀리며 노래를 불렀다.
악기를 연주할 때마다 쿵덕쿵덕 움직이는 고문 기구가 인간의 목소리를 더욱 강하게 쥐어짜 냈다.
“혼돈의 세계!”
가히 지옥의 노랫소리였고, 이번만큼은 발칸과 스모도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진짜 죽이는데…….”
제타로는 천재다.
하비츠도 나쁘지 않은 눈치였으나 음악을 잠시 듣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게 고작이었다.
“가시지요.”
아몬이 길을 인도하자 하비츠 일행은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성악대를 지나 간도에게 다가갔다.
‘지루하지는 않아. 하지만…….’
자신을 맞이하는 자가 우오린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흥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여황의 노래야.’
항복한 제국의 황제를 하비츠가 직접 맞이할 필요는 없지만, 대담하게도 그는 코앞까지 다가갔다.
“우오린은?”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간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에 있습니다. 다만 그녀를 만나기 전에, 카샨 제국의 황제로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발칸이 비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카샨의 통치권을 넘기겠습니다. 저를 중용하셔도 되지만 불편하면 참수하십시오. 다만 더 이상의 피는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국민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십시오.”
최고 귀족들의 얼굴이 감격에 젖었다.
‘죄송합니다, 여황 폐하.’
테라제의 명예를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팔아서까지,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결단이었다.
“…….”
하비츠는 무심한 눈빛으로 간도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분석할 생각이 없는 눈동자였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에 간도는 현기증이 났다.
‘어머니…….’
어제저녁, 우오린이 간도를 불렀다.
“이대로는 전쟁에 진다. 성전의 도움도 한계야. 카샨은 곧 멸망할 것이다.”
간도는 개의치 않았다.
분명 화가 나고 절망해야 할 상황이건만, 어째서인지 감정의 요동이 없었다.
아마도 평소와 다르게 창백하게 질려 있는 우오린의 얼굴 때문이리라.
‘어머니에게도 공포라는 게 있군요.’
역사를 아우르는 능력으로 패배를 몰랐던 그녀지만 대정화기부터는 미지의 영역.
무엇보다 혼돈의 하비츠가 상대라는 것이 최악이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남은 병력과 성전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탈출로를…….”
“아니, 그것으로는 하비츠를 벗어날 수 없어.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결말인지도 생각했어.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은…….”
우오린이 간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살아야겠다.”
겁에 질린 토끼 같은 표정이었으나 오직 눈동자만은 여전히 삶의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비츠에게 잡히는 것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간도야, 살고 싶다.”
간도는 우오린이 무엇을 할 것인지 깨달았다.
‘오직 사는 것에 집중한다.’
카샨의 역사도, 테라제의 명예도, 관료들의 목숨도, 국민들의 삶도 전부 팽개치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그 테라제가…….’
황제의 책임을 저버린 것에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세상의 정점에 올랐던 그녀가 간절하게 삶에 집착하는 모습이 싫은 것이었다.
“어머니, 차라리 제가…….”
“살려 다오.”
간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비츠의 혼돈에서 빠져나온 간도가 말했다.
“그것이 저희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제안을 받아 주신다면 지금 당장 아가노스를 개방하겠습니다.”
발칸이 물었다.
“거절한다면?”
“그때는 카샨이 멸망하겠지요. 하지만 구스타프 제국이 원하는 건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우오린.”
하비츠가 입을 열었다.
“어디 있지?”
간도는 아가노스의 최고층을 가리켰다.
펄럭거리는 백기 바로 아래의 창문에서 백발의 여성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한참이나 첨탑을 올려다보던 하비츠가 입을 열었다.
“아몬.”
철갑을 걸친 아몬이 옆으로 다가왔다.
“전부 죽여.”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몬의 검이 검은 잔상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증발하듯 전기로 변해 사라진 간도를 제외한 모든 귀족들의 몸통이 둘로 쪼개졌다.
“꺄아아아악!”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제길!”
인파가 갈라지는 곳에 스파크 마법을 시전한 간도가 인상을 찡그리고 엎드려 있었다.
‘눈치챈 건가?’
아니,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이다.
‘확실히 여황님의 천적이야.’
플랜 A가 실패한 지금 간도의 눈은 불과 20미터 앞에 있는 하비츠에게 쏠렸다.
‘죽일 수만 있다면…….’
어차피 내놓은 목숨이었다.
지옥의 군대를 향해 스파크 마법을 시전한 간도가 하비츠의 앞에서 라이트닝을 시전했다.
“으아아아아!”
마력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은 완벽한 해방.
푸른 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대기를 어지럽게 할퀴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어어엉!
‘놓쳤어!’
아몬의 수하인 사단장급의 마족이 하비츠를 끌어안고 하늘로 솟아오른 상태였다.
스모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마족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하비츠는 죽었을까?’
발칸이 검을 뽑아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스모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죽지 않는다, 그것만 머릿속에 박아 둬.”
“……그렇군. 알았네.”
카샨의 근위대가 공세를 퍼붓고 있으나 제7군단장의 직속부대도 만만치 않았다.
“함정이었을까?”
발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 군중기에는 어떠한 살기도 잡히지 않았어. 정말로 항복하려고 했던 거야.”
“그럼 도대체 왜?”
발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하군, 테라제.”
10억에 가까운 국민들을 전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살고자 한 것이다.
“첨탑으로 가!”
아몬이 순식간에 첨탑으로 날아가 창문에 서 있는 여자를 붙잡고 내려왔다.
머리를 하얗게 염색한 여자가 겁에 질린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사, 살려 주…….”
목숨을 구걸하려던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여황 폐하, 만세!”
일 검에 목을 베어 버린 발칸이 기력이 소진된 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오린. 어디에 있지?”
간도는 한쪽 입꼬리를 힘겹게 올릴 뿐이었다.
***
오대성들이 각자의 철학을 고수하며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다른 별들이 논쟁을 벌였다.
미니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카샨으로 가야 합니다! 삼황계가 붕괴되면 마족의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왜 그래야 하지? 카샨은 마족에게 붙으려고 했어. 이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인간이지.”
“저도 동의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일이에요. 상아탑은 초국적인 목적을 추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