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80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당신을 이길 수 없어요.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우오린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살고 싶습니다.”
테라제의 인생에서 이토록 비굴한 순간은 없었지만, 원통한 마음은 없었다.
‘이것이 패배다. 단지 그것뿐이야.’
이 세계는 모두가 이길 수 없는 구조이고, 극한에서 승자는 오직 1명뿐이었다.
태라제는 정점에 근접했으나 단지 마지막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을 뿐이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하비츠다.’
하비츠가 말했다.
“좋아, 살려 줄게.”
우오린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하비츠는 이미 흥미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가자.”
스모도가 황당하게 되물었다.
“어디를 가요?”
“다른 전쟁터로. 돌아오라고 부르기 전에 세계 정복을 끝내야 하지 않겠어?”
대체 누가 하비츠를 부른다는 것일까?
“나는 중부 대륙으로 간다. 여기는 발칸에게 알아서 하라고 그래. 이런 거 좋아하잖아?”
하비츠가 휘파람을 불자 하늘을 선회하던 마수가 빠르게 지상에 안착했다.
넓은 등짝에 탑승한 그가, 날아오르기 직전 우오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심히 해라. 즐겨 봐.”
생애 최강의 적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입장에서 우오린은 말할 수 없는 기괴함을 느꼈다.
“왜…….”
자존심은 버렸어도 테라제의 이름을 가진 여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살려 주는 거죠?”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가장 큰 적이었잖아요. 아내가 죽은 것도 나 때문인데. 도대체 왜?”
“살고 싶다며?”
대답이 단순한 만큼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나는 카샨의 여황입니다. 훗날 당신의 뒤를 칠지도 모르고 또한…….”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하비츠는 심드렁했다.
“여황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으니까. 내 뒤를 친다면, 다시 싸우면 그만이야.”
자기과시의 극치.
인간이 정의한 선악이기에, 자신이 하는 짓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모른다.
그 혼돈 자체가 극악인 것이다.
“재밌었다. 안녕.”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마수를 스모도가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우오린은 생각에 잠겼다.
‘안녕? 재밌었다고?’
하비츠에게 이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그 순간 테라제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정보가 떠올랐다.
‘맥클라인 거핀.’
이미 말소되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비츠의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망상과도 같은 기억에 의하면…….
‘재밌었다. 안녕.’
광자계를 이탈하기 전에 거핀이 남긴 마지막 말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일 거야.’
거핀에 대한 밑사건을 가지고 있는 그녀라도 했던 말까지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만약 사실이라면.
‘신이 있다면.’
정말로 이 세계에 관심을 갖기는 하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그저 무한히 많은 창조물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비츠는…….’
오히려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일 터였다.
“아직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스모도가 칼을 꺼내 들고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너를 살렸지만,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너의 목이…….”
“스모도오오오!”
눈에 핏발을 세우며 달려온 발칸이 마수를 멈추자마자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비츠! 하비츠는 어디 있어?”
스모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가 버렸어. 여황을 죽이지도 않고 다른 전장으로 떠나 버렸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발칸은 우오린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으로 정황을 파악한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됐다. 이제 됐어.”
눈앞에 화살이 빗발쳐도 하비츠를 잡을 수 있는 미래는 펼쳐지지 않는다.
‘간발의 차이였어.’
그렇기에 8킬로미터나 떨어진 장소에서 하비츠를 떠나게 한 시로네의 율법이 더욱 끔찍했다.
‘1센티미터와 8킬로미터의 차이. 그게 현재 시로네가 가진 율법의 강도라고 봐야 한다.’
발칸이 스모도에게 타라는 시늉을 했다.
“가자. 여기는 지옥의 군대에 맡겨 두고 하비츠를 따라간다.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아.”
하비츠가 아예 카샨을 떠났다는 것은, 조만간 이곳에 대재앙이 펼쳐질 것이란 예언과 같았다.
스모도가 마수에 탑승하자 발칸이 고삐를 잡아채며 아몬에게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야훼를 막아라.”
“야훼…….”
이미 제7군단의 마족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몬이 즉각 몸을 돌렸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우오린은 의식을 잃은 키도를 무릎에 눕힌 채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 와 주었구나.’
보고 싶었다.
“여황님.”
20명의 풍장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그녀의 주위를 빠르게 회전했다.
“약한 지대를 찾았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우오린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황성으로 간다. 아직 함락되기 전이니 의원이 있을 거야. 키도를 치료해.”
“하지만…….”
“이 전쟁의 끝을 봐야겠다.”
***
크아아앙!
마침내 시로네의 무기 ‘살수’가 황성에 진입했다.
야훼의 분노를 원천으로 하는 의 엔진이 살수를 움직일 때마다 마족들이 폭발했다.
사방에서 공포의 비명이 들렸으나 회개하는 목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째서!’
묻고 싶다, 인간이여.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생각을 그만두고 사랑을 실천하면 안 되는 것인가?
‘불가능하다.’
단 하나의 악이라도 존재하는 한, 선은 멍청하고 한심하며 비효율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
그래서 사람들은 악의 방법론을 멋지고, 스마트하며, 깨친 자의 특권이라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제 만족하냐?’
그렇다면 절대 악이 강림한 세계에서, 인간들은 왜 피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가.
‘용서할 수 있어. 내가 구해 줄 거야.’
하지만 가끔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옆의 사람들을 구해! 그러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그 절규하는 목소리조차 공허한 메아리 같아서, 지독히도 화가 나는 것이었다.
“으으으으……!”
시로네의 함성이.
크아아앙!
살수의 괴성으로 바뀌면서 주위에 있는 마족들을 순식간에 폭사시켰다.
“야훼에에에에!”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흑철 갑옷을 입은 아몬이 살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크으으으으!”
살수의 가시를 두 손으로 붙잡은 그가 땅으로 짓누르자 흙더미가 기하급수로 커지기 시작했다.
“저건…….”
의 엔진이 처음으로 저항을 받는 상황에 시로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군단장이다.’
수십 미터를 밀려나면서도 자세를 풀지 않자 마침내 살수가 땅속 깊숙한 곳으로 파묻혔다.
“크크크. 고작 이거냐, 야훼여?”
풍장을 타고 아가노스의 첨탑에 도착한 우오린은 착지와 동시에 전장을 살폈다.
“시로네…….”
상아탑 오대성의 능력이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눈으로 확인한 아몬의 실력도 별들을 상회했다.
“죽어라, 야훼!”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린 아몬이 검을 휘두르자 시로네가 순간 이동을 시전하며 물러섰다.
“이런…….”
순식간에 거리를 따라잡은 아몬이 검을 휘둘러 시로네의 목을 베었다.
여기까지가 1초.
“죽어라, 야훼!”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되었다.
동일 사건에 대한 시로네의 학습이 시작되면서 대응 방식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막는다!’
사망.
‘반격한다!’
사망.
경험이 누적될 때마다 시로네의 반응은 더욱 빨라졌다.
‘반격 루트를 찾았어!’
그리고 마침내 2천 회 차를 돌파했을 때 검의 궤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상하다.’
아몬에게는 어디까지나 1초.
‘우연이 아니야. 이건 어떤 기술이다.’
무엇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로네의 움직임에서 묘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물리 기반의 움직임이 아니야. 이렇게 움직일 수가 없어. 그래, 이건 마치…….’
하나의 동작을 무수히 쪼개서 가장 좋은 느낌들만 짜깁기해 놓은 느낌.
그렇기에 인간이 움직이는 것임에도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려 1만 2천 회의 경험이 누적되는 움직임을 봤을 때는 세상이 기름처럼 출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군.’
아몬은 깨달았다.
‘그래서 사탄께서…….’
대략 4만 번의 학습 끝에 시로네는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확실히 강하다.’
검술의 실력만 따졌을 때는 프리드에게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정도였다.
최강의 위력을 담은 포톤 캐논이 쏘아졌다.
‘여기서 끝낸다!’
분명 직사의 섬광.
하지만 아몬에게는 모든 사건을 거치고 들어오는 역겨운 굴곡처럼 느껴졌다.
대략 9만 8천 회.
지금의 결과를 얻기 위해 시로네가 학습한 횟수였다.
“크윽!”
포톤 캐논이 아몬의 복부에 처박히자 몸이 밀리기도 전에 갑옷이 펑 하고 터졌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밀려나는 아몬의 몸에 수많은 마족들이 충돌하며 튕겨 나갔다.
콰아아아앙!
벽에 처박힌 순간 굉음이 터지고, 전투에 한창이던 모든 마족들이 동작을 멈췄다.
“군단장님…….”
아몬을 따라 전쟁터를 누볐던 수족들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로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아몬이 파묻혀 있는 돌무더기를 노려보았다.
‘관통시키지 못했어.’
육체의 내구력이 여타의 생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됐어! 이길 수 있다!”
아가노스의 첨탑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우오린이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군단장만 쓰러뜨리면…….”
그때, 땅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지더니 급기야 황성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황님! 대피를!”
풍장이 소리쳤으나 우오린의 시선은 아몬이 처박힌 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곳이다.’
뭔가 끔찍한 것이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