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89
“아, 씨! 진짜!”
언제 그랬냐는 듯 유정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고개를 틀었다.
“귀찮아 죽겠네! 왜 깨우고 지랄이야?”
“전투가 있다. 나와 함께 가자.”
유정이 풋 하고 웃었다.
“전투? 천사도 노망이 드나? 눈이 풀린 걸 보니 완전히 맛이 갔구만?”
“부처가 파계를 허했다. 이제는 너를 구속할 게 아무것도 없어.”
눈을 깜박거리던 유정이 머리에 두른 금띠를 확인하더니 손으로 빼냈다.
“어라? 진짜 빠지네?”
“네가 필요한 일이 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너에게 자유를 주마.”
유정이 금띠를 휙 집어 던졌다.
“싫어. 귀찮아.”
“여전히 오만하구나. 내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해도 정말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무사하지 않으면?”
여의봉을 집어 들고 튀어 나갈 자세를 취한 유정의 눈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네가 어쩔 건데?”
동굴이 폭발할 정도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역시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이카엘은 두 번째 방법을 시도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하지만 지옥에 떨어진 친구를 구해야 하지 않겠어?”
“친구? 친구 누구?”
“십로회의 서열 10위, 모르타싱어. 그녀가 악의 지배자에게 끌려가 고통을 받고 있다.”
“뭐? 몰타가?”
유정이 벌떡 일어섰다.
그나마 그녀에게 기대해 볼 만한 것이라면, 원숭이의 도리는 안다는 것.
“싫다면 할 수 없지. 여기서 계속 잠이나…….”
“기다려.”
유정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떤 놈이야, 내 친구 괴롭힌 개자식이?”
이카엘이 미소를 지으며 동굴 밖을 가리켰다.
“사탄.”
가속화 (3)
***
진천 제국 동해.
성음이 공간을 왜곡시켜 도착한 곳은 백사장이 보이는 근해 상공이었다.
“진격! 진격하라! 물러서지 마라!”
태양 빛이 내리쬐는 백사장을 경계로 진천의 군대와 지옥의 군대가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소음이 한데 뒤엉켜 백색소음처럼 고막을 찌르는 가운데 시로네가 바다를 돌아보았다.
먼바다에 범선 크기의 마수들이 보였다.
백사장 쪽에서는 촉수가 달린 괴물들이 수 미터 높이에서 병사들을 내리찍고 있었다.
‘심각하다.’
하늘에서 살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은, 해안가가 점령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진천이 여태까지 막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지옥의 군대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였다.
“저기에 인간이 있다!”
창처럼 긴 부리를 가진 마족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성음에게 날아들었다.
‘에테르 파동!’
성음이 공간을 굴절시키자 풍경이 복잡하게 얽히더니 마족들의 부리가 동료들의 몸을 관통했다.
“크에에에에!”
수백 마리의 마족들이 동시에 바다로 추락하는 것을 지켜본 성음이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이미 육로 쪽에서도 지옥의 군대가 동방 7왕국을 점령하며 올라오고 있다. 이곳 바다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면 진천은 멸망하고 말 거야.”
시로네에게 진천의 가치는 타국과 동등했지만, 전략적으로 봤을 때는 그 이상이었다.
“당장 싸우겠어. 백사장으로 가자.”
리안이 대직도의 손잡이를 붙잡고 출격할 준비를 하는 그때, 성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병사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성음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저어 에테르 파동을 시전했다.
마치 양탄자가 구겨지듯 풍경이 당겨지더니 황성 염라의 정경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숲과 건물이 급류처럼 흐르고, 두꺼운 벽을 관통하자 관료들이 모여 있는 대전이 나왔다.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해안가를 수복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황성으로 밀고 들어올 거예요!”
군사들이 둘로 나뉘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리한 싸움을 계속하잔 말이오? 소모전에도 한계라는 게 있소!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오!”
떠드는 소리 또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쪽으로.”
성음이 시로네와 리안을 뒤에 달고 용상으로 걸어갔다.
“폐하!”
턱을 괸 채로 군사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진강이 시선만 움직여 이쪽을 보았다.
“왔느냐?”
제국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음에도 황제의 눈빛에서는 불안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우오린과는 또 다른 황제로구나.’
겁에 질린 모습보다는 훨씬 대하기 좋았기에, 시로네는 상아탑의 별임에도 진천의 예법을 따랐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 없네.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쪽이니까 말이야.”
시로네가 포권을 풀고 말했다.
“국가를 막론하고 힘든 시기지요. 상심이 크시겠어요.”
“상심은 무슨.”
진강이 입꼬리를 올렸다.
“망하면 망하는 거지.”
시끄럽던 대전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진천우주국의 안찰이 두 팔을 길게 뻗으며 납작 엎드린 채로 고했다.
“폐하, 진천은 망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고 있으니 조만간 전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최선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신하들이 자세를 고치고 무릎을 꿇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그 지점이 최강이다. 현실에 없는 것을 끌어다 쓰려고 하니까 약해지는 것이야. 언제나 말하지만…….”
진강의 눈에서 깊은 느낌이 묻어났다.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을 이긴다.”
군사들이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면, 부딪쳐 봐. 그러다 보면 또 뭔가 생기게 마련이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벌써부터 두려움에 벌벌 떨지 마라.”
“지엄한 명을 받들겠나이다.”
군사들이 모두 절을 하는 가운데 진강이 뒷짐을 지고 시로네에게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네만?”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게 효율적이니까요.”
“그런가.”
진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상아탑의 마법사가 보기에도 현재 진천의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자네에게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겠군.”
“동해로 가겠습니다. 군단장을 쓰러뜨리면 마족의 기세도 한풀 꺾일 거예요.”
“아니. 위태롭기는 하지만 진천이 그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성음이 말해 줄 걸세.”
진강이 성음을 돌아보자 그녀도 복잡한 눈빛으로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많은 시간을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성음이 포권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소서.”
마치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그래.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리고 상아탑의 마법사여, 비록 세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성음의 뜻을 존중해 주게.”
“그게 무슨…….”
시로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성음이 에테르 파동을 시전해 자리를 옮겼다.
대전이 밀려나면서 성음이 머무는 궁전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삼보의 대장 문경이 마중을 나왔다.
상아탑 시험에서 안면을 익혔으나 어째서인지 밤새 운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주위의 시녀들도 모두 성음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오히려 별다른 내색 없이 시로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친구와 할 얘기가 있다. 숙소를 내어 다오.”
“이쪽으로 오시지요.”
문경이 삼 보의 거리에서 뒤를 따르고, 다른 시녀들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성음을 안내했다.
‘여전하구나.’
공간에 대한 결벽은 시로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곁에 바짝 다가갈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영 보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기에 문경도 시로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가씨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이라는 게 서글펐다.
“들어가시지요.”
문경이 숙소를 열자 단정하게 정리된 별채에 원탁과 침대가 놓여 있는 방이 나왔다.
성음의 취향대로였다.
“모두 나가 있어라.”
“하오나 아가씨, 이 검사는…….”
성음이 영 보를 허락한 자는 오직 시로네뿐.
리안을 좁은 방에 함께 둘 수는 없었다.
“괜찮다. 내가 허락한다.”
성음은 리안을 돌아보았다.
이미르의 분신을 쓰러뜨린 무위에 놀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성장해 있었다.
‘단언컨대, 세계 최강일 것이다.’
시로네는 이런 자를 곁에 두고 싸우는 것인가?
어쨌거나 진천 제국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기에 성음은 그에게도 거리를 매겨 주었다.
“0.1보.”
시로네와 똑같은 거리는 아무래도 내줄 수 없었다.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가자 문경도 더 이상은 따질 말이 없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로네와 리안, 성음이 원탁에 둥그렇게 앉았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마. 상아탑의 별이 된 네가 얼마나 바쁠 것인지는 능히 짐작하고 있다.”
“괜찮아. 이게 내 일이니까. 그나저나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뭐야? 또 황제께서는 어째서…….”
성음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혹시 기억하고 있니? 내가 너를 상아탑에 데려다주었을 때, 너에게 물었지. 나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냐고.”
“응? 시간?”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이기에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아, 그랬었지. 10일이라고 했던가?”
“그래, 10일.”
시로네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할 것 같아.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킬게.”
“그럴 필요 없어. 잊어버려.”
성음은 웃고 있었으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다. 지금도 수많은 진천의 백성들이 죽어 가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약속과는 상관없이…….”
성음이 간절한 눈빛으로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하루. 단 하루만 나에게 시간을 내어 다오.”
리안이 흐음 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시로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하루?’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이게 다 뭐야?”
전장에서 합류한 하비츠와 구스타프 4기예는 전장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막사를 꾸렸다.
발칸의 지시에 따라 길목에 있는 모든 도시의 인간들을 죽였지만 스모도에게 줄 전리품은 있었다.
“흐윽. 흐으으윽.”
대략 2천 명의 꽃다운 소녀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땅바닥에 앉은 제타로가 풀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전 세계의 여자를 다 차지하겠다며. 사실 데리고 다니기 귀찮아서 많이 죽였어. 네 취향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기준으로 대충 뽑았다.”
나타샤가 숫자를 세다가 포기했다.
“하루에 10명씩만 잡아도 엄청 걸리겠네. 스모도,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다가 뼈 삭아.”
“걱정은 접어 두라고.”
스모도는 포기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