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
진검이라면, 목숨을 건 상황이라면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내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너만큼은 반드시 뛰어넘을 테니까.”
리안의 마지막 말이 시로네의 발을 묶었다.
목숨보다 값진 기회(4)
***
다음 날 아침.
시로네는 피곤한 몰골로 도서관에 출근했다. 간밤의 일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마음이 심란하자 분류 작업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침착하자.’
시로네는 애써 냉정함을 되찾았다.
‘당장 죽는 건 아니야.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우선은 호구조사였다.
나름대로 모은 정보에 의하면 가주 비쇼프는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공인 6급의 검사였고 차남 라이도 형의 뒤를 따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검의 귀재였다.
장녀 또한 재능은 출중했으나 검보다는 음악을 선택해 왕궁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나씩 따져 보니 결국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은 리안이 유일했다.
가주가 전담 교사까지 붙여 주었지만 소질이 없다는 보고만 올라올 뿐이었다.
“하아, 괜한 짓을 했구나. 그냥 때리는 대로 맞을걸.”
평생을 형제와 비교당하고 살아온 리안이었으니 천둥패기에 발끈한 건 당연했다.
귀족이라고 다 뛰어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어쩐다지? 정말 큰일 났네.”
다시금 심란해진 시로네는 책상 아래 방치되어 있는 진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럴 시간이 없어.”
시로네는 벌떡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싸우든 안 싸우든, 준비는 무조건 해 두는 게 좋으니까.’
산에서 생활하며 체력에는 자신 있으니 방어법이라도 알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라.
당분간 역사책을 봉인한 그는 대신 검술에 관련된 책이란 책은 전부 챙겼다.
‘검술 교본’처럼 기술 서적도 있는 반면, ‘검이란 무엇인가?’, ‘인간만 검을 두려워한다’ 같은 철학서도 있었다.
‘허세로 이기자’,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같은 실용 서적도 보였다.
시로네는 단순 명쾌한 제목인 ‘검술’이라는 책을 펼쳤다.
검이 시작된 역사와 검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마법사 지망생인 시로네의 눈에도 흥미로웠다.
마법사에게 스피릿 존이 있다면, 검사에게는 스키마라는 것이 있었다.
스키마는 가상의 육체이자 인체 도식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스키마는 그것의 극단적 구현이었다.
스키마의 고수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에 신경은 물론 세포의 작용에까지 관여할 수 있다고 했다.
시로네는 책을 내려 두고 무릎을 쳤다.
“스피릿 존의 대칭형이야.”
마법사는 나를 지워 세상과 동화되지만, 검사는 더욱 집요하게 나라는 존재를 파고드는 것이다.
시로네는 스키마를 시도해 보았다.
스피릿 존에 들어가기 직전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가상의 자신을 느끼는 것.
‘역시, 여기까지는 수월하다.’
하지만 가상의 육체는 그림자처럼 어두워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어두운 장막을 전부 걷어 내면 스키마가 되는 거구나. 정말 대단하다.’
시로네는 다시 책을 들었다.
스키마를 터득하는 방법은 가문마다 천차만별이고 중점적으로 강화시키는 부분도 다르다고 적혀 있었다.
정신 수양으로 스키마를 연 가문이 있는 반면 육체를 극한으로 모는 가문도 있었다.
또한 어떤 가문은 근력을, 어떤 가문은 속도를, 어떤 가문은 신경을 강화시키는 데 스키마를 활용했다.
‘그러고 보니…….’
시로네는 3년 전 골목에서 만났던 붉은 머리의 소녀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집에서 생각해 보니 인간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스키마를 연 것이구나. 나랑 비슷한 나이였는데, 정말 대단한 재능이다.’
시로네는 책을 덮고 생각했다.
어차피 리안도 스키마를 터득하지 못했을 테지만, 자신이 시도하자니 장벽이 있었다.
‘스키마라고 해도 검술은 아니야. 스피릿 존이 마법이 아닌 것처럼.’
마법사에게 지식이 중요하듯 검사에게도 강인한 육체가 필수적이었다.
‘신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화의 폭은 극도로 좁다. 나에게는 이미 스피릿 존이 있으니 상충하는 개념보다는 검술 쪽으로 해법을 찾는 게 빠를 거야.’
스피릿 존을 베이스로 깔아 두고 몇 가지 활생의 검술을 익히는 전략이었다.
“좋아.”
시로네는 검술 교본 초급을 펼쳤다.
뜬금없이 검술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보니 집중력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
“으아아아! 으아아아!”
대연무장에 흙먼지가 일었다. 리안의 두 다리가 일으키는 토연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공기가 들어오지 않아 위장의 것들이 역류했다.
“우엑! 우엑!”
점심에 먹었던 것들이 넘어왔으나 리안은 토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달렸다.
그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두 다리뿐이었다.
“백 바퀴! 통과!”
검술 사범 카이트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오늘따라 달라진 리안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기록 단축이다! 그런데 웬일이냐, 네가 순순히 훈련을 다 받고?”
“제기랄! 이딴 게 무슨 훈련이라고!”
“뭐, 인마?”
카이트가 황당하게 눈을 치켜떴다.
오랜만에 칭찬 좀 해 주려고 했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다짜고짜 투정질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투정은 달랐다.
“지금도 두 다리로 서 있잖아요! 스승님, 더 센 거 없어요?”
“호오?”
카이트는 꽤나 놀랐다.
‘이 녀석이 불타오르는 건 오랜만인데?’
2년 전 오젠트 라이의 천재성 앞에 무릎을 꿇은 이후로 처음일 터였다.
“너, 무슨 일이 있었구나?”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리안이 땀을 쏟아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없어요, 그딴 거.”
카이트는 믿지 않았다.
무섭도록 전방을 응시하는 제자의 눈에는 분명 누군가의 환영이 아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라이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리안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가문의 차남뿐이었다.
그가 또다시 뭔가를 해낸 것일까? 하지만 무엇을? 이미 라이는 스키마까지 연 상태가 아닌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제자는 라이가 아닌 리안이므로. 그리고 지금 그 제자가 자신을 마음껏 요리하라고 목을 내밀고 있으므로.
“좋다! 오늘 한번 제대로 죽어 보자! 진짜 죽어도 난 책임 못 진다!”
“얼마든지요!”
리안은 장검보다 2배나 무거운 철봉을 내리쳤다.
횟수에 제한은 없다.
통찰력으로 스키마를 깨닫지 못한다면 육체를 극한으로 몰아넣는 방법뿐이었다.
“타하! 타하! 타하!”
카이트는 수직 베기를 반복하는 제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이 굳었다.
마침내 깨달은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갔다.
“이 미친놈아! 그만해! 그러다가 근육이 터져 버린다!”
“아직 안 터졌잖아요!”
카이트는 걸음을 멈췄다.
이를 악물고 봉을 휘두르는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근육이 터지지 않는 거야! 왜 팔이 끊어지지 않는 거냐고! 더 할 수 있어! 여기가 끝이 아니야!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카이트의 눈에서도 눈물이 차올랐다.
제자만큼이나 분한 스승이었다.
어째서 안 되는 거지? 한계의 한계까지 육체를 몰아세우는데, 왜 스키마를 열지 못하는 거지?
카이트는 굵은 팔로 눈물을 닦아 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스승이 의심을 해 버리면 리안은 어쩌라는 말인가.
카이트는 휘둘리는 리안의 철봉을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이번만큼은 리안도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동작을 멈췄다.
다름 아닌 스승의 손이었다.
“리안,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은 그만하자꾸나.”
따스한 목소리에 리안의 광기가 사라졌다. 팔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곤봉이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카이트는 리안의 어깨에 얼음 수건을 올려 주었다. 뼈가 상하지 않은 걸 보니 타고난 강골이긴 강골이었다.
연무장의 언덕에 앉은 리안은 맹한 표정으로 먼 산을 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팔 아파 죽겠다는 생각요.”
카이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리안, 난 보고서에 네가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쳇. 누가 뭐래요?”
“하지만 나는 네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빨리 이루는 것만이 재능은 아니야. 이룰 수 없는 것에 기를 쓰고 도전하는 것, 그 또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위로하실 필요 없어요. 말이 좋을 뿐이지, 까놓고 말해서 재능이 없기 때문에 죽어라 노력하는 거잖아요.”
“과연 그럴까? 천재는 자신이 천재라는 걸 알고 있단다. 따라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명확히 깨닫고 있지. 너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
“글쎄요. 할 수 없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래. 그래서 너는 천재가 아닌 것이다.”
리안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카이트를 돌아보았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팔 아파 죽겠는데 속까지 쓰리게 만드는 스승이었다.
“그만하세요.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제자를 바라보며 카이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리안, 천재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바로 노력이란다. 물른 천재도 열심히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노력은 아니야. 그들에게도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겠지만, 의심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니까. 따라서 노력이라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강력한 무기인 거야. 재능이 없어서 노력을 한다고? 천만에, 세상에서 노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노력을 하는 사람밖에 없다.”
카이트는 리안의 어깨를 붙잡고 힘을 주었다.
“너에게는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려는 의지가 있어. 그 의지는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거야. 쉽게 표현하자면 천재의 천적인 셈이지.”
천재의 천적.
리안은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못난 제자를 위로하는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래,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원래부터 없었다면 악착같이 얻어 내면 된다.
‘반드시 이긴다.’
남은 한 달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각오였다.
***
시로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스키마의 개념을 안 순간 미련 없이 검술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그 일환이었다.
선택과 집중.
재능은 이 두 가지를 통해 목적지로 향하는 최단거리를 효율적으로 설계한다.
시로네는 잡다한 기술은 전부 제쳐 두고 검술의 기초만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훈련한 것은 여덟 방향 베기와 여덟 방향 막기, 단 두 가지뿐이었다.
‘이게 나의 최선이야.’
나름의 성과에 만족한 시로네는 수련을 끝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익힌 것이 무엇인지를 함축하는 질문을 던졌다.
“검술이란 무엇인가?”
생명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 역학의 총체, 생사를 가른다는 점에서 고도의 심리학이기도 했다.
시로네는 전방으로 검을 겨누었다.
아마도 적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움직일 테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나를 베려고 들어오는 검만이 진짜. 따라서 내가 막아야 할 곳은 여덟 군데.’
그는 상상으로 대응했다.
여덟 방위를 제압한 8개의 칼날이, 한 합이 더 치러지자 수백 개로 퍼졌다.
“큭.”
모든 검로를 계산할 수는 없다.
‘숫자를 세는 게 아니야. 통째로 느끼는 거다.’
나무에 집착하면 숲을 보지 못하듯이, 가능성을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통찰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다양한 패턴들이 프랙털처럼 뻗어 나갈수록 자꾸만 특정 공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해내지 못해도 괜찮아. 일단 관조하자. 오류를 수정하는 것뿐이니까.’
긴장감에서 벗어난 시로네는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생각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전체가 보이고 온갖 가능성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어?’
시로네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