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03
대법관이 대지성전을 돌아다니자 태성이 시선으로 그를 뒤쫓았다.
“세계의 본질에 대해 끝없이 탐구했지. 끝은 어디인지, 시작은 어디인지.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우리가 내린 결론은…….”
걸음을 멈춘 대법관이 태성을 돌아보았다.
“이 세계는 전기다.”
“…….”
사실이지만, 태성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전기를 사용하고 있지. 그 반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설은…….”
대법관의 손가락이 올라갔다.
“어딘가에서 전기가 공급되었고 우주가 탄생했다. 마치 우리가 기계에 전력을 공급하듯이.”
대법관이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무. 존재도, 존재할 이유조차 없었던 상태지.”
꺼짐 상태라고 한다.
“우리는 고민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왜 태어났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끝없이 파고들어 갔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 아카식 레코드. 우주적 데이터베이스, 앙케 라의 존재였다.”
그 정의에 의하면.
“우주를 꿈꾸는 앙케 라는 자신을 비판할 수 없다. 꿈을 깨닫는 순간 꿈이 아니기 때문. 따라서 그는 자신이 유일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의심을 품을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의심하기 시작했죠.”
“그렇다. 아카식 레코드를 깨고 광자계를 이탈한 가이아인의 결과물이 그를 모순에 빠트렸지.”
앙케 라의 유일성에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어째서 앙케 라는 나네에게 흡수되었는가?”
질문을 던진 대법관이 직접 답했다.
“인간에게 가이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 가이아가 이탈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끝인 이곳이 인간에게는 끝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혹은 인간이 만든 세계. 사실 인간이 신이고, 그 개념을 이 세계에 차용했다.”
인간을 제외한 모두에게 아픈 가정이었다.
“테라포스는 받아들였다. 의외로 쉬운 일이었어. 오히려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 모든 게 무의미했던 우리에게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이 또한 이미 설계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테라포스는 존재의 이유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우주의 심판자로서 세계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고장 소프트 시스템 같은 것이지.”
태성이 지상의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방주를 보내 인간을 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군요.”
이제 구스타프 제국에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멸종한 상태였다.
“인간에게는 독특한 코드가 있어. 물론 실시간으로 변형되지만, 테라포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우주에서 최고니까. 마그네틱 실드에 갇혀 있는 한 무사할 것이다.”
태성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가이는? 어째서 실드의 보호를 받지 못한 거죠. 그가 이데아에 도달했기 때문인가요?”
대법관이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는 독특한 코드가 있다고 그랬지. 그것은 임시 코드다. 하지만 이데아는 달라. 절대로 변하지 않는 완벽한 사용자 코드. 현재 생존자 중에 그 코드를 가진 자는 리안이 유일하지.”
리안은 마그네틱 실드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이는?”
“마그네틱 실드의 발동 조건은 특정 코드가 발생시키는 내면의 소리다. 가이는…….”
대법관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원하지 않았어.”
“원하지 않았다는 건…….”
“글쎄.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건 힘든 일이지. 다만 그는 다른 코드와 달리 생에 대한 욕망이 더 이상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야.”
***
“화가…… 풀렸냐고?”
가이의 말을 곱씹던 시로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럴 리가 있어? 당신이 인간들에게 한 짓을 생각해 봐!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성음은 영원히 지옥에서 헤매야 한다고! 왜! 왜 거짓말을 한 거야!”
가이가 죽었음에도 시옥은 나타나지 않았다.
“너랑 싸우기 전에 리안을 만났다.”
시로네의 어깨가 움찔했다.
만약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시로네는 리안의 형을 죽인 것이다.
“철없이 굴 때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정말로 멋지게 성장했더군. 나보다 더 강해져서 말이야.”
“리안은, 당신 같은 인간하고 달라.”
시로네는 애써 리안과 가이를 분리시키려고 했다.
“하하.”
가이는 웃음으로 인정했다.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의 눈빛에 흐뭇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리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옳고 그름 따위도 중요하지 않았어.”
가이가 동의를 구하듯 두 팔을 벌렸다.
“솔직히 그렇지 않냐? 결국 이긴 자가 옳은 것이니까. 정말로 강해지면, 도덕적 양심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지.”
마치 유언 같아서, 시로네는 말을 끊을 수 없었다.
“책임을 지며 살아가라고…….”
리안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어. 그 막내 놈의 어깨에 짊어진 것이 눈에 보이는 순간, 진절머리가 나더라고.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지?”
그래서 도망친 것이지만, 시로네를 통해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강한 건 리안이다.”
가장 많은 걸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
“친구라고 그랬지. 앞으로도 동생을 잘 부탁한다.”
“……뭐 하는 거야?”
시로네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갑자기 가족인 척하지 마! 내가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 당신은 살인마야!”
꿈이어야 한다.
“죽은 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희생당한 자들의 목숨은 어떡하라고! 당신이 죽으면……!”
가이가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리안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가이가 해맑게 웃었다.
“설명할 필요 없어. 그 멍청한 놈에게 다 떠넘겨. 알아서 책임지라고 해.”
“그게 형으로서 할 소리야!”
“강한 놈이잖아.”
가이가 눈을 감았다.
“그게 기사지.”
리안처럼 되고 싶었다.
가이와 연결된 빛이 조금씩 흐려지자, 시로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다려! 이대로 가면……!”
마침내 빛이 사라지고, 가이의 육체가 흐릿하게 변하더니 어둠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영원한 소멸.
“안 돼에에에에!”
시로네가 황급히 손을 내밀었으나 그의 감각에는 어떤 신호도 닿지 않았다.
쿠르르르르.
하늘을 가득 채운 검은 구름이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투명하게 변했다.
“비, 비가…….”
실드에 피해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자 맑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함선이 보였다.
“시로네.”
리안은 곧바로 돔을 향해 대직도를 휘둘렀다.
엄청난 굉음이 터졌으나 돔은 깨지지 않았고, 충격파가 좁은 공간에 휘몰아쳤다.
“크으으으으!”
쉽게 파괴시킬 수 없는 이유는, 이데아의 경지 또한 일종의 전기신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아아아!”
리안은 육체가 파괴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연거푸 검을 휘둘러 댔다.
‘시로네! 시로네!’
어떤 이유로 세상을 파괴하는 폭우가 쏟아졌는지, 리안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대멸겁에 준하는 현상이 벌어졌을 때는 언제나 시로네가 있었다.
‘기다려!’
우우우우우웅!
대직도가 진동을 일으키며 돔을 강타하자, 마침내 엄청난 폭발과 함께 마그네틱 실드가 깨졌다.
“헥사 프로그램이 종료되었다.”
테라포스 종족의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대법관은 분명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지상을 살피던 태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로네가…….”
화면에 비친 헥사의 입자가 조밀하게 모여들더니 시로네의 육체로 복구되고 있었다.
“불가능해. 이미 신호로 변한 상태에서 다시 육신을 찾을 수는 없다.”
테라포스의 지론에 의하면, 생성 코드가 없다.
“아니.”
대법관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런가. 이데아라는 것은…….”
“시로네가 돌아왔어요!”
태성이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으나 대법관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했다.
“아직 끝이 아닌가?”
“방주는?”
“거두어 간다. 선별도 취소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득인지 독인지는 모르겠군.”
대법관의 말이 사뭇 의미심장했으나, 태성은 화면으로 몸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처참한 고통이 기다리는 시로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어?”
정신을 차린 시로네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일이 꿈의 기억처럼 지나갔다.
“상처…….”
가슴을 살펴보자 가이의 검에 관통됐던 자리가 감쪽같이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이질적인 것은, 한계를 모르고 커져 가던 분노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여긴 어디야?”
마치 전혀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시로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뿐이었다.
“전부 사라졌어.”
가이가 말했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고.
“아니야.”
야훼의 분노가 세상에 어떤 재앙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가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 나는…….”
힘없이 무릎을 꿇은 시로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가이의 시체를 찾아 헤맸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는데…….”
꿈이 아니었다고?
“내가 다 죽였어. 사람들, 리안의 형, 모든 생명체…… 동물, 식물…….”
말 그대로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시로네!”
리안의 목소리에 시로네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리안…….”
순식간에 달려온 리안이 시로네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살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리안, 너…… 무사했구나.”
“사람들은 무사해. 뭔지 모르는 실드가 펼쳐졌어. 아마도 저 비행물체일 거야.”
시로네가 멀어지는 함선을 바라보는 동안, 리안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빛의 비가 내렸다고…….”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만든 현상이기에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했어.’
리안이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어쨌든 우리는 무사하잖아. 마족들도 전멸했고. 일단 돌아가자. 형을 찾아야겠어.”
시로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마 형도 실드에 보호를 받았을 거야. 쳇, 그러게 같이 가자고 할 때 들었어야지.”
“리안…….”
시로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리안은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가이를 찾았다.
“벌써 도망친 건가? 부상이라도 당한 건…….”
“리안!”
형을 걱정하는 리안을 지켜볼 수 없는 시로네가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왜 그래? 얼굴이 창백하잖아.”
시로네는 입을 뻐끔거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상태에서 떠오른 것은, 자기 파괴적인 언어였다.
“내가 죽였어.”
“응?”
“내가 가이를 죽였다고.”
리안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모르겠어.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니, 꿈이 아니야. 가이가 날 살려 준 것 같아. 그래서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