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10
‘나쁜 자식.’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루키는 자신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로시가 얼마나 고대했던 만남인데…….’
그 마음을 이해하는 사비나가 도로시의 옆에 나란히 드러누워 소리쳤다.
“그래! 죽여라, 죽여! 우릴 죽여어어어!”
아로미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연행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때, 이루키가 돌아서며 말했다.
“됐어요. 오늘은 물러가죠.”
“하지만…….”
“아르카 산맥을 오랫동안 조사한 팀이에요. 실력이 떨어지지는 않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벌써부터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아요.”
아로미의 업무 철학에는 어긋나지만, 이루키에 대한 예우가 우선이었다.
그녀가 카니스에게 말했다.
“총군사님의 지시에 따라 하루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좋은 판단을 내리길 바랄게요.”
성전이 마차를 이끌고 멀어지자 아린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일렀다.
“떠났어. 그만 일어나.”
도로시가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작업은 못 하겠어. 일단 돌아가서 대책을 세우자. 이루키의 제안도 검토하고.”
아무리 화가 나도 할 일은 하는 게 마법사였다.
“지내실 곳이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숙박을 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이루키가 머무는 곳은 채굴장에서 300미터 떨어진 임시 막사였다.
“괜찮아요. 발굴 팀은 어때요?”
아로미가 바깥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가건물에 처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 넘긴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루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받아들일 겁니다. 저 때문에 화가 난 거지,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똑똑한 애들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로미가 애써 웃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총군사님의 건강이 걱정이죠.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루 정도는 쉬세요.”
쉬고 싶어도 지옥의 군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든 시간.
의자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던 이루키가 발소리를 듣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막사의 입구에, 도로시가 기사들에게 팔을 붙잡힌 상태로 서 있었다.
작업 때를 벗자 예전의 앳된 외모가 드러났지만, 차림새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총군사님. 이 여자가 다짜고짜…….”
“괜찮아요.”
기사들이 경례를 하고 나가자 도로시가 붙잡혔던 팔을 주무르며 다가왔다.
“대단하네. 저런 사람들이 네 말에 껌벅 죽고.”
“무슨 일이야?”
도로시는 대답이 없었다.
“채굴권에 대한 거라면 내 입장은 변하지 않아. 내일부터 우리가 계약한 군수 업체에서…….”
“그건 됐어.”
도로시가 말을 끊었다.
“일은 그렇다 치고, 우리 개인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지 않아?”
도로시가 평소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너, 술 마셨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대체 왜 그런 거야?”
“뭘?”
도로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 키스했었지.”
“네가 했잖아.”
“어쨌든! 그리고 사귀었잖아.”
13분 만에 헤어지기는 했지만.
“왜 그랬어?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던 거야? 아니면 그냥 호기심? 둘 중에 어떤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나에게는 중요해.”
첫 남자, 첫 키스.
그저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던 이루키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만하자. 의미 없는 일이야.”
“의미가 없다고? 왜? 이제 높은 자리에 오르니 유치해? 아니면 내가 네 발목이라도 잡을까 봐…….”
“나는 곧 죽어.”
도로시의 말이 뚝 끊어졌다.
“……뭐?”
“내 두뇌가 좀 뛰어나잖아. 수명을 깎아먹을 정도로. 그런데 최근에 기능이 더 올라갔거든.”
농담이라면 악질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에 머리 좀 썼다고 죽는 게 어디 있어?”
“위험한 수준은 아니야. 어쩌면 꽤나 버틸 수도. 하지만 난 성전에 필요한 핵심 두뇌고, 멈출 생각도 없어. 이대로 오버 드라이브를 계속하면 아마도…….”
이루키가 펑 소리를 내며 폭발하는 시늉을 했다.
“아니야.”
도로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소중한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화를 냈지만, 사실은 너무나 그리웠던 친구다.
“하하! 겁먹지 마. 아직은 버틸 만하다니까?”
아직은 그렇다.
“솔직히 말하니까 편하긴 하네. 나는 약해질 수 없어. 워낙 많은 생명을 책임지고 있어서. 아, 네가 만든 히커리 19호 멋있더라. 많이 개량했던데?”
도로시가 울상을 지었다.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하냐? 도대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이루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좀 도와주라. 네가 팀장이니까 팀원들을 설득시켜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시가 이루키의 멱살을 붙잡아 침대로 던졌다.
“일 얘기 하러 온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나는 무조건 대답을 들어야겠어.”
신발을 벗고 침대로 올라온 도로시가 이루키의 얼굴을 다리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청바지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것도 모르면 남자도 아니고.”
물론 알고 있다.
“미쳤군.”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나 도로시야.”
물론 그것도 알고 있다.
“말했잖아. 나는 멈출 생각이 없어. 너랑 뭔가를 하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을 수도 있다고.”
도로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일 죽는다고 밥 안 먹을 거야?”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루키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좌 허벅지. 우 허벅지.’
도망칠 곳은 없었기에.
‘에라, 직진이다.’
이루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음 날 아침.
도둑고양이처럼 막사를 빠져나온 도로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건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팀원들이 모여 성전이 넘긴 법정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사비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아침에 방에 없던데?”
“어? 아, 잠깐 채굴장 좀 확인하느라고.”
시치미를 떼고 거실로 들어가자 카니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쳇,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쫓겨나는 건 말이 안 돼.”
역시나 그런 안건이었다.
“저기, 있잖아.”
도로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우리가 한발 물러서는 건 어때? 솔직히 이루키도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야. 유적도 중요하지만, 일단 인류가 살아남고 봐야 하지 않겠어?”
하룻밤 사이에 바뀐 태도에 팀원들이 눈을 깜박이는 가운데, 아린이 말했다.
“실은 우리도 그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어. 어쨌든 성전을 상대로 법정 싸움은 승산이 없으니까.”
턱을 괸 사비나가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일단 검토했는데, 확실히 나쁜 조건은 아니야. 차기 유적지 발굴권도 우리가 선점할 수 있고, 포기 조건으로 내건 위약금도 충분하고.”
도로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그럼 내가 실장을 만날까? 어쩌면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서류철이 탁 하고 닫혔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 없음.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
“응? 뭘 짚고 넘어가?”
사비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도로시를 가리켰다.
“너, 걔랑 잤지?”
“호오?”
클로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돌아보는 가운데 도로시가 눈을 굴렸다.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모든 쟁 (1)
발굴 팀 전원의 시선이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도로시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래, 그렇게 됐어.”
술자리에서 학창 시절을 회상할 때면 도로시는 늘 이루키를 언급하곤 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으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아.”
카니스가 말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으로 일이 뒤집어진 것이라면, 난 적어도 이루키에게 사과는 들어야겠어.”
사비나가 입술을 뒤틀었다.
“그렇게 집요하게 굴 필요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가 먼저 풀자.”
“내가 팀에 합류한 이유는 돈이 아니라 유적 때문이야. 이런 식으로는 보상이 안 돼.”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다른 법이기에 사비나도 말릴 수 없었다.
“카니스, 그냥 우리가 물러서자.”
아린이 말했다.
“어쨌든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이잖아. 이루키도 생각할 거리가 많을 거야.”
카니스는 서운함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갑자기 왜 그래? 감정을 떠나서, 일의 순서를 따졌을 때도 그게 맞는 거잖아.”
아린이 도로시를 돌아보았다.
“너는 알고 있지? 이루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두의 시선이 도로시에게 주목되는 가운데 그녀의 입술이 비죽 내려갔다.
“이루키가…… 죽을지도 모른대.”
클로저가 미간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이대로 계속 뇌에 과부화가 걸리면 뇌사에 이를 수도 있다고…….”
카니스가 말했다.
“오버 드라이브군.”
마법학교 시절 이루키의 눈에서 번쩍이던 푸른 전기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루키는 서번트 중에서도 독특하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했었어. 만약 사실이라면 더 이상 전장에 있어서는 안 돼. 휴식이 필요하다고.”
클로저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녀석이 그럴 성격이냐? 게다가 성전을 지휘하는 총군사라잖아. 과부화는 걸릴 수밖에 없어.”
사비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그걸 알면서도 그 녀석이랑 만나고 싶다는 거야?”
도로시가 고개를 숙였다.
“팀장으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루키를 도와주면 안 될까? 내가 부탁할게.”
“카니스.”
아린이 돌아봤을 때, 카니스는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놈.”
세상이 뭐라고 자신의 뇌를 파괴하면서까지 인류를 위해 싸운단 말인가?
“알았어.”
카니스가 두 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그 녀석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자고. 우리가 그냥 여기를 떠나면 되는 거지?”
가건물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너희들이 떠나면 곤란하지.”
이루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루키…….”
그들이 보내는 동정의 눈빛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던 이루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