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20
“좋은 향기와 안락한 감촉. 저같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이지요.”
세리엘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이 남자도…….’
세계 각지에서 수집되고 있는 변이자 리포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아, 나는 부자다. 여태까지 꿈을 꾼 것이구나.”
남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꿈이었던 거죠. 그래요, 저는 가난한 사람이에요.”
“그 꿈에서 무엇을 봤죠?”
여전히 회복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지만, 남자의 생명력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뿌연 하늘. 유리창이었을 수도. 그 하늘 너머에서, 무언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그게 뭐였죠?”
“모르죠. 잘 안 보여요. 작고, 회색빛의 무언가…….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이 열렸는데…….”
그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그게 꿈이었다니. 난 부자였는데. 아니, 이게 꿈일 거야. 선생님,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울상을 지은 남자가 눈물을 쏟아 내며 절규하자 세리엘이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요! 이미 상처는 회복됐어요! 당신은 살 수 있다고요!”
“아니! 다 가짜야! 전부 다……! 허억!”
남자의 폐가 급격히 부풀더니 동공이 위로 말려들어 가며 숨이 끊어졌다.
세리엘이 소생술을 실시했으나 남자의 체온은 빠른 속도로 식어 가고 있었다.
“됐어, 과장. 그만해. 리포트 작성해.”
세리엘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변이자 케이스 B-38. 기생체 아르고네스 적출 후 생체 회복 완료했으나 사망. 사인은…….”
천천히 얼굴을 쳐든 세리엘의 눈이 번뜩 빛났다.
“자살……로 추정.”
의료진이 빠르게 기록하는 가운데, 세리엘이 침대에서 내려오며 지시했다.
“국제 협약에 의해 변이체의 시신은 세계보건기구가 수습합니다. 은밀하게 진행하세요. 아직 말이 나와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성전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는 것은 피쇼의 장례식이 끝난 이후가 될 것이다.
세리엘이 문을 나서자, 오두막 밖에서 테노스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고생했다.”
불이 붙은 담배를 넘겨주자 세리엘이 그것을 받아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왜 죽는 것일까요?”
테노스는 말이 없었다.
“분명 회복은 완벽했습니다. 상처도 없고, 생체 기능도, 신진대사도, 어긋난 게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죽을 수가 있죠?”
“글쎄. 허무해서?”
“허무하다고 사람이 그냥 죽을 수 있어요?”
“죽는다고 말하면 안 되지.”
테노스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 그런 경우 있잖아? 인생 살아 봤자 남는 거 없다는 기분이 들 때. 좋은 추억도 안 좋은 기억도, 지나고 나면 한낱 뇌의 신호일 뿐인 거야.”
담배를 끼운 손가락이 정면을 가리켰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산다고 하지만, 결국 남는 건 과거밖에 없어. 고작 그 기억 하나 머리에 담아 두자고 치열하게 사는 건 비효율적이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몰랐는데요.”
테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적인 얘기를 하는 거야. 현실을 산다는 것은 감각을 산다는 것. 그런데 감각이란 일종의 충동이거든. 그걸 삶이라 부를 수 있나? 그리고 인지가 되는 순간은 이미 과거다.”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졌다.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에도 인간은 없어. 이 세계에 실재하는 건 오직 공空이다.”
“나네의 말이군요.”
테노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부처의 흉내를 내 봤지만, 사실 모르겠어. 인간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신호에 불과하다면,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과연 자살일까? 어쩌면 이곳에 실체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도 몰라.”
“해탈이라 부르고 싶으세요? 임사 체험은 개인적인 경험이에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요.”
“……그러니까 네가 알아내야지.”
테노스가 담배를 버렸다.
“피쇼의 선택은 옳았어. 동창 중에 상아탑 오대성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성전조차 상아탑을 배신하면서까지 기밀을 열람하지는 못할 테니까. 다녀와. 가서 피쇼가 무엇을 알아냈는지, 정확히 밝혀내.”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차로는 늦어. 공간 이동을 사용해. 지부에서 검역하고 바로 출발해도 좋다.”
“아르고네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인원은 상부에서 제시한 동선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데요.”
“내가 책임질 거야. 어차피 내일이면 지침도 풀려. 이곳은 신경 쓰지 말고 크레아스 쪽을 전담해.”
세리엘 또한 바라던 바였기에 고개를 숙인 뒤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굉음이 창공을 갈랐다.
***
피쇼의 장례식 날.
크레아스 시립 묘지는 아침부터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로 바글거렸다.
“사람들 정말 많네.”
마법학교에 오래 몸담았던 만큼, 알페아스 마법학교 팻말 쪽에 상당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피쇼와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인물도 보였다.
도로시가 말했다.
“확실히 그냥 장례식이 아니야. 우리도 방심하지 말고 동태를 주시하자.”
아린이 물었다.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비나가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지 말고 말 좀 해 봐. 너는 애인한테 들어서 다 알고 있을 거 아냐? 우리끼리 이러기야?”
애인이란 말에 도로시가 얼굴을 붉혔다.
“나, 나도 몰라. 이루키가 아무 말도 안 해 줬단 말이야. 그냥 위험할 수도 있다고만 했어.”
클로저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마법학교의 교장 알페아스와 교감 올리비아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도로시를 포함한 발굴 팀이 인사하자 알페아스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고맙다.”
“당연히 와야죠.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요. 무슨 일이 있나요?”
“피쇼의 유언장 때문이지.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조금 전에는 시위까지 있었단다.”
“네? 시위?”
도로시가 고개를 돌리자, 타국에서 온 관리들이 성전의 관계자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건 불합리합니다. 미엘 왕국에서 성전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아십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언장의 공개 권한은 초괴생물 연구소에도 없고, 성전에도 없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야 뭐야……!”
관리가 다시 분을 참지 못하고 사달을 일으키려는 순간, 기사가 입구를 가리켰다.
“대사님, 저기.”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수백 명의 인파가 동시에 침묵을 지켰다.
“상아탑의 오대성.”
피쇼가 유일하게 열람권을 부여한 사람, 시로네가 에이미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생물 프로그램 (2)
‘드디어 왔는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자.
시위하던 관리들도, 막상 시로네가 도착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좌중의 시선이 한곳에 쏠린 가운데 시로네가 알페아스 마법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피쇼는 졸업반에 오래 머물렀기에 시로네가 알지 못하는 얼굴들도 보였다.
세리엘이 에이미에게 달려왔다.
“에이미!”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에이미도 세리엘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담배 냄새가 났다.
“에이미! 이 앙큼한 계집애! 어떻게 연락 한 통 없이 살 수가 있어? 나 실망이야!”
“미안해. 사정이 있었어.”
전장에 파견되기 전까지는 훈련소에서 몇 번이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녀였다.
하지만 세리엘이라고 편하게 지낸 것은 아닌지, 예전보다 많이 야윈 얼굴이었다.
“힘들지?”
“헤헤, 내가 힘든 일이 뭐가 있겠어? 전쟁터에서 싸우는 네가 더 힘들지. 그나저나…….”
시로네와 에이미를 번갈아 바라보던 세리엘이 웃음살을 볼록이며 속삭였다.
“시로네와 같이 들어온다는 건, 어젯밤에도 함께 있었다는 얘기? 요 앙큼한 게.”
“아니야! 시로네가 데리러 왔어. 마야도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이미 출발해서…….”
동창들의 뒤편에서 마야가 손을 흔들었다.
‘시로네.’
이어서 시로네와 눈을 마주쳤으나, 전에 비해 달라진 감정은 없는 듯했다.
‘하긴, 그렇지.’
마야는 시로네가 호텔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록 아무 일도 없기는 했지만, 시로네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다면 눈빛으로 나타났을 터.
‘괜찮아. 내가 사랑하니까. 잊어야 되는 고통보다 더 아프지는 않으니까.’
마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타국의 관리들이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동창들은 시로네를 허물없이 대했다.
“시로네, 너 완전 유명해졌던데?”
현재 크레아스 콜로세움 챔피언인 스크리머가 시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스크리머! 정말 오랜만이다!”
학창 시절에는 그 호전적인 성향에 혀를 내둘렀으나, 이제는 정숙한 격투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동창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몰려들어 시로네에게 인사를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시로네! 나 기억나? 너 고급반에 있을 때 나랑 호수 정원에서 부딪혔잖아. 그때 네가 내 책도 들어 주고 했었는데.”
“아, 네…….”
그랬던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모른 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 반가웠고, 그들이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뭐야, 저게? 무슨 동창회야?”
타국의 관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아탑의 오대성이라면 일국의 왕조차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직위가 아니던가.
시로네의 머리를 두드리며 놀리거나 옷을 끌어당기는 광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두 그를 좋아하는군요. 어떤 학교생활을 했는지 짐작이 가네요.”
존경을 드러내는 관리도 있었으나, 대부분 나라의 명운을 걸고 참석한 자들이었다.
“흥! 헛소리! 지금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오. 안 그렇습니까?”
남부 대륙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뭔가 있어.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마족이 세상을 침범하고 있지만, 이런 위기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인간의 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하고, 이제는 전황도 아주 암울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세계대전이 지나가면 힘의 구도는 재편성된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가운데, 미엘 왕국의 관리가 시로네에게 다가갔다.
“상아탑의 별이시여.”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사라졌다.
“알고 계시겠지만, 피쇼의 유언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네, 들었어요. 유언장은 어디 있죠?”
초괴생물 연구소의 직원이 말했다.
“유언장이 아니라 영상입니다. 피쇼가 당신을 위해 녹화한 것입니다. 현재 피쇼를 제외한 누구도 이 영상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영상이라고…….”
미엘 왕국의 관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모든 왕국이 합심하여 마족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피쇼의 유언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정보를 공유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베니바르 왕국의 관리가 나섰다.
“모두에게 공개할 수 없다면, 최소한 대표를 뽑아 주십시오. 첨언하자면 베니바르 왕국은 성전에 가장 많은 군량미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보를 독점하려는 기미를 깨달은 관리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소리쳤다.
“베니바르에 양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왕국이야말로 발키리에 가장 많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헛소리!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관리들이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시로네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자 시로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세요.”
성량은 작았으나, 관리들은 무언가 섬뜩한 느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해맑게 웃던 모습은 사라지고, 마법사의 기운을 뿜어내는 시로네가 서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죠.”
관리들이 귀를 기울였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피쇼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시로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떠나간 제 친구를 추모하고 싶습니다. 혹시 그런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가운 눈빛이 관리들을 꿰뚫었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윽!”
표현할 방도는 없지만, 시로네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박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