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22
“알고 있어. 엄청 재미없었거든.”
스피릿 존이 펼쳐졌다.
시로네의 정신이 곧 최강의 방호벽이었기에 이루키도 편하게 물었다.
“뭔데?”
이루키의 옆자리로 옮긴 시로네가 말했다.
“이 세계의 진실.”
지금으로부터 3시간 전.
영상 기록 장치를 설치한 소장이 건물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다 됐습니다. 정말 여기로 괜찮습니까?”
“네, 충분해요.”
소장이 나가자 시로네는 마테리얼의 능력으로 새로운 벽을 만들었다.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 밀실이었다.
‘피쇼.’
작은 의자를 만든 다음 영상 기록 장치를 작동시키자 녹화 영상이 켜졌다.
“시로네.”
피쇼가 그곳에 있었다.
물론 시로네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미 변이가 상당수 진행되어, 얼굴의 반쪽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시간이 없었어. 하나의 문제라도 더 해결해야 하니까. 너는 이해하지?”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이야기할게. 우선 영상의 열람권을 너에게 준 이유, 그것은 네가 오대성이어서도, 내 동창이어서도 아니야. 네가 헥사이기 때문이다.”
피쇼의 왼쪽 부분이 꿈틀거렸다.
“인류는 많은 것을 파헤쳤지. 세상이 어떤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지도 대충은 알아. 하지만 여전히 밝힐 수 없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사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일단 무언가가 존재해 버리면, 원인이 있다는 뜻이니까.”
누가 우주를 만들었는가.
“외계 생명체 아르고네스. 내 몸을 잠식하고 있는 기생체. 이것이 나에게 말하고 있다.”
피쇼가 꿈틀거리는 부분을 가리켰다.
“애초부터 우주 같은 건 없어. 그렇기에 우리도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어떤 곳에 무언가가 존재했던 사건 따위는 일어난 적이 없다는 거야. 시로네, 그냥 무無다.”
“…….”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존재’라는 건 없어.”
“그렇다면 왜……?”
화면 속의 피쇼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있는가? 왜 우주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가? 그건 無의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야.”
시로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단지 무언가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대체 누가? 그 착각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거다, 시로네.”
피쇼가 힘겹게 손을 들었다.
“무無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유有의 개념을 빌려야 되지.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야. 시간, 공간, 착각들. 책상 위의 연필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책상 위의 자리는 무無가 되는가? 절대 아니지. 무언가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생각조차 유有인 것. 인간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한계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끝이야.”
시로네는 무無를 상상했다.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결합에 의해 완벽한 무無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무가 아니다.
‘진실로 상상하려면…….’
상상을 하는 자신조차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상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무한무無限無라고 부른다.”
피쇼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접하지도 못하는 개념이지만, 그래도 우린 인간이니까 이름을 지어 봤어. 어쨌거나 시로네, 내 말을 믿는다면 너도 이제 알 수 있을 거야.”
피쇼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것도 없고, 착각만이 있다. 모순이 아니야. 이 순간 네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조차 착각이니까. 그냥 없는 거야. 없다는 걸 알아야 돼.”
피쇼의 어깨가 더욱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 착각 속에 모든 게 있다.”
인간이 무를 떠올릴 수 없듯이, 모든 게 있다는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다. 무無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선과 악을, 공과 애를, 수많은 것들을 분리시키지. 사실은 아무것도 없어. 그럼에도 나네가 아닌 너에게 이 영상을 전달하는 이유는…….”
피쇼의 어깨가 퍽 하고 폭발했다.
“착각은 자유라잖냐.”
시로네는 그의 씁쓸한 미소를 눈에 담았다.
“아르고네스에 대한 보고서는 초괴생물 연구소의 리포트를 보면 될 거야. 문제는…… 이 녀석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거지. 물론 인간의 기준에서.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비밀에 접근하는 생물을 말소시키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만약 영상이 공표된다면 아르고네스는 전 인류를 말소시킬 터였다.
“시간이 없군. 약물로 억제하고 있지만 조만간 깨어날 거야. 시로네, 네가 선택해야 한다. 전 인류가 싸울 것인지, 너 혼자 싸울 것인지.”
피쇼의 변이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의 고개가 부러질 듯 옆으로 꺾였다.
‘제길……!’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비통했다.
“아르고네스는 모든 생물의 원천이다. 하지만 너는 달라. 놈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헥사이기 때문이다.
“무한무든, 무한유든 상관없어. 설령 착각이라도, 내가 있었던 세계다. 그러니…….”
“피쇼!”
피쇼의 눈이 위로 말려들자 시로네가 영상으로 달려갔다.
“너에게 확실히…… 전했다. 시로네…….”
마침내 피쇼의 목이 완전히 꺾이고, 변이된 세포들이 축 하고 늘어졌다.
“흐윽! 흐으으윽!”
시로네는 영상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안 돼. 안 돼…….”
관 속에 시체가 없었던 이유.
숙주가 사망하자 세포들이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죽처럼 퍼지고 있었다.
“하아.”
힘없이 자리로 돌아간 시로네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그게 중요하지?’
피쇼의 전언은 세계의 진실을 밝히고 있지만,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는 듯했다.
“어째서 아르고네스는 이 비밀에 접근한 인간을 말소시키려는 거지?”
바깥 세계로 갈 수 있는 열쇠.
‘무한. 무한의 마법사.’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떠올릴 수 없다고?
제9감에 도달한 이후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던 시로네에게, 섬뜩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잠깐만…… 혹시 이건…….’
턱을 괴고 있는 시로네의 망막에 일렁거리는 화면이 반사되었다.
생각에 심취해 깨닫지 못하던 시로네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야?”
아직 끝나지 않은 영상 속에서, 점액질로 변한 피쇼의 세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활동성이 강해지더니 표면이 불룩하게 올라왔다.
‘아직 영상이 더 있어?’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형태를 지닌 점액이 묽은 액체를 뚝뚝 떨어뜨리며 화면 앞으로 걸어왔다.
입이 있을 자리가 둥그렇게 벌어지더니 쭉 하고 찢어지면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로……네…….”
생물의 아버지, 아르고네스였다.
생물 프로그램 (4)
“구면이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르고네스가 피쇼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분명 다른 시간대의 사건이지만, 시로네는 마치 그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알아?”
그렇기에 물었고, 놀랍게도 대답이 들렸다.
“당연하지. 나는 피쇼니까.”
아르고네스의 점액질이 표면 위에서 빠르게 흐르더니 피쇼의 몸으로 변했다.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다시 피부가 묽어지고, 곧바로 시로네의 아버지인 빈센트의 얼굴로 변했다.
“너의 여자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에이미였다.
“…….”
아르고네스가 피식 웃었다.
“아니, 이거였던가?”
여태까지 만났던 인연들이 마치 영상을 돌리듯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로네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그렇기에 진실이 아니다.
마치 들은 것처럼, 아르고네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헥사. 생물계에서 벗어나 있는 프로토콜. 확실히 너는 내가 지배할 수 없지. 하지만…….”
의자를 박차고 달려온 아르고네스가 영상 기록 장치를 붙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소멸시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직 진동이 남은 화면 속에서, 아르고네스의 얼굴이 바깥으로 빠르게 밀려 나오고 있었다.
‘아니야.’
영상 기록 장치에 스며들었던 아르고네스가 다시 세포를 증식하며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싱크로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서, 마치 시간을 뛰어넘은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그렇지 않은가?”
아르고네스가 팔을 늘어뜨리며 채찍처럼 휘두르자 시로네가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벽에 붙어서 고개를 들자 아르고네스의 팔이 칼날처럼 단단하게 경화되어 있었다.
“놀랄 필요 없어. 헥사의 프로토콜이 어떤 신호를 받는지 확인해 봤을 뿐이니까.”
마테리얼의 장벽으로 밀폐된 공간에서 아르고네스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인지의 장벽을 파괴하여 시간의 단위를 확장시킨다. 인간치고는 확실히 독특하군.”
이미 시폭감을 통해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원하는 게 뭐지?”
아르고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잖아? 소행성이 충돌하는 이유는 이 행성이 미워서가 아니야. 그냥 부딪힌 거지. 생물에게도 고유의 관성이 있다. 본능.”
아르고네스가 바닥으로 쭉 스며들더니 천장 쪽에서 다시 상체를 빼냈다.
“그 생물계의 모든 욕구. 그 욕망의 정반합이 세계를 이루지. 내 숙주는 알고 있는 것 같더군.”
피쇼는 머릿속 생태계를 연구하는 곤충 마법사였다.
“유익한 대화였지만, 놈은 이단을 택했다. 세계의 비밀은 밝혀져서는 안 돼. 소멸해야 한다.”
“무슨 자격으로?”
“아직 이해를 못 했군. 소멸 또한 생물의 욕망이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야. 세포는 계에 위험이 닥칠 때 스스로를 소멸시키지. 피쇼도 마찬가지다.”
“아포토시스.”
앙케 라가 자연계의 파계를 막는다면 아르고네스는 생물계의 파계를 막는 듯했다.
“생물의 모든 본성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생물계는 붕괴되지. 따라서 너나 나네, 하비츠나 미로, 모두 위험한 요소들이야.”
욕망의 화신인 하비츠가 아르고네스에게 위험 요소라는 건 의외의 말이었다.
“하나로 관철될 때 관점은 사라지거든. 극단은 위험하지.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이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저 복잡하게, 온갖 의심으로 가득 찬 세계만이 너희들에게 안전할 것이다.”
“누군가 이긴다면?”
“아포토시스.”
정보의 전파 단위를 행성으로 잡았을 때 모든 생물체를 소멸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시로네가 말했다.
“거핀이 광자계를 이탈했지.”
뚝 하고 아르고네스의 몸체가 끊어지면서 바닥에 유연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가이아인은 너를 초월하고 앙케 라를 초월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를 악당이라고 생각하는군.”
영상 기록 장치에 손을 올린 아르고네스의 육체가 물컹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긴, 그게 너의 한계지. 믿음? 고작 그런 걸로는 거핀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무슨 뜻이야?”
영상 기록 장치로 점액질이 스며들었다.
“가이아인이 인류를 남겨 둔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거핀은 떠났어도,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대부분의 육체가 스며든 아르고네스의 손가락이 시로네를 가리켰다.
“너 자신을 구원하라.”
마지막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핀의 말이다.”
아르고네스의 전언을 머리에 담아 두고 있는 그때, 영상 기록 장치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펑 하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세포질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던 시로네가, 마테리얼의 장벽을 없앴다.
그리고 피쇼가 남긴 유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결정을 내리고 몸을 돌렸을 때, 시로네의 눈에는 단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된 거야.”
시로네가 피쇼의 유언장에 얽힌 이야기를 끝내자, 이루키가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아무도 이겨서는 안 된다고.”
극악과 대립하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네가 포함된 것은 의외인데? 앙케 라의 꿈을 삼켰다고 했잖아. 그럼 라와 아르고네스가 적이 된 건가?”
“피아는 없다고 그랬어. 그저 기준에 따라서 선을 넘는 현상을 억제하는 거겠지. 라도, 아르고네스도.”
이루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하군. 대비를 해야겠지만 정보는 순식간에 퍼질 거야. 네 심정이 이해가 돼.”
“밝힐 수도, 밝히지 않을 수도 없어. 일단 상아탑에 가서 태성에게 물어볼 거야. 태성이라면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