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25
‘왜 내가 화를 내지? 좋은 일이잖아?’
가올드의 파계는 미로에게 중요하고, 간지러운 구애마저 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호기다.
‘약해 빠진 놈보다는 나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올드도 미련 없이 지금의 결과를 선택했을 터.
“짜증 나.”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냥 죽어 버려!”
강난이 소리쳤다.
“안 돼!”
하나로 모인 중지와 검지가 한 자루의 검처럼 가올드의 목에 쇄도했다.
하지만 결국 꿰뚫지 못하고 우뚝 멈추자, 천수관세음의 화신이 정지했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사고의 정지가 만들어 내는 굉음이, 마치 하늘이 쪼개지는 착각이 들게 했다.
“나쁜 자식…….”
가올드의 목을 부드럽게 움켜쥔 미로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떨었다.
“이게 뭐야.”
다시 가올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생 지켜 준다고 했잖아.”
미로가 부처가 되지 못한 이유.
고작해야 가올드가 그녀의 마음에 새긴 실낱같은 균열 하나에 불과할 테지만…….
“나를 사랑한다며.”
미로는 가슴이 뚫려 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줄루가 말했다.
“알게 모르게 의지했을 테지. 세상과 싸우는 중에도, 선을 관철시키는 중에도, 가올드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
가올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아아아아!”
폭주하는 스피릿 존이 느껴지는 순간 미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으나…….
“커억!”
결국 한 바가지의 핏물을 토해 내며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고 말았다.
“가올드!”
강난이 달려와 상태를 살피는 동안, 미로는 넋이 나간 채로 가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되었고, 해변에 모닥불이 피워졌다.
의식을 잃은 가올드가 쓰러진 가운데, 세 사람은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운이 좋았어.”
줄루가 말했다.
“마족과 싸우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 가올드가 정상이었다면 미로, 너는 죽었을 거다요.”
의심할 여지 없는 전투였다.
사투를 벌이던 상황을 복기하던 미로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파계를 유지하기 위한 건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이리 맹목적이지? 자기최면이나, 뭐 그런 거야?”
부디 그렇기를 바랐다.
“아니. 가올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요. 아까 말했듯이 그저…….”
줄루가 잠든 가올드를 돌아보았다.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지. 사랑과 증오는 한 끗 차이. 오히려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너에 대한 마음을 지킨 가올드가 대단한 것이지.”
강난이 말했다.
“나도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사람의 마음을 무슨 수로 막아? 어쨌든 당신이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어. 그만 떠나.”
“떠나라고?”
가올드가 증오의 힘으로 더 싸울 수 있다면, 강난의 말을 따르는 게 좋았다.
‘가올드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복잡한 심정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가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로야.”
고개를 돌려 보니 가올드가 차분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광익을 펼친 시로네는 남부 대륙의 광활한 평야를 빠르게 주파했다.
‘저기다.’
야생동물이 자유롭게 뛰노는 초원 너머로 사막색의 도시가 서 있었다.
공간 이동을 시전해 토르미아를 떠난 시로네가 찾은 곳은 남부 대륙의 왕국 케시아였다.
아직 마족의 손길이 미치지 않기에 공간 이동 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보다도 떠나기 전에 들었던 네이드의 말 때문이었다.
“페르미에게 투자를 받았다고?”
전날 밤 술집 화장실 앞에서 네이드가 시로네를 끌고 나와 상황을 알렸다.
“어. 하지만 조건이 있었어. 너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서, 케시아의 무기 상점을 알려 주더라고.”
네이드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거절했어. 아무리 투자가 중요해도 친구를 팔아먹는 짓은 안 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괜찮다고 하더라고. 조건은 없던 일로 하고, 계약을 하자고 했지. 너에게 이 말을 전해 달라는 요청도 없었어.”
시로네는 턱을 괴었다.
“흐음, 확실히 페르미답네.”
“그래. 결국 이 얘기를 전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는 거겠지. 어쨌든 정보의 공유는 손해 볼 것 없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어 장사하는 수완은 여전한 듯했다.
“알았어. 내가 한번 가 볼게.”
“어? 정말로?”
“어차피 상아탑에 가려면 터미널을 이용해야 돼. 가는 길에 한번 들르지 뭐. 왜 나를 찾는지도 궁금하고.”
케시아의 수도에 도착한 시로네는 예상과 다른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뭐야…….’
아직 마족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들어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법 지대였다.
“푸하하하! 죽어라! 죽어!”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산적들이 주민들에게 무차별로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눈빛이 정상이 아닌 것이, 정신이 나갔거나 약에 취한 게 분명했다.
“살려 주세요!”
대부분의 주민들이 집으로 대피했으나, 맨발의 소녀는 숨을 곳이 없었다.
“하나 잡았다!”
웅크린 소녀의 등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시로네가 손으로 붙잡았다.
“어라? 헤헤, 내가 잘못 봤나?”
마법이 분명한 현상 앞에서도, 산적들은 그저 약물의 환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와아! 사냥감이다, 사냥감.”
침을 질질 흘리는 그들이 다시 화살을 겨누자, 시로네가 포톤 캐논을 시전했다.
쾅 하고 마차가 폭발하면서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으나, 산적들은 화조차 내지 않았다.
“세상이 돈다, 돌아.”
시로네는 무시하고 소녀를 살폈다.
“괜찮니? 도시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저, 저는 아무 잘못 없어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시로네는 소녀의 팔에 남은 주사 자국을 확인했다.
“설마 너…….”
“제가 말씀드리죠.”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말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리안 시로네 님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도시의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기에 시로네는 인사조차 없이 뒤를 따랐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를 따라가는 동안 지켜본 도시의 실상은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
모두가 약에 취해 있었고, 기물 파손은 예사였다.
“도시 전체를 장악한 건가? 마약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전쟁의 공포도 가난의 고통도, 결국 뇌에서 생기는 것. 쾌락을 줄 수 있다면 나쁠 것도 없지 않나요?”
“아니. 용서할 수 없어.”
“그러시겠죠. 그럴 거라고 하더군요. 페르미 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곳은 금화륜의 상징이 첨탑에 달린 거대한 건물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내부는 깨끗했고, 약에 중독된 자는 1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학창 시절에도 그랬지만 페르미의 사고는 언제나 예측 불가였다.
승강기를 타고 17층에 도착하자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가 나왔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면 유리창으로 장식된 거대한 사무실이었다.
상아탑의 오대성으로 왕성에 들락거렸지만, 여기보다 화려하지는 않았다.
“왔구나, 시로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남자가 말할 때까지도, 시로네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페르미?”
오색찬란하게 머리를 염색하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모습이, 영락없는 마약왕이었다.
“앉아. 좋아 보이는군. 우리 사이에 인사치레는 할 필요 없겠지. 아, 차 좀 내오라고 전해.”
“네.”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시로네가 페르미에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지?”
“그렇게 급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예의 미소를 지은 페르미가 규정외식으로 만든 칩을 엄지로 튀겼다.
“거래하자, 시로네.”
기억 (3)
“거래?”
시로네의 시선이 페르미가 던진 칩을 따라갔다.
감가상각의 거래.
당시에는 발할라 액션의 채무에 묶여 있었지만 페르미의 능력은 들은 바가 있었다.
“무슨 거래?”
의자에서 일어난 페르미가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차를 내왔습니다.”
비서가 들어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 소리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알다시피 나는 마약을 팔고 있지. 중부 대륙은 마족들이 짓밟았지만, 남부 대륙 7개의 왕국이 모두 내 손에 있어. 심지어 왕족들조차 내 약을 입에 달고 살지.”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 내 동창들 중에 너처럼 망가진 인간은 없어.”
페르미가 입꼬리를 올렸다.
“장례는 잘 치렀나?”
“…….”
“피쇼의 유언이라. 어차피 말해 주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시로네는 믿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데?”
“생물 프로그램 아르고네스. 조만간 이 세계를 덮칠 특이점에 대한 내용이었겠지.”
페르미가 웃으며 돌아섰다.
“그냥 약쟁이라고 생각하면 서운하지. 나도 나름대로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언더 코드.”
페르미가 책상 위의 약병을 들었다.
“드림 스타. 들어 본 적 있지? 현실에서 폐기된 정보는 고스란히 디 어비스에 쌓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페르미가 유리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파편이 튀었다.
“어떤 것 같아?”
시로네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내가 찻잔을 던진 순간 미래는 이미 정해진 거야. 몇 개의 파편으로, 어떤 형태의 파편으로 쪼개질지.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페르미가 자신을 가리켰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건 내 의지일까, 아니면 물질의 작용일까? 만약 네가 시간을 되돌렸다면, 나는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다면 타임 바이브레이션을 할 때마다 다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나의 미래도, 너의 미래도. 디 어비스의 세계는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야. 미래의 필터를 전부 거치고 내려온 소중한 정보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페르미의 방법대로라면 이 세계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터였다.
“조만간 세상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그게 네가 마약을 파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흐음. 내가 얼마나 버는지 알아?”
“몰라.”
“천문학적이지. 상상도 못 할걸. 그리고 그 돈은 고스란히 내 규정외식의 밑거름이 된다.”
또 다른 칩을 허공으로 튀긴 페르미가 그것을 낚아채며 미소를 지었다.
“보험 하나 들어 두는 것도 좋잖아?”
시로네는 이해했다.
“내 마법을 사겠다고?”
“감가상각의 거래에서 마법의 가치는 내가 정한 합리성에 기초한다. 야훼의 마법. 그것을 잠깐 빌리기 위해서는 왕국을 팔아도 안 되지. 너무 비싸거든.”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았다.”
몇 개의 왕국을 건설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물론 규정외식의 룰 안에서지.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만 마법을 살 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