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34
‘뭐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일어선 에이미는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카니안 고원.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전쟁 중.
뇌리의 저편에서 즉각 대답이 떠올랐으나, 마치 장벽에 막힌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살아 있는 건가?’
자기상 기억을 발동하면 쇼크 상태의 정신이 회복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이 거부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본능이 원하는 건 이대로 미쳐 버려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였다.
“크아아아아!”
1미터 신장의 아귀들이 들쭉날쭉한 이빨을 드러내며 에이미에게 달려들었다.
홍안에 불이 들어오고, 순간 정신을 차린 에이미가 몸을 뒤틀며 공격을 피했다.
충격적인 현실이 인지되면서 막대한 스트레스가 뇌를 찢어 버릴 정도로 밀려들었다.
“크으으으으!”
하지만 미치지 않았다.
“키헤헤헤! 생존자다! 생존자!”
두 손에 화염을 피어오른 에이미가, 달려드는 족족 아귀들을 통구이로 만들었다.
“대대장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베리크를 포함한 14명이 절뚝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지옥에서 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괜찮아? 부상당했잖아!”
베리크의 오른쪽 손목이 사라진 상태였고, 급히 피하느라 지혈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피하세요. 이미 본진과 상당히 멀어졌어요.”
“여기서 더 피를 흘리면 죽어.”
군복을 가늘게 찢은 에이미가 베리크의 팔뚝에 칭칭 감더니 강하게 조였다.
“으아아아!”
신경이 눌리면서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으나,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됐어. 생존자는 이것뿐이야?”
제1분대장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오는 길에 만난 대원은 이게 전부입니다.”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홍안을 밝혔다.
‘어디쯤이지?’
원점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기상 기억은 현재의 좌표를 정확히 도출했다.
에이미가 서쪽을 가리켰다.
“본진은 저기다. 이제부터 날 따라와. 가급적 전투는 피할 테니 부상자 잘 챙기고.”
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홍안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인도했으나,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마족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소규모 교전에서 대원 3명을 잃었고, 2시간 뒤에는 다시 1명이 전사했다.
“하아! 하아!”
직선이라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거리.
‘절대 포기하지 않아.’
실타래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아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해가 저물 무렵, 에이미는 마침내 아스라이 전달되는 전투의 굉음을 들었다.
“왔어! 도착했다. 모두 조금만 더 힘내.”
마족들이 정신없이 전진하고 있기 때문에 본진까지 우회하는 건 문제가 없을 터였다.
“크크크! 찾았다.”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이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대원들의 눈에 절망이 담겼다.
“보고 싶었어.”
괴조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황소의 머리를 가진 마족이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필이면…….’
일전에도 겨룬 적이 있는 사단장 파크마.
‘아니, 우연이 아니야.’
거대한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쥔 파크마가 쿵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떨어졌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
아직도 에이미에게 맞은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말했잖아, 내 망막을 파내서라도 네 얼굴을 새겨 둔다고. 난 말이야, 그 이후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를 찾아다녔거든.”
후방을 살핀 에이미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거의 다 왔는데.’
전원 녹초가 된 상황에서 팔팔한 파크마와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네가 원하는 건 나겠지?”
에이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은 파크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네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거야. 예를 들면…….”
갑자기 튀어나온 파크마가 대형 도끼를 휘두르자 부상당한 대원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이런 거?”
에이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남은 자들이 동시에 합공을 가했다.
“죽어어어어!”
화염과 냉기가 빗발쳤으나, 파크마는 피할 생각조차 없는 듯 고스란히 맞으며 다가왔다.
“크크! 꽤나 당했나 봐? 전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대형 도끼는 자비가 없었고, 결국 에이미와 베리크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
“자, 이제 방해거리도 없지? 슬슬 숙제를 해 볼까?”
파크마가 땅을 쿵쿵 울리며 다가오자 베리크가 에이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십시오, 대대장님.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에이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네가 가. 내가 맡겠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알잖아요. 제 실력으로는 본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대장은 나야. 이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야.”
“……어차피 인간은 죽어요.”
“뭐?”
파크마가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지켜보는 가운데, 베리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모든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걸 떠올리라고. 그러면 정말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대요.”
베리크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살고 싶죠.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바에는, 옳은 선택을 하고 싶어요.”
에이미가 이를 악물었다.
“옳은 선택? 나를 대신해서 죽는 게 옳은 선택이야?”
“아뇨.”
베리크가 천천히 일어섰다.
“기왕 남자로 태어났는데,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멋있어 보이는 게 낫잖아요?”
어차피 죽을 바에는.
“당신이 부대로 복귀해서 너무 기뻤어요. 애인이 아닌 우리를 선택해 줬으니까. 솔직히…….”
베리크가 뒤를 돌아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 축복받은 놈에게 이긴 기분이 들더라고.”
“…….”
“가. 당신은 살 자격이 있어. 그리고 나는…… 끝내주게 멋있는 남자가 되는 거지.”
베리크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영원히 말이야.”
다가오는 재앙 (2)
베리크가 돌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파크마가 사악한 웃음기를 흘렸다.
“크크, 그래?”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인가.
“재미있군.”
그리고 그 비극이야말로, 마족이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대형 도끼가 공기를 가르는 순간, 베리크의 육체가 바람처럼 빠르게 가속되었다.
‘헤이스트!’
파크마의 등 뒤로 빠르게 돌아 들어간 그가 푸른 전기를 머금은 두 손을 내밀었다.
‘일렉트릭 쇼크!’
짜릿한 통증에 파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녀석…….’
위력은 대단하지 않았으나 예상치 못한 고통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크아아아아!”
파크마의 눈이 뒤집힌 것을 확인한 베리크가 소형 블리자드를 깔며 소리쳤다.
“빨리 가!”
냉기의 연무에 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에이미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베리크…….’
군대는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휘관이 원하는 건 강력한 1명의 마법사가 아닌, 집단이 낼 수 있는 최대 화력이기 때문.
‘그래, 맞아.’
마법은 규격화되고 병사들의 장기는 무시당하지만, 발키리에 입대하기 전 베리크의 별칭은…….
‘만능재주꾼.’
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에이미!”
냉기의 한복판에서 베리크의 고함 소리가 터졌다.
“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시커먼 구름 속에서 한 줄기의 뇌전이 추락했다.
콰아아아앙!
폭음성이 에이미를 꾸짖자 정신을 번쩍 차린 그녀가 몸을 돌려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베리크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 수는 없어.’
자기 합리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생명을 유지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보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단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조차도.
‘시로네.’
눈물이 흘렀다.
‘보고 싶어.’
삶은 아름답다고, 최선을 다하면 온 인생을 꽃밭으로 물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게 뭐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게 뭐냔 말이야!”
이제 그녀에게 생명이란 너무나 부담스럽고 무거워서, 애초부터 없었으면 하는 것.
“지긋지긋해!”
삶에 대한 미련에, 진절머리가 났다.
순간 이동을 멈춘 에이미는 방향을 틀어 베리크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시로네와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인생도, 언젠가는 죽음이 삼키게 될 것이다.
‘미안해, 시로네. 내가 책임지고 싶어.’
전장에 도착한 에이미의 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베리크가 보였다.
“호오, 벌써 왔어?”
파크마가 반쯤 초주검이 되어 있는 베리크의 얼굴을 들고 입꼬리를 찢었다.
“너, 너 이 자식…….”
에이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녀석하고 놀면서 기다리고 있었지. 네가 돌아올 때까지 고문할 생각이었거든.”
파크마가 베리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으아아아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하하하! 자, 이제 현실을 알았냐? 멋있는 척해 봤자 결국 인간이야.”
파크마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후회된다고 말해. 그러면 풀어 주지. 대신에 저 여자를 죽여 달라고 빌어 봐.”
베리크가 입을 다물자, 파크마는 그의 발목을 붙잡고 다리를 비틀어 뜯어 버렸다.
“으아아아!”
“빨리 말하라고. 살려 준다니까? 어차피 돌아왔잖아? 저 여자만 팔아넘기면 아프지 않을 수 있어.”
에이미의 정신이 핑 하고 돌았다.
“너……!”
분노에 이성이 날아가고, 몸이 저절로 파크마를 향해 뛰어들려는 그때.
“쳇, 쪽팔리게.”
베리크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미.”
“오, 좋아, 좋아. 말해. 살려 달라고 빌어.”
파크마가 웃음살을 볼록이며 팔을 내밀자, 베리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별것도 아니지?”
죽는다는 것.
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더니, 섬광에 휩싸이는 동시에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