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36
베그파는 술이 들어가면 늘 같은 소리를 했다.
“아르아르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신의 입김을 의성어로 표현한 거야. 이곳은 베카 신이 특별히 보호해 주는 곳이라고.”
시로네가 맞장구를 쳤다.
“이야, 그렇군요.”
“베카 신의 입김에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어. 파도를 만들어 생업을 잇게 해 주지만, 화가 나면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고 하지. 지금도 메로 절벽에는 베카 신의 입김이 새겨진 장소가 있어.”
“네. 저도 봤어요. 정말 신기하던데요. 사람이 새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었어요.”
“당연하지! 여태까지 뭘 들은 거야? 그건 분명 베카 신의 입김이라고!”
시로네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술자리에서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었다.
“아, 맞아요! 제가 취했나 봐요.”
호탕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취해야지!”
생선구이 꼬치를 양손에 든 뚱뚱한 남자가 아름다운 딸과 함께 걸어왔다.
“야스카 아저씨.”
마을에서 제일가는 어부로, 힘이 장사였다.
“아르아르에서는 전쟁 따위 잊어버려도 돼! 자, 자! 이거 먹고 또 취하자고!”
야스카가 생선구이 꼬치를 건네자 그의 딸 루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안녕, 시로네. 재밌어 보이네?”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고, 구릿빛 몸은 야생마처럼 탄탄하고 늘씬했다.
“응. 이렇게 편한 시간은 오랜만이야.”
루아의 인기는 마을에서 하늘을 찌르지만, 야스카는 시로네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그래, 행복한 게 제일이지. 그러지 말고 우리 딸이랑 여기에 정착해.”
“아빠도 참…….”
루아 또한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뭐 어때서 그래? 시로네라면 아빠도 안심이야. 착하지, 마법사지. 그리고 부서진 집도 전부 수리했잖아? 멋진 마법 실력으로 말이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집 고쳤다고 시집을 가요? 시로네, 신경 쓰지 마.”
시로네가 넉살을 떨었다.
“하하! 나는 좋은데? 이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게다가 이제는 책임질 일도 없으니까.”
그래, 모든 게 끝났다.
‘다 잊어버리자. 페르미가 알아서 잘해 줄 거야. 전쟁도, 야훼라는 이름도…….’
비록 세상을 등지게 되었지만, 인류라는 거대한 짐을 내려놓은 희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
이 시점에서, 시로네는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에 대한 위화감을 느꼈다.
‘야훼의 경지…….’
분명 거기에 대해 페르미와 이야기를 했다.
‘무슨 얘기를 했더라? 기억이 나지를 않아. 거래를 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여전히 야훼는…….’
시로네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시폭, 박지, 입도, 공진. 전부 느껴진다. 아직 아무것도 페르미에게 넘어가지 않았어. 그런데 왜?’
기억은 계속 이어진다.
“할라리올레! 레이에롤라!”
아르아르 특유의 민속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짝을 이루어 춤을 췄다.
시로네와 루아도 손을 맞잡고 빙빙 돌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세상이 돌고, 술이 돌았다.
“시로네, 이쪽으로.”
시로네의 손목을 붙잡고 파티장을 나선 루아는 백사장의 끝으로 달렸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지고, 두 사람은 달빛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로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던 루아가 갑자기 다가와 시로네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 너 좋아. 좋아해.”
아르아르 마을 사람들은 감정에 솔직하다.
“루아…….”
잠시 에이미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시로네는 애써 그녀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미안해. 나는 돌아갈 수 없어.’
끔찍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세상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영원히…….’
신이 지켜 주는 아르아르 마을에서.
‘살아가는 거야.’
루아의 몸을 끌어당긴 시로네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모래밭에 쓰러졌고, 있으나 마나 한 옷가지는 손길 한 번에 풀어졌다.
둥. 둥. 둥. 둥.
북소리는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아니야!”
시로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럴 리가 없어.”
자신의 기억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루아하고…….’
입술의 감촉, 살의 감촉, 심지어 그녀의 향기와 풍경의 소리까지 선명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여전히 에이미를 사랑하고 있어. 설령 술에 취했다고 해도……. 설마?’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기억 왜곡인가?’
라 에너미는 차치하고라도, 정신 계열의 마법사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무한의 마법사에게 정신 조작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 기억 속의 나는 페르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실제로 야훼의 경지는 나에게 있어. 이게 핵심이야.’
가설에 가설일 뿐이지만, 서투른 마법사가 아니라면 상당히 악질이었다.
‘혹은 내가 모르는 어떤…….’
마이콘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만 없으면 참 좋은 형인데.’
평소에는 차분한 성격인 그가 유독 아침마다 불같이 화를 내는 게 이상했다.
‘매일 악몽을 꾸나 봐.’
전쟁이 한창인 바깥세계에서 왔으니 시로네도 아픈 기억 정도는 있을 터였다.
“그만 진정하고 우리 집에서 아침 먹어요. 빨리 먹고 메로 절벽으로 가야죠.”
“메로 절벽?”
마이콘이 해안가의 절벽을 가리켰다.
“형이 날마다 가서 수련하는 곳 있잖아요. 아침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있으면서.”
시로네는 절벽을 살폈다.
‘이것도 기억에 없어.’
기억은 본래 망각되기에, 어떤 기억이 말소되었는지는 키워드를 접해야 알 수 있다.
‘예상보다 많은 정보가 삭제된 거야.’
어쨌거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절벽을 찾았다면, 명백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마이콘, 미안한데 오늘은…….”
“알아요. 안 먹는 거. 시간이 없다고 할 거죠?”
“…….”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마이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시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시간이 없어.”
순간 이동을 시전한 시로네가 절벽으로 쇄도하자 마이콘이 입을 벌렸다.
“진짜 끝내주네…….”
이것만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여기다.’
하늘에서 절벽을 내려다본 시로네는, 다양한 크기의 원이 지면에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
‘엄청나게 크다. 하늘에서 측량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릴 수 없는 원이야.’
아니, 우주 끝에서 봐야 할 것이다.
‘완벽하니까.’
마을 주민들이 신의 입김의 증거라 부르는 원은, 천사의 광륜과 다르지 않았다.
시로네는 육지 쪽의 숲을 돌아보았다.
“흐음.”
제9감까지 개방한 초월적인 감각들이 마치 갈증처럼 숲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 몸은 기억하고 있어.’
숲으로 들어간 시로네는 스피릿 존을 개방하고 과거의 흔적을 찾았다.
‘저기 뭔가 있다.’
스피릿 존을 통해 들어오는 공감각 중에서 유독 거슬리는 물체가 있었다.
평범한 나무 앞에 도착한 시로네가 둥치에 손을 넣자 메모장이 잡혔다.
‘마테리얼로 만든 거구나.’
표시의 일환으로, 한 페이지가 묵직한 중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커버를 넘기자 암호문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시로네 코드.’
유치할 수도 있지만, 시로네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조합하여 암호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에이미의 손’을 X라는 문자로 치환하고, 해독할 때는 ‘모름’으로 변환하는 식이었다.
설령 도표가 추출되어도 사람에 따라 ‘잡다’ 혹은 ‘평온’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해독이 어렵다.
‘느낌이 주관하는 감성적 코드. 일기 쓰는 대신 심심할 때마다 만들어 왔던 거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어디 보자…….”
시로네는 수많은 문자열로 이루어진 암호들을 한꺼번에 해독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첫째, 머릿속의 칩은 추출하지 말 것. 사망에 이를 수 있음? 이게 무슨 말이야?’
시로네는 황급히 머리를 만졌다.
‘있다!’
귀 뒤편에 작게 절개된 상처가 만져졌다.
‘칩을 박았다고?’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물리적인 장치라면 정신력과는 무관해. 그래서 기억을 조작할 수 있었던 거야.’
대체 누가?
빠르게 메모를 뒤졌으나, 어제의 시로네도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기상 시간 매일 오전 8시 30분. 맞아, 오늘도 그랬지.’
계속 읽어 나갔다.
‘아르아르 마을 탈출 계획. 타임 바이브레이션. 최소 24시간의 진폭 요구.’
시간선을 24시간까지 튕긴다면, 12시간 전의 과거를 현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럼 어제 저녁 8시 30분이 되는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과 시간대가 거의 똑같아.’
그 시간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수련을 한 모양이네.’
시로네는 타임 바이브레이션의 능력을 매일매일 끌어올린 기록을 보았다.
‘언제 시행하면 되지?’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 시로네는, 비로소 어떤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깨달았다.
“오늘이다.”
그것도 지금.
‘타임 바이브레이션!’
시로네의 몸에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기가 일렁거렸다.
다가오는 재앙 (4)
“간다.”
많은 것이 미지수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사건의 중심부에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어떤 놈인지, 직접 가서 봐 주겠어.’
불확실한 대상을 상정하는 시로네의 콧잔등이 맹수처럼 일그러졌다.
“크으으으!”
없는 기억에서 생소한 두통이 머리를 두드리고, 마침내 눈이 번쩍 뜨였다.
‘됐다!’
24시간을 통제하는 시간기가 진동하면서 시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장벽이 파괴되었다.
감각의 역전되자 기억 또한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마이콘을 만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해변에서 루아와 사랑을 나누고, 춤을 추고.
‘여기가 12시간.’
파티장에서 술을 마시는 기억이 현실로 인지되면서, 촌장 베그파가 다가왔다.
“푸하하하! 자네 정말…… 키릭. 유쾌……. 마법사……. 키기기기기!”
과거를 현재로 되돌린 시로네의 청각이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다르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기억.
뇌에 새겨진 정보가 실제 현실의 정보와 충돌하면서, 감각이 뒤틀리고 있었다.
“시……로…….”
베그파의 얼굴이 망막 잔상에 의해 중첩되면서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키아아아!”
마침내 조작된 기억이 사라지고, 오감이 오직 현실만을 인지하는 순간.
“죽어라, 시로네!”
인간이 아닌 2미터의 회색 괴물체가 번질거리는 검은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