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4
“너에게는 어떤 정보가 있지?”
“대화를 하자는 건가요?”
“그렇군. 대화를 할 수밖에 없겠군. 아직 나에게는 정신을 공유할 주인이 없으니.”
아린은 밤새도록 하비스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유년기 시절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야 했던 그녀가 누군가와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두 달에 걸친 기초 실험을 끝낸 아케인은 마침내 유리관을 열었으나 하비스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를 구속했던 건 공간이 아니었다.
“나와라. 너는 카니스와 공명한다. 종속의 제약을 받지는 않을 것이야. 이유는 차차 말해 주마.”
대답은 없었다.
초인적인 연산 속도를 가진 마도 생물체가 반응이 늦다는 건 의외의 일이었기에 아케인이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
“걸리는 거라도 있나?”
“어째서 카니스지?”
“흐음, 불호라는 건가? 정신 공명을 해 본 적이 없는 네가 벌써부터 취향이 생겼다는 게 특이하군.”
“너의 기억을 물려받은 내가 너에게 종속되는 건 메리트가 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카니스는 고집스럽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야. 내 조언을 들을 것 같지 않아. 그런 성향은 전투에서 약점이 된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
“반면에 아린은 달라. 그녀는 10년 동안 라둠에서 살았고 카니스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 그에 따른 반발로 정신감응도가 엄청나게 민감하다.”
“초경을 말하는 건가?”
초경이란 어떤 사물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인지하는 독특한 뇌파 패턴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로 자란 아린의 뇌파는 보통 사람처럼 사물을 구별할 수 없다.
다만 사물의 느낌, 즉 첫인상을 파악하는 것만큼은 미지에 가까울 정도로 민감했고, 이는 정신 계열 마법사에게 최고의 재능인 셈이었다.
물론 아케인 또한 아린의 재능이 카니스보다 특별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린은 안 돼. 마음이 너무 여려.”
“이해할 수 없군. 초경은 다른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녀라면 내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어.”
아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형태가 다르니 판단 또한 달라지는 것인가?
“네 말이 더 합리적이기는 하겠지. 하지만 아린은 안 돼. 너는 카니스에게 가는 거다.”
***
“크크크.”
상공 2킬로미터에서 폭발한 하비스트는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런 거였군, 아케인.”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아케인이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가진 아린을 포기하고 굳이 카니스를 선택한 이유를.
‘둘 다 똑같은 고집쟁이였어.’
무게가 없기에 깃털처럼 대기에 밀리며 추락하는 하비스트의 모습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하비스트!”
카니스는 땅바닥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하비스트에게 기어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의 형태는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왜, 왜 그랬어? 난 죽어도 상관없었다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배신하지를 말든가!”
“크크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비스트가 미약한 진동으로 말을 건넸다.
“네가 내 주인이잖아.”
“…….”
“마도 생물체는 말이야, 주인이 원하는 걸 하면 되는 거야. 죽고 싶은 인간 따위는 없어. 그러니 카니스, 너도 그만 자신을 학대하는 걸 멈춰.”
카니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는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지만, 왜 살고 싶지 않겠는가?
세상 모두를 속여도 하비스트는 속일 수 없다. 그렇기에 마도 생물체는 자폭을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하비스트. 나는…….”
하비스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도 생물체는 주인이 원하는 걸 하면 된다. 그렇게 설계되었기에, 죽음 또한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현재 그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카니스와 자신을 꺾은 시로네의 전투력이었다.
‘이상한 마법이군.’
분자를 진동시키는 능력.
하지만 전투의 모든 과정을 복기하자면 단순히 마법에서 밀린 게 아니었다.
‘상대를 제압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아. 그렇다고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다.’
철두철미하게 결과만을 지향하는 전투 방식은 오히려 마도 생물체를 닮아 있었다.
‘감정 복원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초인적인 통찰력이겠지. 문제에서 해답까지 이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무생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비스트는 힘없이 입가를 찢었다.
무언가에 절대적으로 특화되어 있는 재능.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연계에서 흔히 발현되는 성질은 결코 아니었다.
‘크크크, 아케인, 고생깨나 하겠구나.’
실제로 아케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뜻대로 움직여 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분노를 담아 카니스에게 다가갔다.
“한심하구나, 카니스. 내 얼굴에 먹칠을 해도…….”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닥쳐.”
평소와 다른 과격한 말투에 친구들이 놀란 반면 아케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껄껄껄! 참으로 기운찬 아이로구나. 어떠냐? 내가 제안을 하나 할 테니…….”
“닥치라고. 내 말 안 들려?”
이번에는 아케인의 얼굴이 굳었으나 시로네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중이야. 한마디만 더 하면 박살을 내 버릴 거야.”
시로네의 전신에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돌았다.
‘레이저.’
에너지 흡수에 특화된 하비스트를 과포화 상태로 폭발시킬 정도라면 아케인이라도 우습게 여길 수준은 아닐 테지만, 지켜보는 친구들은 피가 말랐다.
“화가 났다고 해도, 너무 도발하는 거 아냐? 상대는 대마법사잖아.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에텔라가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네이드와 이루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로네는 그냥 학생이라고요. 지금이라도 말려야 돼요.”
“아뇨. 아케인에게도 까다로운 상황이에요. 방법은 모르지만, 시로네가 구사하는 레이저는 광자 출력 계열의 최상위 마법입니다. 암흑 마법의 카운터인 셈이죠. 대마법사라고 해도 물릴 가능성이 있는 이상, 아케인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 시로네도 알고 있기에 감정대로 쏘아붙일 수 있는 거예요.”
네이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대마법사를 저런 식으로 대하는 건 시로네가 아니고서는 나오기 힘든 배짱이었다.
아케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지금의 너라면 나를 제압할 수도 있겠지.”
대마법사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말에 카니스와 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적색 파동. 입자를 진동시키는 원리인 것 같은데, 그건 참으로 암흑 마법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지친 상태이니 너를 막아 내기란 제법 힘들 것 같구나.”
아케인은 시로네의 반응을 살폈다.
“어떠냐, 대마법사에게 이런 얘기를 들으니?”
“뭐가 어떠냐는 거야?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재미있지 않니, 마법?”
“…….”
“마법이란 그런 것이란다. 공정하지도 않고, 이래야 한다는 규칙도 없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예측할 수도 없다. 도시 하나를 날릴 수 있는 운석 마법사가 시시껄렁한 용병에게 죽을 수도 있는 게 마법의 세계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 당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죗값이라도 치르겠다는 거야?”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케인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불꽃처럼 일어섰다. 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전투는 해봐야 안다는 얘기란다.”
시로네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순수한 투기. 수많은 사선을 넘은 자만이 풍길 수 있는 죽음의 냄새가 그의 생명을 짓누르는 듯했다.
“어때, 나랑 상대해 보겠느냐?”
“…….”
시로네는 침묵을 지켰다. 조금 전까지 험한 말을 쏟아 내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과연, 물건은 물건이로다.’
전술적 고집이 없다. 사고는 물처럼 유연하고 시야는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
카니스가 어느 지점에서 시로네와 갈라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빛을 잃은 천재(2)
“좋은 판단이다. 한번 내린 결정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생각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야. 전투도 마찬가지.”
“착각하지 마. 난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
“껄껄! 근성까지 갖추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내가 맞혀 볼까? 너는 실전으로 성장하는 타입이다. 틀에 박힌 것들만 가르치는 학교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어떠냐, 나랑 같이 가지 않을 테냐? 최고의 마법사로 키워 주마.”
“헛소리하지 마. 당신 같은 살인자보다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훨씬 존경스러워.”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여기서 무엇을 배웠느냐? 광자 대포? 적색 파동? 그것도 아니라면, 이모탈 펑션에 대한 조언이라도 해 주더냐?”
시로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어떻게 그걸……?”
아케인은 폭소를 터트렸다.
이 맛에 교사를 하는구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을 모아 두고 마음껏 헛소리를 지껄여 댈 수 있으니까.
“참으로 희귀하지. 이모탈 펑션이라는 게 어디 보통 경지인가? 그러나 아이야, 네가 모르는 전장에는 엄청난 괴물들이 많이 살고 있단다. 그곳에서 신명 나게 어울리다 보면, 언로커도 그리 유별난 건 아니지.”
시로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야 언로커를 유별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실력을 떠나 누적 경험치 자체가 다른 인물이었다.
“내 평생에 7명을 만났지. 4명은 제법이었고 3명은 죽였다. 언로커의 특징은 가장 진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철시킬 수 없는 진리는 상식 앞에서도 무너지는 법. 똑같은 것만 가르치는 학교에서 네가 배울 것은 없다. 너는 너만의 진리를 예리하게 가다듬어야 해. 나에게 오는 게 최고가 되는 지름길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해 마법을 배우는 게 아니야. 당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치부하지 마.”
시로네는 여전히 단호했으나 전보다 말투는 누그러져 있었다.
아케인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법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열망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준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테니까.
“아직 어리구나. 지금은 모두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부터 대단한 자에게 호의적이다. 딱히 너라는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야. 그런 가식적인 놈들과 언제까지 교류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시로네에게 호의적인 자들이 발끈했으나 시로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강해져라. 그들이 영원히 너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그들이 너를 짓밟을 것이다. 과연 그런 상황이 닥쳐도 멋들어진 변명으로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아케인이 손가락 3개를 펼쳤다.
“3년. 그 안에 너를 대륙의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자로 키워 주마. 3년이 짧은 것 같으냐?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너의 개성을 극대화시킨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헛소리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언로커인 시로네가 대마법사의 지도를 포기하고 학교에 남아서 좋을 일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사회에 나가 취직하기 수월한 정도?
“당신의 말이 옳아.”
이루키와 네이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시로네…….”
“하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을 거야. 학교는 내가 싸우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는 곳이야. 선생님, 친구들, 소속감. 당신이 나에게 이런 걸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흐음.”
아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알페아스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학생들을 세뇌시킨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막상 인생을 살게 되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강하지 않았다면 너는 학교에서 그저 그런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강함을 증명하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게야.”
“정말로 그게 전부라면, 당신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뭐라?”
“그렇게 싸워서 대마법사가 된 당신에게 지금 남은 게 뭐야? 모두가 당신을 싫어하잖아. 사실은 외로운 거 아냐?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니까, 이런 나쁜 짓을 하면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거잖아.”
아케인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헛소리. 강자는 외로운 법이다. 약하기에 뭉치려 드는 것이지. 지금 상황을 보아라. 모두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있다. 내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강함이고, 외로움의 실체인 것이야.”
“아니, 당신은 살인자야. 세상 모두가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살인자.”
아케인의 눈에 광기가 담겼다.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고 있느냐? 나에게도 한때는 동료라는 것이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는 주위의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지. 그게 누구냐고? 바로 네가 존경하는 알페아스다.”
시로네는 믿지 않았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의 말은 듣지 않을 거야. 살인자니까. 그리고 지금도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니까.”
“살인자라. 그 알페아스가…… 나랑 똑같은 살인자라고 해도 말이냐?”
시로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만큼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야. 당신이 교장 선생님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껄껄껄! 당연히 알지. 그 애송이는 내 제자였으니까.”
“뭐……?”
시로네가 알기로 알페아스는 소싯적부터 빛의 마법의 선구자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암흑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아케인은 아련한 눈으로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나날이었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그가 에텔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알페아스는 결혼했는가?”
“아뇨. 평생 홀로 지내시면서 교육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아케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수십 년을 증오한 알페아스지만 유일하게 동정할 거리가 남아 있다면 에리나였다.
“아는지 모르겠네만 알페아스는 결혼한 적이 있네.”
에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알기로 알페아스는 분명 미혼이었다. 설령 결혼을 하고 헤어졌더라도 가문의 결합은 기록이 남기 마련이다.
“아뇨. 서류상으로도 미혼이신데요.”
“결국 인정을 받지 못한 모양이로구먼. 그래도 알페아스는 결혼했네. 3년을 함께 살았으니까. 에리나라는 사람이었지. 훌륭한 여성이었어.”
“대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인가요?”
“당시에 알페아스는 광양자설을 인정받아 잘나가는 신예 중의 하나였지. 골드서클상을 받았으니 그 위상을 짐작하겠지? 용뢰의 마법부서에 취직이 확정되었고 바스타드 가문의 여성과 살림도 차렸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지. 하지만 그에게도 근심은 있었네.”
아케인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내인 에리나의 지능이 조금 떨어졌네. 열 살 아이의 수준이었지.”
“그랬군요…….”
“하지만 알페아스는 신경 쓰지 않았어.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했지. 결코 동정이나 가식이 아니었어.”
아케인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렀다.
마법의 황금기.
아케인이 세상을 호령하고, 마법사회에 진출한 알페아스가 초신성으로 불리던 시대였다.
“올해의 골드서클상! 미르히 알페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