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50
“상관없어.”
거핀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600경의 시간을 지나도, 남는 것은 결국 공空이다. 신이 정말로 무심하다면, 그것도 괜찮아. 내가 신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니까.”
다른 동료들처럼 윤회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신호로 남아 있는 이유였다.
거핀은 벽으로 걸어갔다.
“슬슬 가 볼까?”
무한을 깨 버릴 것이다.
“기다려.”
루시퍼의 말에 거핀이 고개를 돌렸다.
“작별 인사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영멸을 향해 가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루시퍼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무심한 신이 아닌, 이 세계를 사랑하는 신 말이야.”
“흐음, 사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 신이라는 개념은 그런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신이라면…….”
거핀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희망 정도는 심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설령 한 줄기 신호에 불과할지라도 말이지.”
루시퍼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메시아.’
만약 정말로 그것을 해낼 수 있다면…….
“너를 현실로 돌려보내 주겠다.”
예상치 못한 루시퍼의 말에, 거핀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호오? 꽤나 오래 걸렸군.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어?”
“방법 같은 게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정화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를 보낼 수 있는 거지.”
거핀은 깨달았다.
“설마, 너…….”
“그래. 어쨌든 정화를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너를 대신해 소멸하겠다. 어차피 너 정도의 데이터를 대체할 존재는 지옥에서 나밖에 없으니까.”
“흐음.”
턱을 괴고 생각하던 거핀이 물었다.
“어떤 고통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겠지? 내가 감당했던 것과는 수준이 다를 거야.”
“대신에…… 조건이 있다.”
거핀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
“네가 진실로 공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그 의미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다오.”
한낱 신호로 끝날 수는 없으니까.
“심정은 알겠는데.”
거핀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인간과 달라. 링크가 없다는 뜻이지. 그저 이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의 일부분이라고.”
“이카엘.”
루시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해라. 한낱 시스템이 아닌, 너희들과 같은 존재의 의미를. 이게 내 조건이다.”
“이카엘이라.”
하필이면 그 고집스러운 천사장이라니.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율법의 시작인 이카엘과 율법 바깥의 혼돈인 루시퍼가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유와 무가 합쳐질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루시퍼는 누구보다 이카엘을 증오하고 또 시기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태초의 순간, 찬란한 폭발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태어난 대천사 이카엘의 모습을.
그때 처음 느낀 감정은.
‘왜 나는…….’
이토록 추악하게 태어난 것일까?
시로네는 오메가의 초기를 통해 루시퍼의 울분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 있었다.
‘음과 양.’
탄생과 동시에 갈라선 두 극단.
회상에서 빠져나온 루시퍼가 허탈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질투했지. 같은 곳에서 태어난 존재인데도 나는 왜 이렇게 추악한 것일까?”
외모가 아닌, 개념의 문제였다.
“왜 나는 이카엘을 미워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나를 추악하다고, 이카엘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깨달았나?”
“아마도.”
600경이 넘는 시간 동안 거핀과 싸우면서, 루시퍼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질 수 없으니까.”
루시퍼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건 증오밖에 없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어차피 공空이라면…….”
감정 또한 신호에 불과하다면.
“적어도 마지막은 사랑으로 하고 싶군. 증오보다는 사랑이 낫지. 안 그래?”
똑같이 서로를 지칭함에도 루시퍼가 이카엘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듯이.
시로네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사랑?’
지옥의 군주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아…….’
그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은, 마족 사단장 이고르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거였어.’
-참회하는 악마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거핀이 물었다.
“지옥은 어떻게 하려고?”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마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주도권이 인간에게 넘어가는 것뿐. 그들이 만드는 세계가 어떤 지옥일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같은 인간들이 대부분이라면, 이곳도 지내기 나쁜 곳만은 아니겠지.”
“만약 인간이 타락한다면?”
“흥, 현실로 돌아갈 놈이 지옥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인간이 만든 군주가 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일단 사탄이라고 해 둘까.”
“사탄이라.”
인간들이여, 부디 자중하기를.
“가라. 내 정화가 끝나면 너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지옥의 군주가 참회하는 것으로 너의 울티마는 더욱 강해지겠지만…….”
루시퍼가 악마의 눈을 번뜩였다.
“앙케 라는 강하다.”
거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모든 가이아인이 합심해서 공격할 거야.”
“이카엘은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그녀가 얼마나 보수적이고 자부심이 강한지는 거핀도 알고 있었다.
루시퍼의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주의 존폐가 걸린 거래였기에, 거핀도 섣불리 어길 생각은 없었다.
“최선을 다하지.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이카엘을 저버리는 경우는 없을 거야.”
루시퍼는 비로소 만족했다.
“그거면 됐어.”
눈을 감은 그가 이카엘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화까지 남은 시간, 764해 1,428경 9,984조 1,298억 1,176만 3,329시간 남았습니다.”
참회의 대가였다.
무한의 벽을 떠난 거핀은 하루 정도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남았지?”
루시퍼가 하늘에 대고 물었다.
“정화까지 남은 시간, 764해 1,428경 9,984조 1,298억 1,176만 3,329시간 남았습니다.”
1시간도 줄어들지 않았다.
“크크, 그런가.”
지옥에서 시간은 감각으로 환산되고, 지옥의 군주가 고통을 느낄 리가 없는 것이다.
“쪽팔리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루시퍼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하면서 이카엘의 환영이 드러났다.
“아아…….”
무와 유의 거리만큼이나, 거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한 번만이라도 너를 볼 수 있다면.”
눈앞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어 보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루시퍼의 얼굴에, 생애 처음으로 아름다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카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들고.
“사랑해.”
그 고통은 온전히 시간으로 환산되어.
“으아아아아!”
루시퍼의 육체를 검은 재로 폭발시키며 순식간에 무한의 벽으로 밀어 넣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곳에.
“……정화가 끝났습니다.”
여자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대면 (4)
***
하루가 지났다.
“아욱.”
침대에서 눈을 뜬 에이미가 평소의 습관대로 몸을 움직이자 전신 근육통이 밀려들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것 같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절뚝절뚝 걸음을 옮겨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새벽부터 일어난 나네와 슈라가 작은 텃밭을 일구는 풍경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세상은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시대의 부처라는 자가 밭이나 갈고 있다니.
시선을 느낀 나네가 허리를 펴고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
나네의 미소를 눈에 담으며, 에이미는 어제 그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시로네를 이해하기 위해 시로네의 마음이 되어 보고자 하는 것은 납득이 갔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사랑이야?’
그렇게 자문하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왜 시로네를 사랑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네의 말대로, 그저 마음을 던지는 게 사랑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아, 됐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그보다 걱정인 것은, 어제 슈라에게 들은 천국의 군대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하비츠만으로도 벅찬데. 이루키가 고생 좀 하겠어.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사상 최악의 전쟁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이미는 조금 전과 다른 마음으로 나네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문신이 가득해서 흉악하지만 미소만큼은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나네가 아닌 하비츠에게 붙잡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가 시로네의 편이 되어 준다면…….’
무엇보다 나네는 천국의 군대를 지배하는 앙케 라의 꿈을 삼킨 자였다.
에이미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나네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흥!”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니, 아니지.’
그런 식으로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기에, 에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싸우는 수밖에 없어.’
아직 육체는 뛸 수도 없을 만큼 힘들지만 마법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오두막 문을 열고 나가자 슈라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일어섰다.
“게을러 터져서는. 빨리 와서 도와.”
“내가 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몰라? 굶기 싫으면 자갈이라도 고르란 말이야.”
하루 정도 안 먹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유치한 고집은 부리기 싫었다.
“나도 호미…….”
나네가 끼어들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하지 마. 밥값은 할 테니까.”
에이미가 뾰로통하고 볼을 부풀리는 모습에 나네가 눈웃음을 지었다.
“손님이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하고 싶은 일을 하시죠. 저기 숲에 들어가면 정신을 단련하기에 좋은 장소가 있어요.”
“괜찮다니까. 그리고 친한 척 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닭살 돋으니까.”
나네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가 보세요. 당신은 군인,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놓였는데 한가롭게 밭이나 갈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지겠죠. 몸에도 좋지 않습니다.”
사명을 떠올린 에이미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맞아.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밥을 주든 말든, 나는 수련하러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