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56
“희대의 살인마가 되기 전에, 위선자의 눈물 정도는 흘려도 되잖아요?”
아로미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이럴 수는 없어.’
총군사의 이성을 냉정하게 유지시키는 게 그녀의 임무지만, 솔직히 이건 너무 심했다.
“총군사님, 그렇게 힘드시면…….”
“아니요.”
이루키가 지시를 내렸다.
“전략의 번복은 없습니다. 마족들을 바슈카로 끌어들일 겁니다.”
미안하다, 시로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시로네는 할 수 없을 것이기에.
“토르미아의 마법협회장을 불러 주세요. 아, 그리고 ‘로프’의 관리자도.”
토르미아의 최고 기밀 암호화 시스템, 로프.
“루피스트…… 그리고 단테 말씀이십니까?”
“네.”
이루키의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발키리 총군사의 이름으로, 생화 프로젝트 ‘꽃밭’의 개방을 승인합니다.”
***
어둑한 밤.
홀로 수련에 매진하던 에이미가 오두막으로 들어오자 슈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발발거리면서 잘 돌아다니네. 이제 몸은 완전히 회복됐나 보지?”
“그럭저럭. 나네는?”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는데?”
나네는 친절했지만, 슈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까칠한 성격을 드러냈다.
이유는 짐작이 갔지만, 확실하지도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일 아침에 떠날 거야.”
슈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지금 어디에 있어?”
“……텃밭 뒤쪽 동산에.”
몸을 돌린 에이미가 문으로 걸어갔다.
“그래. 너도 그동안 고마웠어.”
“왜…….”
슈라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왜 싸우려는 거지?”
“무슨 의미야?”
“이제는 너도 알잖아. 옳은 것은 부처야. 그저 공이 전부인 세상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에이미가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했던 한 남자가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죽었어. 나를 살리기 위해.”
상병 베리크.
“죽으면 끝이잖아? 사랑이고 뭐고, 다시는 나하고 만날 수도 없는 거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죽음을 택했어.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에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끝내주게 멋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대.”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슈라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어. 하지만 결말이 똑같다고 과정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지. 그는 죽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슈라는 십로회의 수장, 베론의 유언을 떠올렸다.
-살아가라.
“그래서 싸우는 거야. 결국 공이라도, 설령 이 우주가 사라진다고 해도…….”
에이미가 문을 열었다.
“내 마지막은 너보다 아름다울 테니까.”
문이 닫히는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슈라의 귀에는 천둥이 치는 듯했다.
오두막을 벗어난 에이미는 익히 알고 있는 산길을 따라 동산을 올랐다.
나네가 풀을 입에 물고 앉아 있었다.
“……저랑 있는 게 그렇게 불편했나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친절에는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몸도 회복되었고, 할 일도 태산이니까.”
“바쁠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나네가 풍경의 저편을 가리켰다.
“보이십니까? 조금 전에 악의 기운이 사상 최대의 크기로 태동했습니다.”
에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안 보이는데?”
“저에게는 보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펼쳐질 지옥이.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겁니다. 죽는 것보다 괴로울 거예요.”
나네가 고개를 돌렸다.
“제가 끝내야 합니다.”
거짓말로 현혹시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에이미도 반박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생각해 봤어.”
에이미는 나네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를 사랑하겠다고 했지. 어때, 지금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정합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진정한 부처란 극단이 아니다.
“어디로 간다고 해도 결국 인간. 따라서 인간으로 되돌아와 전부를 초월한다.”
에이미를 눈에 담은 나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내가 너에게 간다면?”
나네의 입이 닫혔다.
“시로네가 아닌 너를 사랑하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어?”
그것으로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전쟁이 사라지고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에이미 씨의 사랑.’
엄청난 속도로 나네의 생각이 질주했다.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요.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이 세상도 지키고 싶어질 겁니다.’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고.
‘아아.’
우주의 진리를 파헤쳤을 때조차도 이토록 많은 번뇌에 사로잡히지는 않은 듯했다.
‘시로네.’
박애의 인생 속에 에이미를 포함시킬 수 있는 시로네가 처음으로 부러웠다.
“저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나네가 입을 열었다.
“중생의 구제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고통받는 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그래.”
에이미는 동병상련의 미소를 지었다.
시로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고, 나네가 타협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신념.
‘하지만 이제는 나도 마찬가지야.’
에이미가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 고마웠어.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하지만…… 관철시키기를 바랄게.”
“하하.”
나네가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네. 당신도. 꼭 관철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승자는 1명뿐이겠지만.
신의 뇌 (1)
오메가 187년.
이면 세계의 지옥에서 돌아온 거핀은 가이아인들을 규합, 광자계를 이탈할 준비를 했다.
“흥미로운 여행이 될 거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자들의 마음은 설렜다.
“광자계를 이탈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천 명의 가이아인이 운집한 곳에서 거핀이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앙케 라의 지배를 벗어나, 우리 모두가 이 세계의 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알고 있지만, 가이아인들은 높은 첨탑에 있는 거핀을 묵묵히 주목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논란도, 의심도 없습니다.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 따라서 앙케 라의 공겁에서 빠져나와 무한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지만, 가이아인에게 개체 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오늘은 다르지만.’
앙케 라의 권한을 파괴하고 광자계를 이탈하려면 개인 코드는 많을수록 좋았다.
거핀이 금속질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첨탑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되어 가는군.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
가이아인은 울티마로 통합되어 있지만 핵심 키워드는 역시나 거핀이었다.
“마법.”
현상의 이치.
이 세계의 진리를 깨달은 것과, 그 깨달음을 통해 현상을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
오직 무한의 마법사, 거핀만이 우주의 끝에서 마지막 자물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다.”
진리의 끝에서 완벽한 존재의 의미를 되찾은 가이아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거핀 아저씨!”
황금빛 강철 머리카락을 소용돌이처럼 말아 머리에 붙인 여자가 다가왔다.
“밀라?”
거핀이 이면 세계에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태어난 역사적인 아이였다.
“오랜만이구나.”
가이아인 특유의 날카로운 인상에서도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럼요. 이제 어엿한 숙녀인 걸요. 얼마나 오늘을 기다려 왔는지 몰라요.”
밀라의 얼굴이 살며시 붉어졌다.
“아저씨를 사랑하게 된 그날부터.”
“그래. 미안하구나.”
거핀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자 밀라가 혀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 세계를 떠나면 모든 게 새로 시작되는 거죠. 저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몰라요.”
“하하! 그랬으면 좋겠구나.”
거핀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밀라였으나 마음에는 상처가 남지 않았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음을 알고, 그것을 행한다.’
가이아인으로 태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거핀, 준비가 끝났다.”
장로의 말에 거핀이 제11감, 궁감을 열었다.
‘울티마.’
행성에 있는 모든 가이아인들이 궁감으로 거핀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거핀이 미소를 지으며 밀라를 돌아보자,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스피릿 존이 열리고, 무한의 영역을 통해 초광속으로 뻗어 나가는 그때.
펑!
밀라의 얼굴이 폭파되었다.
“…….”
목 아래로만 남아 있는 육체가 좌우로 비틀거리더니 쿵 하고 떨어지자, 거핀이 고개를 돌렸다.
“천사장.”
먼 하늘에서 이카엘이 광륜을 크게 확장시킨 상태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어찌하여 신이 주신 권위를 버리고 죽음을 자초하는가.”
거핀이 중얼거렸다.
“아타락시아.”
이 세계를 탄생시킨 개념.
‘바깥 세계에 가장 가까운 신호. 증폭의 범위는 가히 무에서 유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무한의 마법사인 거핀이라도 우주 최상위에 위치한 개념은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가이아 족장이 밀라의 상태를 살폈다.
“죽었다. 시폭의 감각보다 더 빨리 공격했어. 막아 낼 수 없었을 거야.”
“좋은 꿈이었기를.”
거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사장이여, 지금의 간섭을 앙케 라의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이카엘이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간섭이 아닌 율법이다. 나 이카엘, 대천사장은 율법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멸할 것이다.”
하늘 끝까지 아타락시아를 확장시킨 그녀가 지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기회다. 신의 뜻에 따르라.”
그녀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것만으로 땅이 밀리고 산이 갈라질 터였다.
“신이라고?”
거핀이 미소를 지었다.
“착각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