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6
클럼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참,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애 낳고 알콩달콩 살면 그만이지.”
“에리나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아니. 사실 그렇잖아. 출산은 끔찍한 고통과 공포인데 에리나가 참을 수 있을지. 육아 문제도 있고.”
클럼프는 긴 침음성을 내었다. 결국 열 살 지능의 여성이 산고와 육아를 감당할지의 문제였다.
“알페아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아.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그래, 알아. 후회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로 후회하지 않아. 난 에리나가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녀가 아니라면 어떤 영광도 의미가 없다고.”
클럼프는 연거푸 두 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자신도 답답한데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푸념이나 늘어놓는 건 너답지 않아. 똑똑한 놈이 왜 그래?”
알페아스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취기에 저항하는 지성의 빛이 찰나의 순간 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빛을 잃은 천재(4)
***
‘꽤 하는군.’
아케인은 어젯밤 자신의 던전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마법사의 던전에 재물을 노리고 찾아오는 자들이야 부지기수였으나 24시간 이상 버티고 있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뭐,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테지만.’
던전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고 직접 설계한 함정도 가득했다.
아케인은 잡념을 지우고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근래 그가 정진하는 분야는 암흑 마법이 인간의 기억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없이 논문을 써 내려가던 그가 갑자기 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빠른 속도로 기관 장치들이 해제되고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대어가 걸렸나?”
한번 틀어박히면 몇 년이나 두문불출하는 아케인에게 침입자는 좋은 오락거리였다. 게다가 오늘은 제법 뛰어난 놈이 미끼를 문 모양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리자 아케인은 시간부터 살폈다.
정확히 32시간 28분 5초. 침입자가 입구부터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대마법사…… 빌토르 아케인이십니까?”
피투성이의 사내였다. 준수하게 생겼고 눈은 총기로 빛나고 있었다.
“돈이나 탐할 놈으로는 보이지 않는구나. 누구냐?”
“미르히 알페아스라고 합니다. 만날 도리가 없어서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호오?”
아케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던전에 처박혀 있다고 바깥 정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채널을 통해 알페아스의 광양자설을 접한 그였다.
“빛의 마법사가 암흑 마법사를 찾아오다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군. 일단 앉게. 치료해 주지.”
아케인은 생체 유지 장치를 가동했다.
녹색 액체로 채워진 반구형의 장치에 들어간 알페아스는 물에 잠기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푸하! 하악!”
알페아스는 액체 속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질식하지 않고 잠이 들었을까?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돌리자 아케인이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
대륙을 어지럽힌 대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학구적인 풍모였다.
“치료 감사드립니다. 좋은 장치군요. 원리가 궁금한데요.”
“말 돌릴 것 없다. 그런다고 불청객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찾아온 이유를 말해 보거라.”
호기심과 흥미로 움직이는 대마법사라면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알페아스가 본론을 말했다.
“암흑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호오?”
마법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알페아스가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다니.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저에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적 능력이 떨어집니다. 소문에 듣기로 암흑 마법에 기억을 담는 연구를 하신다던데, 아내에게 제 기억을 주고 싶습니다.”
아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서로의 전공은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기억 조작에 관해서는 꽤나 연구를 했지. 하지만 자네가 요구하는 건 차원이 다르네. 인격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통째로 옮겨야 하는 작업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암흑 마법의 흡수성과 광자의 정보 전달 능력을 합친다면 가상의 지성을 구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케인은 턱을 괴었다.
“가상의 지성이라. 광자 마법으로 신경계를 구축하고 거기에 기억을 부여한다?”
확실히 참신한 발상이었다.
여태까지의 광자 마법은 시간 마법이라 부를 만큼 효용이 제한적이었지만 광양자설이 밝혀진 이상 앞으로는 정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리라는 게 아케인의 예상이었다.
“이론을 검토하기 전에 한 가지 의문인 점이 있네. 자네의 아내는 실험을 허락한 건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응할 것입니다.”
“사연이 있나 보구먼.”
알페아스는 이곳까지 온 경위를 털어놓았다.
아케인도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알페아스의 제안은 확실히 천재적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세.”
그로부터 하루 동안 두 사람은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론적인 토대에 합의하기에 이르자 아케인도 헛된 망상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
“좋네. 정말로 인생을 걸어 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하지. 하지만 가족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게야.”
대마법사의 제자라도 알페아스 또한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였다.
그가 용뢰에 취직이 보장되어 있는 미래를 내팽개치고 침침한 연구실로 들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알페아스는 다른 노선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에리나가 불행하다면 자신도 불행하다. 그는 에리나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가족과 들어오겠습니다.”
집에 도착한 알페아스는 에리나와 상담했다.
인생이 걸린 문제라 자리에는 클럼프도 참석해 있었다.
알페아스가 강조한 부분은 에리나의 지적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클럼프는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했다.
“알페아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쩌자고 그런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은 범죄자잖아!”
“마법사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진짜로 중요한 건 그가 대륙에서 암흑 마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거야. 인간의 기억과 뇌 구조에 대해서도 박식해. 학문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야.”
“아니, 손해야. 너는 지금 뭔가에 홀린 거야. 인간의 뇌에 기억을 심는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클럼프,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 나는 멍청해! 너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천재도 아니지! 하지만 이런 나라도 한 가지는 알아. 넌 지금 굴러들어 온 복을 차 버리는 거야. 그런 사람하고 어울리면 용뢰에 들어가는 것도 취소될 거야. 가문은 어쩌고? 너희 가문에서는 정말로 너를 버릴 거라고!”
알페아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으나 수없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상관없어. 그딴 것들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는 없으니까. 용뢰고 가문이고 다 필요 없어. 에리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 있어.”
알페아스의 마지막 말로 에리나의 선택은 이미 결정이 난 셈이었다.
남편이 웃을 수 있다면 에리나 또한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여보, 할게요.”
“제수씨! 이건 생각을 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할 거예요. 왜냐하면 남편을 믿으니까요. 알페아스는 저를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골드서클을 받은 마법사야. 그리고 내 스승은 대마법사라고. 우리가 손을 잡으면 당신의 약점 따위는 손쉽게 고쳐 버릴 수 있어.”
그날 이후로도 클럼프는 매일같이 찾아와 설득했으나 부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알페아스는 가산을 정리하고 에리나와 함께 아케인의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갑네. 빌토르 아케인이라고 하네.”
“안녕하세요. 남편이 신세를 졌습니다.”
알페아스의 스승 앞에서 에리나는 깍듯이 인사했으나 아케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이래 봬도 수십 년 동안 이 분야에 몰두한 나일세. 큰 결정을 한 게야. 성공만 하면 수많은 정신병을 고칠 수 있어. 자네의 남편 또한 용뢰에서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명성을 얻게 될 걸세.”
남편이 포기한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면 에리나도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알페아스는 던전에 상주하며 기억 전이 연구를 진행했다.
개인 던전을 운용할 만큼 아케인은 실험의 전문가였고, 합리적인 보살핌 속에 에리나도 별다른 불편함 없이 던전에서 지낼 수 있었다.
“여어, 제수씨. 좀 어떠세요?”
클럼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음식을 챙겨 가지고 왔다.
실험에 바쁜 두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리나까지 쓴 음식을 먹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괜찮아요. 조만간 실험이 끝난대요. 그러면 남편도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클럼프는 호탕하게 웃었다.
2년 동안 이런저런 검사를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참으로 잘 참아 주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지능이 좀 떨어지면 어떤가? 남편을 위해 감내하는 그녀의 마음은 결코 저급한 게 아니었다.
클럼프가 왔다는 기별을 받은 알페아스가 방으로 찾아왔다.
에리나의 말대로 박차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인지 전보다 얼굴이 더 야위어 있었다.
“왔냐? 매번 고맙다.”
“실험은 어때? 진척이 있어?”
“거의 완성했어. 임상 실험까지 성공했지. 다음 달이면 에리나도 지긋지긋한 괄시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거야.”
“다음 달? 그렇게 빨라?”
“무슨 소리야? 자그마치 2년이야. 스승님과 날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연구했다고. 어쨌든 그날은 너도 와야 돼. 그때는 음식 말고 술이나 왕창 가져오라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인고의 시간은 모두에게 길었지만 막상 닥친 순간만큼은 갑작스러운 기분이었다.
아케인과 알페아스가 최종 점검을 하는 사이 에리나는 실험대에 누워 기다렸다. 클럼프가 긴장하지 않도록 그녀의 곁에서 말을 걸어 주었다.
“제수씨, 기분이 어때요? 오늘이 지나면 제수씨는 알페아스의 기억을 갖게 되는 겁니다.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싼 기억까지도요. 혹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는 않았는지 잘 떠올려 보세요, 하하하!”
에리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은 그런 날이었고, 실험 장치도 문제없다는 판정이 떨어졌다.
“그럼 시작할게, 에리나.”
알페아스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기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도, 수치스러운 기억도, 그녀라면 상관없었다.
“여보, 고마워요.”
“무슨 소리야. 내가 고맙지. 정말 잘 견뎌 줬어. 우리 행복하게 살자. 아이도 낳고.”
알페아스는 자신의 미소가 어색하지 않은지 걱정스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긴장감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알페아스, 이쪽으로.”
또 다른 실험대에 알페아스가 눕자 아케인이 머리에 기계장치를 달았다.
마도 공학, 마도 생물학, 연금술, 광자학, 인체 생물학 등 모든 분야의 보고가 총집결된 실험이었다.
“시작하겠네. 긴장 풀고. 금방 끝날 게야.”
아케인이 장치를 가동하자 구석에 있는 클럼프가 초조하게 손을 비볐다.
철컹 소리를 내며 기관 장치가 내려갔다. 수십 개에 달하는 세부 기관이 기계음을 내며 움직이자 크리스털 빛이 풍광을 어지럽혔다.
암흑 마법이 머릿속으로 침투하자 알페아스는 눈을 감고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원리는 단순했다. 알페아스의 기억을 암흑 마법이 흡수한 다음 광자 출력으로 전송하여 에리나의 기억에 덮어씌우면 끝나는 것이다.
“헉!”
에리나의 눈이 크게 뜨이고, 막대한 정보량이 들어오면서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알페아스가 가진 생애 최초의 기억부터 조금 전 대화를 나눈 기억까지, 그를 이루는 모든 시간들이 빛의속도로 전송되고 있었다.
알페아스와 하나가 되는 기분에 에리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고민, 결혼의 기대감, 신혼의 행복감. 어떤 편견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그의 마음이 통째로 전해지고 있었다.
‘여보, 고마워요. 사랑해요.’
에리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후회는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분에 넘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총천연색의 빛이 사라지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났다.
아케인은 계기판을 확인했다.
전송률 100퍼센트. 모든 기억이 완벽하게 전달된 것이다.
“여보! 여보!”
머리의 장치를 뜯은 알페아스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며 에리나를 살폈다.
파리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빛을 잃은 천재(5)
“스승님! 어떻게 됐죠? 실험은 성공한 건가요?”
아케인이 미소 지었다.
“그래, 성공했어. 우리의 마법은 완벽하게 실현되었네.”
알페아스는 기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에리나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왜 이러죠? 여보! 정신 좀 차려 봐!”
계기판을 돌아본 아케인은 충격을 받았다.
모든 항목이 정상이었지만 전체적인 신체 리듬이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생명이 꺼져 가는 듯했다.
“이, 이게 어째서? 분명 임상 실험에서는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여보! 에리나! 눈 좀 떠 봐!”
반쯤 눈꺼풀을 올린 에리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여보…… 저는 괜찮아요.”
“에리나! 어떻게 된 거야?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단말 신경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어요. 물리적인 전이는 완벽했지만, 인간의 뇌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봐요. 하지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예요. 조금만 더 연구하면…… 허억!”
에리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경련했다.
“여보! 말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줄 테니까……!”
알페아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지적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남편이 알고 있는 건 자신도 알고 있기에, 에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여보…… 손을 잡아 줘요.”
알페아스는 아내의 손을 움켜쥐었다.
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면 시도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