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63
“늦는군.”
마법협회 비서실장 플루가 시간을 확인했다.
“인수인계 절차가 오래 걸리나 봅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깊은 터널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단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피스트와 플루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차분하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국가정보원 제2차장, 단테입니다.”
코드 블랙.
토르미아 왕국에서 블랙을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왕족 외에 단테가 유일했다.
“그래. 구면이지?”
왕성 주관 파티에서 안면을 익힌 적은 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네.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보안이 중요한 직업이라.”
마법협회장과 짧은 대화라도 나누는 즉시 수많은 루머가 양산될 터였다.
“아니. 그보다 전에 말이야.”
레드 라인이 주관하는 졸업 시험을 앞두고 5대 명문 학생들이 마법협회에 모인 적이 있었다.
“아, 네.”
뜬금없이 학창 시절을 가리키는 뉘앙스에 단테가 어리둥절하게 답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는 특히 기억에 남지. 그 학생들이 어느덧 프로가 돼서 열심히 싸워 주는군.”
‘이런 성격이었나?’
단테는 진짜 의도를 파악했다.
‘이루키.’
인류 최강의 마법사인 시로네도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루키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마법협회장과 코드 블랙. 총군사가 우리를 소집한 이유는 짐작이 가지. 왕국에 좋은 일은 아닐 거야.”
아는 사실이 있으면 미리 털어놓는 게 좋을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단테는 말이 없었다.
보안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 침묵보다 완벽한 건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흠.”
철문이 열리면서 안내인이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지하 벙커로 가는 동안 플루가 루피스트를 사이에 두고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마법협회 비서실장, 플루예요. 시로네의 친구죠? 저하고도 절친한 사이예요.”
“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호호, 그래요? 그나저나 국정원도 정신이 없죠? 시온의 수도사들이 토르미아에 있다고 들었는데.”
코드 블랙이었다.
‘그래도 궁합이 잘 맞는 콤비군.’
돌려서 말할 줄 아는 플루는 차가운 성격의 루피스트에게 필요한 인재였다.
결국 이번에도 단테가 침묵하면서, 세 사람은 대화 없이 벙커의 끝에 도착했다.
“들어가십시오.”
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있는 이루키가 실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이루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혈색이 더 안 좋아졌어.’
루피스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토르미아 마법협회장 라파엘 루피스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루와 단테까지 인사가 끝나자 이루키가 자리를 권하며 아로미에게 말했다.
“차는 됐어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신호였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죠. 인류 중대사입니다. 토르미아 왕국의 협조가 필요해요.”
이루키는 비밀리에 치러지는 전략을 설명했다.
“바슈카를……?”
원소 폭탄으로 날려 버린다는 계획.
“현재 수도의 인구가 얼마나 되죠?”
창백한 얼굴로 침을 삼키던 플루가 황급히 정신을 다잡고 기억을 꺼냈다.
“대략 650만 정도입니다. 전쟁 중이라 유동 인구가 널뛰지만, 평균치에 근접할 거예요.”
“650만이라.”
그 모든 생명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이 작전은 보안이 핵심이에요. 적들을 수도까지 유인하여 한 번에 섬멸할 겁니다.”
전략 자체에 이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왕국의 수도가 날아간다는 건 충격이었다.
“우선 여기 오신 세 분은 살 수 있습니다. 알고도 죽으라는 건 심각한 인적 손해니까요.”
세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판단을 맡기고 싶은 겁니다. 밤새도록 계산한 결과, 보안을 유지하면서 이 계획에서 빼낼 수 있는 인원의 한계치는…….”
이루키가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100명.”
650만 명 중에 100명.
“바슈카에서 반드시 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런 자들 100명을 추려 주세요. 물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비판도 하지 않겠습니다. 가족도 좋고, 사회에 필요한 인물도 좋아요. 지금 명단을 작성해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루피스트는 이루키가 내민 백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거였군.’
수도를 날려 버릴 전략을 세워 놓고도 왕족을 부르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차가운 세계 (2)
인류의 존멸을 걸고 행하는 마지막 작전 앞에서는 왕의 이름값도 중요하지 않았다.
‘꽃밭을 개방하기 위해 필요한 실무자는 나와 플루, 단테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얻은 100명의 선택권.
“제가 드릴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입니다. 그 안에 100명을 뽑아 주세요.”
많은 생각이 스쳤다.
국왕, 정치인, 의사, 교사, 가족들, 사회에서 소외당하며 살았던 빈민층.
‘…….’
결국 같은 무게였다.
“협회장님이 먼저 시작해 주시죠.”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자 이루키가 펜을 내려놓고 앞으로 내밀었다.
“발키리의 총군사.”
상체를 젖힌 루피스트가 다리를 꼬았다.
“하늘 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리지만, 사람을 우습게 봤군요.”
이루키는 담담했다.
“무슨 뜻이죠?”
“저까지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판단은 이 친구에게 맡기도록 하죠.”
루피스트가 단테를 가리키자 플루와 이루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단테가 시선을 들더니 말했다.
“이루키,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좋아. 협회장님의 지시가 떨어졌으니, 내가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말과는 달리 단테는 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두 팔을 벌렸다.
“없어, 살려야 될 사람은.”
비로소 이루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도에 폭탄을 떨어뜨린다. 650만 명이 죽는 대학살이 될 거야. 내가 100명을 살린다면, 그 정보는 천 명에게 전해지고, 그 천 명이 다시 만 명으로…….”
작전은 실패한다.
“통제 불가능한 영역으로 치닫겠지. 우리가 수도를 파괴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 그걸 시험하고 있었던 거지?”
다 죽어야 한다.
소중한 사람도, 필요한 사람도, 바슈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맞아. 미안하다.”
단테가 콧방귀를 뀌었다.
“너 같은 외곬이 이런 유치한 수작이라니. 너도 어지간히 코너에 몰렸나 보군.”
“사실을 말하면 그래. 나는 이 미친 대학살의 주동자가 될 거니까. 기왕 역사에 악마로 남을 거라면, 적어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
이루키가 무엇을 짊어졌는지 알기에 단테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로 보안에 문제는 없는 거야?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라면 우리만 아는 건 아닐 텐데.”
“위태로운 수준이야.”
이루키는 순순히 시인했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다 죽는 건 아니야. 이번 프로젝트에 거금을 투자한 재벌, 관계 기관 책임자의 목숨은 보장되어 있어. 적어도 대상자의 자식까지는 구제할 거야.”
“자식이라. 애매하군. 남편의 입장이라면, 아내와 자식은 구해도 부모는 못 구하잖아?”
“욕심을 낼 정도로 바보들이 아니야. 그럴 경우 어떻게 되는지는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될 터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암살 부대를 조직했지만 아직 움직인 적은 없어.”
이루키가 검지를 들었다.
“오히려 특별히 감시해야 할 쪽은 미혼자들이었어. 애인을 살리기 위해 급하게 결혼한 사람도 있지만, 성전도 거기까지는 용인해 주었다.”
루피스트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연루된 자들의 숫자는?”
“286명.”
단테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286명이라.”
보안과 정보의 전문가로서 판단하기에,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수치였다.
이루키가 말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그래서 우리도 자체적으로 수많은 채널을 통해 주시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세계 최고의 검열 시스템이라고 자부해.”
‘메이레이군.’
단테는 아르민을 통해 대정화기의 귀가 성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4시간 감시하고 있지. 그리고 여태까지 성전의 필터에 걸린 건수는…….”
이루키가 씁쓸하게 웃었다.
“단 한 건도 없었어.”
“한 건도?”
“그래. 심지어 코드 제로, 즉 강박적 의심 레벨의 요인조차 찾아내지 못했어. 따라서 성전의 입장에서는, 생존 대상자 286명 중에 어느 누구도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크크. 크크크.”
루피스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군.”
평소에는 사소한 비밀 하나라도 떠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면서.
‘650만 명이 학살되는 끔찍한 사건을 앞두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부모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인간이여.’
입가를 찢고 있는 루피스트의 표정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좋습니다.”
거짓말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우리도 그들과 다른 입장은 아니니까요. 결론은 650만 명이 죽는다. 문제는 희생 대비 효율인데, 마족은 확실히 섬멸할 수 있는 겁니까?”
“제 계산으로는 전략이 통했을 경우 지옥의 군대는 91.3퍼센트의 병력 손실을 입게 될 겁니다.”
충분한 성과였다.
“좋습니다. 그럼 바슈카는 버리는 것으로 하고, 왕이야 새로 뽑으면 그만입니다만…….”
루피스트에게는 왕조차 국가라는 시스템을 돌리기 위한 최고급 부속품일 뿐이었다.
“전쟁 후 토르미아의 손실은 어떻게 메울 겁니까? 수도가 날아간 이상 자력 회생은 불가능할 텐데요.”
순식간에 타국에 먹혀 버릴 것이다.
“복구에 들어가는 비용은 성전이 전액 부담하겠습니다. 정부가 세워지면 이민자 정책을 펴세요. 집과 토지를 제공하면 많은 자들이 몰릴 것입니다.”
루피스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꿈같은 소리군요. 성전이라고 해도 결국 타국에서 자금을 걷어야 할 텐데, 각국의 수장들이 순순히 따를 것이라 보십니까?”
“거기에 더해서, 원소 폭탄에 관한 모든 기술과 자료를 토르미아에 넘기겠습니다.”
루피스트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연계 산업이라도 원천 기술은 저만 알고 있습니다. 타국을 견제해도 좋고, 협상 카드로 사용해도 되겠죠. 무엇보다 제가 토르미아 왕국 출신입니다. 내 나라가 망하도록 놔두지는 않아요.”
마지막 말이 루피스트를 움직였다.
‘하긴, 650만에는 이루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다.’
미친놈이 아니라면 죽기 전까지 영혼이라도 팔아서 책임을 질 터였다.
“좋습니다. 성전의 뜻에 따르죠. 세부 전략이 하달되면 꽃밭의 이용 권한을 전부 넘기겠습니다.”
이루키가 단테에게 고개를 돌렸다.
“입으로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요. ‘로프’를 통해서 하달하겠습니다. 단테가 총책임자니 가장 안전한 수단이죠.”
루피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플루와 단테가 뒤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단테가 돌아섰다.
“만약 우리가 100명을 적어서 제출했다면 어떻게 되지?”
“……살아서 나갈 수 없었겠지.”
“한마디로 상당히 얕보고 있었다는 거네.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해?”
이루키는 능구렁이처럼 대답을 회피했다.
“어쨌든 안 적었잖아.”
단테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바슈카의 끔찍한 미래를 듣고도 웃을 수 있는 자신이 정신병자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비현실적이지만.
‘이루키 너에게는 현실이겠지.’
단테가 바라보는 이루키의 얼굴은 이미 살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재수 없는 놈이었는데.’
왕립 마법학교 시절부터 신경에 거슬리던 놈이 지금은 반쯤 시체가 되어 있었다.
“몸 좀 챙겨라. 그러다가 너 진짜 죽어.”
예스라고 답할 수 없는 말에, 이루키는 그저 힘없이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