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65
‘일단 싸워야 할 거 아냐. 최적의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
싸우는 이유를 알아줘서 기분이 좋았다.
“하아.”
루피스트가 스피릿 존을 해제하자 잠시 후 단테도 살의를 거두었다.
“좋아, 대화로 해결하지. 너희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럼 된 건가?”
“아뇨. 확실한 보장이 필요합니다.”
루피스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는 그때, 숲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목소리가 들린 곳을 살핀 루피스트와 단테의 동공이 잔상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빠르다.’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속도만으로도 경계심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프로테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은…….”
인간보다 귀가 뾰족하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은 샘처럼 맑고 깨끗한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해맑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자 루피스트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에녹스.”
성전 이군왕 중의 1명인 요정족의 대표였다.
“네. 총군사님이 가 보라고 해서 왔어요. 아마도 제가 가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던데.”
단테의 눈이 퀭해졌다.
‘이럴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주든가.’
포르테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리자 남은 화족들이 그녀를 따라 예를 올렸다.
“숲의 주인이시여.”
“오랜만이에요. 역시 화족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네요.”
에녹스가 검지를 들고 말했다.
“어쨌든 전쟁은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엘프들이 나서서 화족을 지킬 테니까.”
“……엘프도 참전한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어찌하여 인간을 위하십니까? 저들은 우리가 소중히 가꾼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거예요.”
에녹스가 프로테아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인간은 짜릿하거든요.”
그날 밤.
토르미아의 왕성.
아돌프 국왕이 병가를 내고 누워 있는 상황에서 루피스트와 플루는 왕족의 만찬에 참석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 출신인 포니가 참석한 가운데, 이런저런 잡담이 오갔다.
“세계정세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어. 타국에 투자했다가 망해 버린 놈들도 부지기수라고.”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인 지금도, 왕족들은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가장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루피스트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런 게 필요해, 시스템에는.’
현실하고는 완전히 괴리된 곳에서 오직 이상만을 부르짖는 부속품이.
“그나저나 이번 비서실장은 상당히 귀엽군. 저번 여자는 사나워서 별로였는데 말이야.”
플루가 눈웃음을 지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토스한 분위기를 틈타서 루피스트가 어려운 요청을 꺼냈다.
“마족들이 토르미아를 침공할 것입니다. 왕성 수비대를 움직이고 싶은데요.”
“왕성 수비대를?”
왕족에게는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는 군사였기에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에게는 꽃밭이 있으니까요. 지원 임무를 할 병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차피 다 죽는다.
기왕 전멸할 거라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하고 싶은 루피스트였다.
“하긴, 꽃밭이 있으면 안전하지. 토르미아는 세계 최강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것을 이뤄 낸 사람이 루피스트였다.
“그건 그렇고…….”
눈썹이 짙은 왕족이 포크로 루피스트와 플루를 번갈아 가리켰다.
“어떤가, 잠자리 궁합은? 그 왜, 예전에도 그런 소문 있었잖아. 자네가 비서실장 킬러라던데. 푸하하하!”
왕족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소문의 진위를 떠나서, 그들은 마법협회장과 비서실장의 반응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딱히…….”
루피스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재미는 없는 편입니다. 오히려 예전 비서실장이 훨씬 괜찮았죠.”
“오호? 그런가? 하긴, 플루 양은 너무 말랐어. 이거 먹고 살 좀 찌우라고.”
플루가 볼을 부풀렸다.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요. 협회장 취향이 이상한 거죠. 확인시켜 드릴 수도 없고.”
“없기는 왜 없어? 나에게 한번 맡겨 봐. 내 정력은 세계에서 알아주니까.”
“꺅! 그건 좀 무서운데요.”
왕족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가운데 오직 포니만이 웃지 않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마법학교에 다녔기에 알고 있다.
웃음을 위장하고 있는 두 마법사의 눈에 담긴 시리도록 차가운 감정을.
‘프로 마법사. 하지만 왕족의 비위를 맞출 정도로 정치적이지는 않아. 그리고 왕성 수비대.’
포니의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차가운 세계 (4)
***
왕족과의 만찬이 끝나고 왕성을 나선 루피스트와 플루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말, 말, 말.
온갖 말들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해야 했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미안하군.”
플루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가요?”
“그냥.”
설명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왕족들의 음담패설을 다시 입에 담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협회장님.”
한숨을 내쉰 플루가 고개를 돌렸다.
“요즘 너무 감상적이 되신 거 아니에요? 거사를 앞두고 있다는 건 알지만…….”
“감상적?”
내가?
“특별한 의미는 없어. 네가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기에 나름의 호의를 베푼 거야.”
“그럼 더 기분 나쁘네요.”
플루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제가 아닌 전 비서실장이 같은 일을 당했어도 사과를 하셨을 건가요?”
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
미안하다는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콤비였으니까.’
실례를 깨달은 루피스트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차갑게 물었다.
“앞으로 진행 상황은?”
플루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왕족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왕성 수비군 20만을 추가로 운용할 수 있어요. 드럼 라인을 선두에 배치시키면, 마족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겁니다.”
“개전 예상 시간은?”
“단테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16시간 남았습니다. 그 안에 모든 편제를 끝마쳐야 해요.”
“사령부에 전달하겠다. 다른 사안은?”
플루가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마도, 포니 씨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우리와 같은 웃음이었어요.”
루피스트도 알고 있었다.
“다른 왕족과는 성향이 다르지. 마법학교 출신이고, 사회 경험도 제법 있지 않나?”
세계 미인 대회에 출전한 것도 사회 경험이라고 치면.
“어떡할까요?”
짧지만 섬뜩한 물음이었다.
‘만약 낌새를 챘다면…….’
다른 왕족에게 발설할 경우 전략이 무산되기에, 제거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생각은?”
“하는 게 좋겠죠. 마법사로서 뛰어난 인재지만 확률에 기댈 사안이 아닙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내가 사람을 보내지.”
똑똑하지만 마법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니, 어쌔신보다는 히트맨이 나을 것이다.
“네. 그럼 다음은…….”
플루가 다음 안건을 제시하려는 그때, 길목에서 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걸음이 우뚝 멈췄으나 표정은 기계처럼 변화가 없었다.
“마법협회로 가시는 길인가요?”
왕족에게 예의를 갖춘 루피스트가 물었다.
“포니 아가씨, 여기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루피스트와 플루를 번갈아 바라보던 포니가 결심한 듯 상체를 숙였다.
“살려 주십시오.”
왕족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국가적인 쇼크였으나, 루피스트는 여전히 침착했다.
“살려 달라뇨? 무슨 일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포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가지 않기 때문에, 살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확실히 똑똑하군.’
위험에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권력을 포기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왕은 허상이지만…….’
최단시간에 국가를 결집시킬 수 있는 핵심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괜찮겠지.’
꼭두각시 왕을 앞세워 재건하는 것도.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습니까?”
이미 결심을 굳혔으나, 포니는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장고했다.
“전부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왕을 계승하기 위해 포니는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었다.
‘심적 살인.’
마족들이 판을 치는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광기는 있어야 얘기가 된다.
“따로 기별 드리죠.”
루피스트가 포니를 지나치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왕성 막사에서 짐을 꾸리는 다리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개 같은 왕족들. 왕성 수비대, 그것도 군악대를 전방에 배치시킨다고?’
동료들도 심정은 비슷했다.
“정말 이상하군.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우리를 부른다는 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원 집합!”
대대장의 호령에, 투덜거리던 병사들이 북을 챙겨 들고 연병장으로 달렸다.
“잘 들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4시간 동안 급속 행군하여 데난 평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지옥의 군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질문 있습니다! 어째서 왕성 수비대가 출동하죠? 군악대는 사단마다 배치되어 있는데요.”
“토르미아 예하에 편제되어 있는 전 군악대가 데난 평야에 집결할 것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군악대 전체라고?”
어림잡아도 3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 또한 출전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옥의 군대를 유인하는 즉시 우리는 빠지고, 보병이 투입될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으나, 최전선이라는 위험성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사망 확률은 대략 5퍼센트 정도 되려나? 그럼 3천 명 중에서 150명이 죽는 거니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막사로 돌아가서 짐을 꾸리도록. 20분 뒤에 이곳에 다시 집결한다! 해산!”
병사들이 빠르게 복귀하고, 다리스도 심란한 마음으로 군장을 챙겼다.
“다리스.”
입구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서자 왕성 시녀 하네아가 서 있었다.
“어? 네가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