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66
처음에는 소꿉친구였다.
고백은 다리스가 먼저 했고, 하네아는 하루를 생각한 끝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사병에 걸릴 만큼 마음고생을 했던 터라 동료들도 그녀의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분대장이 다리스의 어깨를 짚었다.
“갔다 와라. 군장은 내가 챙겨 놓을게.”
온갖 고마운 감정을 나중으로 미룬 채, 다리스는 하네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지금 근무시간이잖아.”
“얘기 들었어. 출전한다며?”
왕성 시녀라면 소식에는 빠삭했다.
“아하하! 어쩌다 재수 없게……. 아니,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 뭐.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기다릴게.”
“응?”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 다리스를 흘겨보며 하네아가 살며시 뺨을 붉혔다.
“그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 네 말이 맞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니까 그 말은…… 너랑 나랑…….”
하네아의 얼굴이 살며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빨리 돌아와. 괜히 앞에서 나서지 말고, 살 수 있으면 뭐든지 하란 말이야.”
“…….”
다리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끝내고 막사로 돌아오자, 모든 동료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때? 얘기는 잘…….”
생기로 이글거리는 다리스의 눈빛을 본 순간 모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야.”
반드시.
***
4시간의 급속 행군을 끝마친 왕성 군악대는 다른 군악대와 합류했다.
광활한 데난 평야에 3천 명에 이르는 드럼 라인이 형성되고, 하늘은 고요했다.
다리스는 스틱을 잡고 있는 두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침착해. 아무것도 아니야. 1시간 정도 드럼 치다가, 그냥 내빼면 되는 거라고.’
군악대장이 깃발을 들었다.
“전원!”
드럼에 스틱을 대는 소리가 착착 일사불란하게 이어지고.
“행진!”
두두두두두두두두!
가장 빠른 비트의 드럼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평야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선두의 드럼 라인이 1킬로미터를 움직이자 비로소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생명 줄과의 거리는 1킬로미터.’
마족을 유인했을 때 위치가 역전되려면 최소 500미터는 미친 듯이 달려야 할 것이다.
30분이 지나자 손에 쥐가 날 정도로 드럼을 두드려 댄 결과가 나타났다.
지평선 너머로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울긋불긋한 피부를 가진 마족들.
‘뭐가 저렇게 많아?’
데난 평야의 지평선을 전부 메우고도 남았다.
‘저건 못 이겨! 도망쳐야 돼!’
심정은 모두 같겠지만, 군악대장의 후퇴 깃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쿠쿠쿠쿠쿠쿠쿠!
지진에 맞먹는 떨림이 발바닥에 전해지자 옆의 동료들이 눈물을 쏟아 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다리스도 지지 않고 악을 질렀다.
“염병! 빨리 후퇴해! 지금 가야 된다고!”
3천 명의 살기가 군악대장에게 집중되는 순간, 후퇴 깃발이 흔들렸다.
“제기랄!”
목에 두른 띠를 벗고 드럼을 던져 버린 다리스는 저 멀리 보병을 향해 뛰었다.
생사를 가르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크하하하! 쏴라! 쏴!”
마족들의 무리에서 척추뼈처럼 생긴 화살이 하늘로 날아올라 비처럼 쏟아졌다.
거리는 여전히 멀었으나, 강궁에 실린 몇몇 화살들이 군악대의 몸을 관통했다.
“크악!”
좌우에서 쓰러지는 동료들을 확인한 다리스는 이를 악물고 허벅지를 당겼다.
‘살 수 있어! 나는 살 수 있다!’
군악대장의 판단이 좋았는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희생자가 적었다.
‘5퍼센트, 아니 3퍼센트다. 그 안에는 절대로 안 들어가! 못 들어가!’
하네아가 기다리고 있다.
‘결혼하자. 같이 휴가도 가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도 먹자! 그래! 야한 것도 많이 할 거야!’
보병들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어어어엉! 어어어엉!”
그 순간.
“컥!”
굵은 뼈로 만든 화살이 다리스의 목뒤를 정확히 관통하고 빠져나왔다.
앞으로 고꾸라진 다리스가 땅에 박힌 화살의 몸을 더듬으며 발버둥 쳤다.
“컥! 컥!”
쇼크를 받은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을 때, 뒤를 돌아본 분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살, 살려…… 살려 주세…….”
손을 내미는 순간 분대장의 동공은 잠시 흔들렸으나.
“제발…….”
이내 시선 밖으로 다리스를 몰아내며 정면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아, 안 돼……!”
신은 무심하다.
‘왜 나야!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어째서 나야! 하네아가, 하네아가 나한테 말했는데!’
신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청년을 벌하겠는가.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누가 좀…….’
단지 화살은 쏘아졌고, 세계의 관성을 따라 날아온 곳에 그가 있었을 뿐이다.
‘죽을 수 없어! 이렇게 끝날 수는 없는 거야!’
더 빨리 달리지 못했을 뿐이다.
“으아아아!”
온 힘을 다해 화살을 빼 보려고 하지만, 돌기에 박힌 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 하네아.”
차가운 세계.
“보고 싶……!”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지옥의 군대가 진격하면서, 다리스의 육체를 죽이 될 때까지 짓밟았다.
“크하하하! 죽여라! 인간을 죽여!”
뇌의 마지막 한 조각이 부서지기 직전, 다리스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직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걸 포기하고 하네아와 떠났더라면.
‘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받아서? 죽을 확률이 5퍼센트밖에 되지 않아서?’
무엇을 원하든, 무엇을 바라든, 율법의 수레바퀴는 기계처럼 돌아갈 뿐.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할 기회.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다리스는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너 자신을 구원하라.
“…….”
뇌가 일으킨 환청인지 신의 전언인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간절함의 척도 (1)
오메가 666년.
“너 자신을 구원하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비를 바라보며 거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말소 코드.
앙케 라가 제2차 리셋에 실패한 이후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단이었다.
“소정화.”
검은 비는 닿는 모든 것을 녹이며 지상의 풍경을 지워 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서지 않을 생각인가?”
거핀이 숨어 있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아르고네스가 물었다.
“아니면 나설 수 없는 것인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여태까지 없는 취급했던 거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태성이 올 줄 알았는데?”
아르고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다시피…….”
지평선 위로 솟아 있는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상태일지는 짐작이 갔다.
“여기도 안전하지는 않아. 도망칠 곳은 없다. 지상의 모든 생물이 소멸하겠지. 책임감을 느끼나?”
가이아인은 울티마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너무 심했어. 앙케 라조차 과부화가 걸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보아라. 그 결과가 이것이다.”
소정화.
“앙케 라는 파계를 감수하고 개체 수를 줄이기로 선택했다. 울티마는 약화되고, 너희들은 승리할 수 없어.”
“이상하지 않아?”
거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이아인이 정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시절, 많은 일들이 있었지. 동족을 죽이거나, 약자를 차별하거나.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불렀다.”
통합적 정신 체계를 이룩한 가이아인에게도 갈등과 반목의 시기는 있었다.
“하지만 앙케 라는 가이아인 전체를 악으로 정의했어. 살인보다, 그 어떤 범죄보다 광자계를 이탈하는 게 더 큰 악이라는 뜻이겠지.”
아르고네스가 말했다.
“우리의 사명은 시스템의 완벽함이다. 살인도, 광자계의 이탈도, 넓은 범위에서 보면 세계를 혼란시킨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아. 물론 광자계의 이탈이 훨씬 위험하다.”
“그렇겠지.”
신은 무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신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다면, 이 세상은 온통 지옥일 테니까.”
“받아들여.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신호야. 그렇기에 이면 세계가 존재하는 거지.”
지옥으로 흘러든 강력한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시스템은 안정된다.
“시간도 마찬가지. 매초의 0.666초가 없다면 광자 신호는 안정되지 않아. 개체가 느끼는 상대성에 따라 절대 시간이 파괴되어 버린다고.”
“그래. 모든 건 마음의 문제지.”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 세계는.”
너무나 차갑다.
“태성이 얼마나 아플지는 짐작이 가지만, 당신은 어때? 모든 생물이 사라지는 기분이.”
모든 물질들이 흘러내려 세상에는 거대하고도 시커먼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프지.”
아르고네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들이 초래한 일이야. 앙케 라는 공겁의 시스템을 통해 영생을 주려고 했어.”
“영생이라.”
아르고네스가 만든 창조물 중에는 수명이 없는 생물도 존재하지만, 진정한 영생은 아니었다.
“수명이란 개념을 없애는 건 쉬운 일이지. 실제로 너도 그렇고. 하지만 결국 죽으면 끝이다. 1억 년을 살아도, 죽는 순간에는 모든 과정이 찰나야. 진정한 영생이란 생사의 굴레를 초월하는 것.”
공겁의 시스템이라면 가능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저항을 포기하고 앙케 라의 뜻에 복종해라. 다음 세계로 들어가.”
가이아인이 공겁을 차단하면 언젠가는 상위의 모든 우주가 소멸할 것이다.
거핀이 말했다.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또 꿈을 꾸지. 그렇게 끝없이 꿈을 꾸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최초의 세계는 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거야. 태양이 뜨고 피곤이 풀리면, 결국 잠에서 깨어나는 거라고.”
아르고네스가 반론했다.
“하지만 절대로 깨어나지 않아. 주체의 의식은 계속 꿈속으로 파고들고 있으니까.”
시간과 정신이 만든 거대한 모순.
“잘 생각해라, 거핀. 유일하고 불가역적인 하나의 착각에서 시작된 세계다. 네가 공겁을 막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거야. 다시 아무것도 없게 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지 모르겠나?”
무한의 마법사라도, 무한무의 상태를 생각하면 섬뜩한 전율이 치밀었다.
“……부탁이 있어.”
아르고네스는 돕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거핀의 부탁이라는 것에는 흥미가 있었다.
“뭐지?”
“살려 줘.”
아르고네스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물론 나는 싸울 거야. 하지만 당신도 이대로 세상이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잖아?”
“그래서?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거냐?”
“2명만…….”
거핀이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2명만 소정화를 피할 수 있게 해 줘. 아무리 미워도, 당신이 만든 걸작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