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74
“거핀은 전쟁을 원하지 않소.”
가이아인이 동시에 말했다.
“따라서 우리도 싸우지 않을 것이오. 최후의 최후까지 거핀의 의지를 지킬 겁니다.”
이카엘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아시겠소?”
가이아인의 목소리가 폭격의 소음을 뚫고 성광체에 직격으로 꽂혔다.
“앙케 라는 신이 아니야! 어떤 신이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한단 말인가! 거핀은 스스로를 희생해 직접 너희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이카엘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지고, 앙다문 이빨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만.”
천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찮은 인간들이여! 너희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음이다!”
이카엘은 빛의 눈물을 흘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율법 그 자체, 아카식 레코드의 화신인 앙케 라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사티엘.’
비로소 그녀만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거핀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은 소리에 마음을 실을 수 있게 되었어.
마음.
‘나의 마음. 모든 마음을 담아 외치면…….’
누군가에게 이어질까?
사상 최대의 크기로 확장된 아타락시아를 향해 그녀는 몸을 던졌다.
아타락시아-육탄계.
성광체가 헤일로를 지나가는 순간, 엄청난 감정의 폭풍이 밀려들었다.
“흐으으으으!”
정신이 폭발할 듯한 고양감.
순수한 감동에 빛의 눈물을 흘린 이카엘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토해 냈다.
“그마아아아안!”
세상이 흔들리고.
천사들의 성광체가 파동의 방향으로 밀려나더니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
정신이 깔끔하게 씻겨 나간 천사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며 이카엘을 돌아보았다.
“천, 천사장님.”
마음이 닿은 것이다.
“전쟁을 멈추세요. 여러분 모두 나를…….”
이카엘의 성광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권능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천사장님!”
천사들이 날아와 받아 들자 이카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믿으셔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자 천사들은 남은 7명의 대천사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엘이 말했다.
“백경을 열지.”
메티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백경? 앙케 라 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
“하지만 천사장님이 말리신 것도 이상하잖아. 앙케 라 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하는 분이시다.”
“…….”
메티엘이 입을 다문 가운데 사티엘이 나섰다.
“우선 천사장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건 어떨까요?”
유리엘이 물었다.
“가이아인은 어떡하고? 이대로 두는 건 위험해.”
카리엘이 제안했다.
“데려가지. 내가 관리하겠다. 절대로 허튼짓을 못 하게 할 자신이 있어.”
행동 기준이 확실한 카리엘이 손수 나선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인간.’
카리엘의 생명 실험에 유일하게 빠져 있던 재료를 마침내 손에 넣은 것이다.
사티엘이 거들었다.
“일단 전쟁을 유보하죠. 앙케 라 님이 말을 번복했을 리도 없고, 이카엘님이 명령을 어겼을 리도 없어요. 판단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요.”
확실히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파이엘이 카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말에 책임질 수 있겠지? 천국에 소동이 일어나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걱정하지 마. 공간 전이 기술을 쓸 거니까. 메타게이트로 격리시킬 거야.”
가이아인은 천사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아라보트를 향해 긴 행렬이 이어졌다.
천사들이 승전 나팔을 불며 흥을 키웠으나 대천사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라보트의 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카엘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이어지지 못한 죄 (4)
***
정신을 잃은 이카엘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빛이 모여들어 구체를 이루었다.
성광체가 본래의 형태를 되찾자 그녀의 눈꺼풀이 기계적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울상을 짓고 있는 사티엘의 얼굴이었다.
“천사장님, 괜찮으세요?”
이카엘은 마치 중력을 무시하듯 꼿꼿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불의 방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그게…….”
사티엘은 이카엘이 정신을 잃은 뒤 벌어졌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결론이 나서…… 전쟁은 유보되었어요. 카리엘이 메타게이트로 가이아인을 격리시켰습니다. 당장은 괜찮을 것 같지만…….”
여전히 천국의 분위기는 긴장 상태였다.
“그래.”
“어떻게 된 건가요, 천사장님? 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카엘은 대답 대신 생각에 잠겼다.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카엘이 성소의 문을 마음대로 개방한 것도, 명령을 어기고 천사들을 막았던 것도.
앙케 라에게서 반응이 없다는 뜻은…….
‘덮으실 생각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가이아인의 외침이 기억의 저편에서 떠올랐다.
-어떤 신이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한단 말인가!
“하아.”
정신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카엘이 이마를 만졌다.
“앙케 라 님을 만나야겠다.”
자리를 박차고 문으로 향하자 사티엘이 소리쳤다.
“모든 천사들에게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누구도 성소에 접근할 수 없어요!”
“괜찮다.”
이카엘이 문을 열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제불의 하늘로 날아오른 이카엘은 똑바로 아라보트의 첨탑으로 향했다.
성소에 도착한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개방했던 문을 보고 멈칫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아니, 내가 선택한 일이야.’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게 마음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것.
“앙케 라 님, 이카엘입니다.”
반응이 없자 그녀가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 끽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내부를 향해 멀어졌다.
“…….”
평소와 다름없이 박동하는 앙케 라를 눈에 담은 이카엘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거핀은 여전히 앙케 라의 신경에 붙잡혀 있었고, 다시 마음이 아려 왔다.
“들어오라, 나의 딸아.”
이카엘이 걸음을 옮기는 순간 문이 닫혔다.
쿠쿠쿠쿠쿠쿠!
수없이 들었던 소리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퇴로를 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카엘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너를 벌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또한 거핀과의 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앙케 라가 거핀의 몸을 이카엘 쪽으로 내밀었다.
성광체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거핀은 나에게 제안을 했다. 누가 신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깜짝 놀란 이카엘은 거핀을 올려다보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에 오직 동공에서 빛을 뿜어내는 모습에, 결국 그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카엘.”
앙케 라가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카엘은 정신이 나락의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신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앙케 라 님이시여.”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이야.”
전에 들었던 괴기스러운 소리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웅장한 음성이었다.
“잘한 일도, 못한 일도 없다. 그저 나는 완벽하게 존재하고, 그것을 끝없이 유지한다. 앙케 라는 오직 세계를 위해 판단할 뿐이다.”
이카엘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의 딸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정의 아래에 있지만, 너는 가장 특별하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최초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카엘은 의아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 어떤 강렬한 빛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 증폭. 그게 바로 너다. 비존재와 존재의 경계선에 있는 개념. 그렇기에 너는 다른 천사와 다르다.”
“다르다고요?”
“증폭의 순간 세계는 둘로 나뉘었다. 비존재와 존재의 세계. 네가 우주에서 가장 순결한 천사인 이유는, 너의 탁한 부분을 또 다른 네가 모두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탄 루시퍼. 율법의 대칭점. 한날한시에 태어났으나 너를 대신해 영원한 어둠을 품은, 이면의 존재다. 어떤 의미로는 쌍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카엘의 성광체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
“없다. 그는 이면 세계에서 스스로 정화되어 소멸했다. 현재는 사탄이라는 개념만 남아 있을 뿐이지.”
“왜죠?”
앙케 라가 거핀을 높게 들어 올렸다.
“루시퍼는 거핀과 거래를 했다. 이카엘, 너를 지키는 대가로 거핀 대신 정화되기로.”
“그, 그게 무슨……. 아닙니다. 그럴 리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이카엘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스쳤다.
‘그래서 그때 나를?’
이카엘에게 던진 포톤 캐논을 스스로 날아와 등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아니야.’
마음을 깨닫게 해 준 첫 키스도.
‘그럴 리가 없어!’
가이아인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거핀과 나누었던 수많은 교감도.
“내가…… 아니었어.”
이카엘의 뺨을 타고 빛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얼마나 기뻤는데.’
거핀이 천국에 남겠다고 했을 때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올랐던 마음 또한.
“착각일 뿐이다, 이카엘.”
앙케 라의 신경 말단이 다가와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마음이란 시스템이 만든 착각에 불과하다. 거핀이라는 오류가 세계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야. 내가 왜 너를 벌하지 않았느냐고?”
이카엘은 앙케 라의 손길을 느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너는 단지 거핀이라는 오류에 감염된 것일 뿐이야.”
“신이시여, 저는…….”
“두려워 말라. 내가 이 세상을 정의했다. 그리고 너는 그 정의를 정의하는 시작, 내 사고의 전부다.”
앙케 라가 뇌라면 이카엘은 생각이었다.
“그래, 나는 헥사를 삼키지 못했다. 하지만 보아라. 지금도 거핀은 내 힘으로 통제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완벽함이다.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오류를 시스템으로 격리시키는 것. 그리고 이제 율법은 다시 안정되었다.”
거핀의 육체가 다시 이카엘에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나의 딸이여. 만약 내가 너를 기만하는 것이라면, 나는 신이 아니겠지. 하지만 만약 내가 신이라면…….”
앙케 라가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