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77
“파리?”
깨달은 순간, 지상에서 12개의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로브를 입은 자들이 올라왔다.
‘시옥.’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내기를 한다면 무엇이든 걸 수 있을 터였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스톱이 하비츠와 독립적으로 발동한다는 것은 시로네 케이스를 통해 증명된 사실.
여기에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첫 번째 가설에 대한 실험이 시작된다.
‘시옥은 율법에 없는 시간. 따라서 하비츠를 모든 사건에서 독립시키지만…….’
어째서 지금은 시옥이 눈에 보이는가?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만약 시옥에 대한 물리적 타격이 가능하다면 하비츠 암살의 성공률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쿠안.”
세인이 지시를 내리는 그때, 시옥의 중심에 있는 하비츠가 입술을 움직였다.
“멈춰.”
순식간에 시옥이 지하로 빨려 들면서, 다시 스톱 마법이 공간을 지배했다.
“어째서?”
세인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리리아가 토템들을 바닥으로 던졌다.
동시에 스톱이 풀리고, 20개의 토템이 하비츠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렸다.
“됐어요!”
리리아가 손을 맞잡는 순간 토템이 진동하며 땅 밑으로 파고들어 갔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진의 표면이 거울처럼 매끈해지면서 풍경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데난 평야가 아닌, 적갈색 돌이 깔린 광활한 황무지였다.
‘공간의 율법. 요지경!’
세인 일행이 하비츠를 둘러싸자, 율법의 진이 마치 축이 달린 것처럼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적이다! 죽여라!”
마족들이 뒤늦게 깨닫고 달려들었으나 이미 진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중력은 여전히 발밑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세인 일행의 눈에는 세상이 통째로 역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탄! 사탄이시……!”
율법의 진, 요지경이 180도 뒤집어지면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마족들이 교차해 지나갔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이야!”
시간이 멈춘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마족은 없었다.
“군사님! 군사님!”
현재 총군사는 파이몬이지만, 인간 전령은 발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비츠 님이 전열을 이탈했습니다! 함정에 빠진 듯합니다.”
정황을 들은 발칸이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어떡하죠? 추격할까요?”
“아니, 내버려 둬.”
“네?”
“하비츠는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머릿속에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아. 어차피 말릴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발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쩌면 그것이 순리다.”
하비츠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뿐인 황무지였다.
만약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난다고 해도 탈수와 기아로 죽을 만한 장소였다.
“너희들은 뭐냐?”
하비츠를 포위하고 있는 세인 일행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큼 하비츠의 선택은 충격적이었다.
‘혼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시옥이 발동되는 것을 막으면서까지 이곳에 온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결국 참지 못한 세인이 물었다.
“어째서 시옥을 거두었지? 이유가 뭐야?”
“그냥.”
하비츠가 콧수염을 꼬며 말했다.
“이게 더 재밌어 보였거든.”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렇기에 확실하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메이레이가 있는 한 정보는 완벽히 통제된다. 따라서 원소 폭탄에 대해서 알고 있을 리가 없어.’
정해진 미래.
‘만약 우리를 따라 공간을 이탈하는 것이 하비츠를 살릴 유일한 확률이라면?’
바슈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율법을 선택한 것이라면…….
‘우리의 판단은 정正인가, 오誤인가?’
하비츠의 타고난 능력, 정해진 미래의 광범위함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메이레이.”
쿠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도청해.”
언제부턴가 하비츠의 마음의 소리가 모두에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에덴의 눈에, 귀신처럼 얼굴이 창백해진 메이레이가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피부색만 봐도 그녀의 감정을 알 듯했다.
“메이레이, 들려줘.”
하비츠가 배니싱을 발동하면 즉각 반응해야 한다.
“안 됩니다.”
메이레이가 차갑게 말했다.
암살 대상자인 하비츠를 앞에 두고 그녀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
따라서 세인의 지휘를 무시하면서까지 도청을 차단한 이유는 하나.
그것이 거의 절대적인 임무 실패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인이 말했다.
“메이레이, 네가 하지 못하면 우린 전멸이다.”
“…….”
“동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반은 승낙을 받은 셈이었으나, 메이레이의 콧잔등은 잔뜩 구겨졌다.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비츠가 장검을 늘어뜨리고 다가왔다.
“어디, 누구부터 죽여 볼까?”
섬뜩한 살기를 느낀 순간 메이레이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열겠습니다!”
막혀 있던 구멍이 뚫린 듯 세인 일행의 귓가에 하비츠의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악의 파동.
“꺄아아아악!”
리리아가 먼저 비명을 지르고, 아르민과 세인이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움찔했다.
‘젠장! 말을 해 줬어야 할 거 아니야!’
메이레이는 분명히 경고했다.
다만 하비츠의 마음이 그들이 상상하는 범주를 초월해 끔찍할 뿐이었다.
“왜 그래?”
하비츠가 처음 노린 먹잇감은 에덴이었다.
“마치, 뭔가 알고 있다는 반응이군.”
“아아, 아아아…….”
하비츠가 가까이 다가오자 현기증이 일어난 에덴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침착해. 나는 이제 요라야. 요르교의 신자였을 때하고는 다르다고.’
에덴의 선에 대한 신앙심은 시온에서도 가히 최고로 정평이 나 있다.
눈앞에 폭격이 떨어져도, 신에 대한 믿음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비수인 것이다.
“흐으으으.”
하지만 지금은 공포에 잠겨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는 인간일 뿐이었다.
“왜 그래?”
하비츠가 말하고 있다.
“내가 무섭나?”
너도 나와 같다고.
진정한 공포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
살인마가 사람을 도륙하고 사지를 절단한다고 해서 공포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 짓을 나에게 행하는 게 아닌 이상.
‘아니야. 나는 신의 사자다.’
두려움에 눈물이 흘렀다.
정신에 깃든 모든 악을 몰아냈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탁한 마음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이길 수 없어. 절대로…….’
하비츠가 촉발시키는 공포는 인간의 본질, 나아가 생물의 근원에 닿아 있었다.
‘극선.’
완전무결의 결정체인 미로만이 사탄의 소리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착각일지라도 (3)
***
앙케 라의 추적을 피해 헥사의 능력을 발동한 동굴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훌쩍훌쩍.”
이카엘을 흉내 내는 거핀의 목소리였다.
“흑흑.”
이카엘이 뺨을 붉히며 돌아섰다.
“그만해! 언제까지 놀릴 생각이냐?”
거핀이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낄낄 웃었다.
“신기해서 그러지. 대천사 이카엘이 꼬맹이처럼 질질 짤 줄이야. 정말 혼자 보기 아깝네.”
“누가 질질 짰다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린 이카엘이 하던 말을 멈추고 시선을 피했다.
그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흥.”
토라진 듯 돌아선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거핀에게 다가왔다.
“거핀, 나 결심했다.”
“뭘?”
거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말했다.
“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진지한 표정에 긴장하고 있던 거핀이, 풋 하고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아니. 입맞춤 말고 말이야.”
이카엘이 살며시 손으로 밀어내자 다시 등을 기댄 거핀도 비로소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그래, 사랑. 너희들이 하는 그 사랑 말이야. 마음이 이어졌으니, 이제 두렵지 않아.”
거핀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이카엘이 금세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혹시 나하고 사랑을 나누기 싫은…….”
“아니, 아니. 절대로.”
빠르게 고개를 흔드는 거핀의 얼굴에도 비로소 긴장감이 서렸다.
어쩌면 비장함.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좀 놀랐을 뿐이야.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어?”
이카엘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여태까지 불가능한 게 없었던 천사들의 수장이다.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 문제가 뭐냐면…….”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설명은 집어치우고 곧바로 시작하자.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곧바로?”
잠시 생각하던 거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래. 그것도 괜찮지. 괜찮은 생각이야.”
거핀이 자세를 고쳐 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카엘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저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응?”
이카엘이 눈썹을 들고 순진한 표정으로 되묻자, 거핀이 손을 허우적대며 말했다.
“아니, 하려면 뭔가 준비 자세 같은 걸 취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사랑을 나누려면…….”
멍하니 듣고 있던 이카엘이 퍼뜩 깨달은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 그렇지. 미안.”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닥에 놓인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런 다음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놓더니 살며시 고개를 틀어 얼굴선을 드러냈다.
“이러면 될까?”
가히 천상의 자태였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거핀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금 뭐 하냐?”
“응? 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 그럼 이렇게 할까?”
또다시 우아한 자세를 취하는 이카엘을 보고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너 뭔지 모르지?”
“그래, 몰라! 어떻게 알아? 대천사장인 내가 인간들이 사랑을 나누는 걸 훔쳐보기라도 했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