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8
무한으로(1)
알페아스의 과거를 들은 시로네 일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만큼 슬픈 이야기였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런 일이…….”
공인 4급의 마법사에 명문 학교의 교장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삶일 것이다.
하지만 아케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젊은 시절의 알페아스는 정말로 대단했다.
약관의 나이에 광양자설을 입증한 골드서클 수상자. 특히나 기억 전이 실험은 마법사회에서도 이제야 연구가 들어간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분명 알페아스는 천재였다. 하지만 나약했지. 조금만 버텼으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야. 하지만 사소한 정으로 모든 걸 망쳐 버렸다. 나는 그런 알페아스를 용서할 수 없다.”
시로네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케인은 세상이 인정하는 악당이지만 또한 마법사였다. 적어도 에리나의 실험에서만큼은 알페아스의 훌륭한 조력자였을 것이다.
“그래, 교장 선생님이 당신의 자료를 훼손시킨 건 위선일지도 몰라.”
아케인의 살기가 누그러지자 시로네는 조금 더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알페아스의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하긴, 네 눈에는 공인 4급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감정에 휘둘리면 최고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다. 에리나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법은 마법인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알페아스는 자격 미달이었다.”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옳았는지는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알페아스는 감정에 휘둘린 게 아니었다. 적어도 시로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실험을 더 했다면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겠지. 당신은 거리낌 없이 인체 실험을 자행했을 테니까.”
“부정하지 않으마. 하지만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할 수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어.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게 지성의 도리 아니겠느냐? 만약 네 눈앞에 정신지체아를 둔 부모가 있다면 어쩔 테냐? 그때도 가식적인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아케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당신 말대로 1명의 희생으로 만 명을 살릴 수 있다면 합리적인 선택이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1명을 희생시키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만 명이 죽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시로네는 단호했다.
“만 명이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인간인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한 거야. 더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만 명을 살릴 수 있는 날도 오겠지. 당신이 하려는 짓은 인간의 위에 서려는 독재자와 다르지 않아.”
“흐음.”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없다?
누군가는 이를 선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수긍할 인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선악의 중간에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선의 극단에 있다.
잔혹한 살인마도, 인류를 구원한 성자도 모두 탈인간적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핍박을 받았다면…….
‘너의 삶도 평탄하지만은 않겠구나. 여기서 죽는 것도 차라리 축복일 것이다.’
아케인이 다시 살기를 끌어 올렸다.
“우리는 어울릴 수 없는 부류로구나. 애석하지만 죽어 줘야겠다.”
시로네는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몇 배, 아니 몇십 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투기가 아케인의 몸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놀랐느냐, 애송아? 마법이란 오묘한 것이지.”
마법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마법사가 퓨어 마법을 시전할 때의 정신적 피로도는 일반인이 48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했을 때와 맞먹는다.
그런데 아케인의 집중력은 이런 산술적 계산을 무시할 정도였다.
“고통은 없을 것이다.”
아케인이 오른손을 들자 하늘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어둠이 주먹의 형태로 변했다.
크기로 미루어 봤을 때 추락할 경우 분지의 절반이 날아갈 정도였다.
시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못 막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어.’
실제로 어둠의 권능을 수치화하면 단위 정육면체(가로, 세로, 높이 1센티미터)에서 발휘되는 힘은 대략 0.1N으로 개미의 턱관절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만, 억 단위가 넘어가게 되면 천 톤에 달하는 막대한 힘으로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만 추태를 멈추시오, 스승님.”
모두의 시선이 절벽으로 향했다.
알페아스가 서 있는 곳에 한 줄기의 빛이 굉음을 내며 휘어들더니 사드가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사드 선생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에 시로네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에 사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파이어 선을 시전했다.
이중 나선의 형태로 솟구친 화염이 허공에서 거대한 불덩어리로 모여들었다.
“우와.”
직시하면 망막이 타 버릴 정도의 빛을 아케인은 아무렇지 않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치자 어둠의 권능이 똑같은 손동작을 취하며 움직이더니 거대한 불덩어리를 움켜쥐었다.
치이이이이이!
시로네 일행은 전율했다.
무언가가 이토록 거대한 소리로 타들어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세상이 어둠에 잠기자 사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스피릿 존을 펼쳤다.
“쳇! 짜증 나는 영감탱이가……!”
알페아스가 손을 들었다.
“그만두거라, 사드.”
“하지만 스승님…….”
“내 일이다. 나와 아케인의 일이야. 여기서부터는 나에게 맡기려무나.”
알페아스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자 아케인도 뒷짐을 지고 기다렸다.
파이어 선을 꺼트린 어둠의 권능이 다시 장막 형태로 퍼져 달빛을 가렸다.
“늙었구나, 알페아스. 하긴, 빛의 마법사도 세월 앞에서는 한낱 인간일 뿐인 게지.”
알페아스는 수십 년 만의 인사를 무시했다.
적어도 아직은, 어리석고 얼빠진 두 노인네가 과거의 일을 청산할 때가 아니었다.
수백 명의 학생을 지나 부상을 당한 이루키와 네이드, 시로네를 살핀 그는 마지막으로 에텔라를 돌아보았다.
이미 아케인과 충돌했음을 분명히 알려 주는 피멍이 새하얀 피부에 번져 있었다.
“고생했구나, 에텔라. 내가 부도덕한 탓이다.”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학생들을 구하지 못했어요.”
알페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 체술, 심법,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녀가 면접을 보러 왔을 때는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를 고용한 자신의 판단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학생 전원이 무사한 상황은 없었을 터였다.
시로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조심하세요.”
기력이 소진된 아케인이라면 공인 4급의 알페아스가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의 아케인은 단언컨대 최고의 상태였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알페아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등가교환의 원칙에 어긋나는 마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케인은 분명 정신력이…….”
“그래, 회복되었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마법이란다.”
“마법이라고요?”
“어비스 계열의 마법은 기억을 통제하지. 아케인이 창조했고 아케인이 가장 잘 구사하는 마법. 정확합니까, 스승님?”
아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치매는 아닌 모양이구나. 참고로 말하자면 네가 당한 마법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되는 어비스 노바라는 마법이다. 효과는 직접 겪었으니 말할 필요 없겠지.”
“훌륭한 마법이었습니다. 덕분에 예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죠.”
“허세 떨지 말거라. 겁에 질려 도망이나 친 주제에. 보나 마나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었겠지.”
“바로 맞혔습니다. 하지만 스승님도 안 본 사이에 많이 약해지셨군요. 백 살이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어비스 메모리까지 시전해야 할 정도로 고전하다니요.”
아케인은 화내지 않았다.
알페아스가 침착하면 자신도 침착하다. 40년 묵은 증오는 고작 말 같은 것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여운을 즐기려는 듯 알페아스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시로네, 마법을 시전하려면 순간적으로 강력한 집중이 필요하단다. 보통 사람이 1시간에 걸쳐 집중한 결과물을 1초에 써 버리는 셈이지. 그래서 아케인은 이렇게 한 것이란다.”
알페아스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신의 머리에 시전한 것이지. 기억을 지우는 어비스 메모리 마법을.”
“아…….”
뇌를 사용했던 기억을 없애 버리면 정신적 피로도는 사라진다.
물론 기능적으로 심각한 과부하가 걸릴 테지만 한 번 정도라면 생명을 위협할 수준은 아닐 터.
‘그런 방법이…….’
알페아스는 시로네의 생각을 읽었다.
“그래, 대담하고 멋진 기술이지. 아케인은 그런 세계에 몸담은 마법사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회심의 비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전투 마법사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아케인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흥, 네가 내 칭찬을 하다니,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구나.”
“괜찮겠소? 정신력이 복구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뇌의 착각에 불과. 여기서 더 할 생각이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마법에 공짜는 없다.
어비스 메모리로 회복시킨 정신력 또한, 뇌사를 일으킬 수 있는 리스크를 걸고 이루어 낸 등가교환에 지나지 않았다.
무한으로(2)
아케인은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네가 날 막아 보겠다는 것이냐?”
“물러가 준다면 여기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직까지는 모두가 무사하기에 제안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집념을 버리지 못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하는 수밖에요.”
“크크크, 예나 지금이나 혓바닥은 일품이로구나. 생각해 주는 척하지만 결국 자신밖에 모르지. 내가 물러나면 네놈의 과거가 덮일 줄 아느냐? 이미 늦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는 물론이고 어비스 노바에 당한 학생들도 귀는 열려 있으니, 너는 더 이상 교장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
시로네는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어비스 노바 마법이 풀리면 그들 또한 이 자리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게 될 터였다.
‘그럼 교장 선생님은…….’
아케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느냐? 차라리 여기서 전부 죽여 버리는 건 어떠냐? 그런다면 내가 대신 덮어써 줄 용의도 있건마는?”
알페아스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원 농담도.”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 나야말로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에리나가 남긴 유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 보거라, 내가 이룬 결과물을. 마도 생물체 하비스트다!”
시로네 일행이 돌아본 곳에 걸레짝처럼 널브러진 마도 생물체가 보였다.
“…….”
아케인은 입맛을 다셨다.
“뭐, 약간 볼품이 없어지기는 했다만. 어쨌거나 실험은 성공했다. 네가 나를 돕는다면 더욱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을 터. 또한 그것이야말로 에리나가 원했던 일이다.”
에리나의 이름 앞에서는 알페아스도 더는 여유로운 척을 할 수 없었다.
“스승님, 제발 철 좀 드시오.”
아케인도 비로소 살기를 드러냈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어울릴 수 없는 악연이었다.
“네까짓 게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교장? 웃기지도 않는군. 똑똑한 척하면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구나, 알페아스.”
어둠의 권능이 거대한 주먹의 형태로 뭉치자 알페아스 또한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아니, 이것이 옳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요.”
알페아스의 손바닥 사이에 빛이 압축되었다.
가히 무서운 기세였으나 아케인은 코웃음을 쳤다.
“결국 생각한 게 광자 출력? 고작 그딴 것으로 나를 막겠다고? 게을러졌구나, 알페아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오.”
“껄껄! 그것이야말로 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아니었던가? 해보기 전에 알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알페아스는 어디 갔느냐?”
“마법사는 미래를 보는 자. 비록 총기는 떨어졌으나 나도 늙기만 하지는 않았소. 내가 당신의 수십 년을 계산하지 못했을 것 같소?”
“호오?”
말인즉슨 오늘을 대비해 준비했다는 것인데, 그런 것치고는 단순한 마법이었다.
“이것으로 끝냅시다.”
“흥!”
아케인이 주먹을 휘두르자 어둠의 권능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에 반응하듯 알페아스의 손바닥 사이에 있는 광자가 먼지보다 작게 압축되었다.
‘응?’
시로네 일행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느려서 짜증이 날 정도의 시간 속에서, 알페아스의 두 손이 잔상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어느 순간 손바닥 사이의 광자가 사라지듯 자리를 이탈하더니 어둠의 권능의 거대한 어둠 속으로 향했다.
오직 광자만이 한 줄기의 섬광처럼 빨랐고, 주먹 형태의 어둠에 파묻힌 순간 파문이 느리게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세상을 백지로 만드는 빛의 폭발이 터졌다.
어둠의 권능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마법학교 전체를 뒤덮은 광채가 중심부부터 약해지더니 고리의 형태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으으…….”
시간이 정상으로 되돌아오자 시로네 일행은 황당한 표정으로 하늘을 살폈다.
구름조차 사라진 밤하늘에 거대한 달 하나만이 떠 있었다.
‘이게 무슨 마법이지?’
포톤 캐논처럼 물리력이 있는 것도, 샤이닝처럼 지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찰나의 순간, 가장 강력한 빛을 폭발시키는 마법이었다.
아케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알페아스, 너…….”
“빅뱅이라는 마법이라오. 협회에 올리기는 부끄럽지만, 작별 선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니었구나.”
알페아스의 마법에는 호승심도, 세상을 놀라게 할 깨달음도 없었다. 오직 이 순간 아케인이 나타날 것만을 상정하고 갈고닦은 마법이었다.
“제법이었다, 너치고는.”
아케인이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어비스 메모리의 후폭풍으로 이미 뇌의 기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좋겠구나, 알페아스. 너의 베팅이 성공했다. 천하의 아케인을 이겼으니 명성이 오를 터. 꿈에 그리던 대마법사라도 되고 싶은 게냐?”
알페아스의 얼굴 또한 창백했다.
“스승님은 더 이상 대마법사가 아니오. 그렇게 불렸던 건 벌써 수십 년 전입니다. 10급의 새내기가 2급의 대마법사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지요. 우리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야망을 갖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어찌 그걸 모르시오?”
아케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비록 패했으나 제자에게 훈계를 들을 정도로 살아온 세월이 멋없지는 않았다.
“어째서 네가 오만한 알페아스인지 아느냐? 재수 없이 불행한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진실을 말해 주마. 너는 천재가 아니다. 불행에서 도망이나 치는 덜떨어진 마법사일 뿐이야.”
아케인이 떨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늙었다고? 나는 네 나이에 대마법사에 올랐다. 솔직히 말하는 게 어떠냐? 자신이 없다고. 더 이상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핑계를 대는 게 아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