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81
이카엘의 어깨를 끌어안은 거핀이 반대쪽 손가락으로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빠가 지켜 줄 테니까.”
한편, 제불의 처소로 복귀한 사티엘은 마치 꿈을 꾸다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이었고, 이카엘과 거핀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으나, 돌아보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인간을 위해 투쟁한, 수를 셀 수 없는 나날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거핀이 선택한 사람은, 여태까지 그를 방해했던 이카엘이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단 말이야…….”
빛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성광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내가 더 사랑했어. 내가 더 그를 위해 싸웠어. 그런데 왜? 왜 이카엘이야?”
마음을 던지지 못했다.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먼저 말했으면 그 자리에는…….’
사티엘과 그녀를 닮은 자식이 있지 않을까?
성광체가 용암처럼 뚝뚝 바닥에 떨어지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여긴?’
아라보트의 성소.
뒤를 돌아보자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앞에는 앙케 라가 굵은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사티엘.”
기억에는 없지만 앙케 라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알현을 요청한 듯했다.
“아, 그게…….”
앙케 라의 한쪽 눈꺼풀이 올라가고, 소리가 목에 걸린 사티엘의 턱이 덜덜 떨렸다.
쿵! 쿵! 쿵! 쿵!
제5천, 거인의 도시 마테이에서 일화의 술 상위 단계에 오른 거인들이 행진을 했다.
응체라 신장은 그리 크지 않지만, 거대한 질량이 땅을 찍을 때마다 도시가 흔들렸다.
“이게 무슨…….”
천국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술법에 대천사와 마라가 모두 모였다.
“정말 가능한 건가?”
유리엘이 책임자인 카리엘에게 물었으나, 그의 표정에도 확신은 없었다.
“짐작할 수 없지.”
마테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거인들이, 하늘까지 뻗어 있는 동상으로 모여들었다.
“일화의 술 최초로 10단계에 도전하는 날이니까. 확률로 따질 게 아니야.”
“지금까지는 7단계가 최고였던가?”
거인 군단장 기르신이 유일한 7단계로, 마테이의 거인을 통치하는 중이었다.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 이번 술법에 참여하는 거인들은 모두 고대인, 가이아인의 통합이니까.”
최초로 탄생한 거인은 요툰하임으로 여행을 떠나 새로운 율법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1단계.
이때부터 거인에게 정체성이 생기기에, 술법의 단계를 올리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신민을 이용해 도달한 단계가 고작 3단계임을 상기하면 가이아인의 통합력은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갑자기 10단계라니. 가이아인 100억 명이 통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맞아. 만약 성공한다면 일화의 술 10단계에 도달한 최초이자 마지막 거인이 될 거다. 기르신을 제치고 모든 거인을 지배하게 되겠지.”
“……거인의 왕이라.”
앙케 라의 지시에 따라 카리엘은 순차적으로 일화의 술을 진행시켜 나갔다.
성공, 성공, 또 성공.
피라미드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청동상들의 램프에 계속해서 불이 들어왔다.
“가이아인, 이 정도였나?”
애꿎게 거인만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던 카리엘의 얼굴이 쾌감에 잠길 정도였다.
8단계 청동상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 거인 군단장 기르신의 표정이 구겨졌다.
유리엘이 그를 지켜보았다.
‘자존심이 상하겠지.’
여태까지 거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가 한순간에 2인자로 전락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의문이다.’
유리엘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청동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이런 게 필요하지?’
기르신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 10단계라니.
유리엘의 생각으로는, 과연 이 우주에 그 정도로 강한 무언가가 존재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9단계…….”
마침내 마의 고지를 넘어서고, 모든 중급들이 녹아든 액체가 중앙의 청동상으로 빨려 들었다.
크기가 워낙에 커서 액체를 채우는 데만 한참이 걸렸으나, 지켜보는 자들은 시간을 잊었다.
“끝났다.”
어떤 마라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청동상의 진동이 사라지고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수많은 거인들이 사라져 황량하게 변해 버린 광장에서 청동상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음인데도 고막이 찢어질 정도였고,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
거푸집 안쪽이 텅 비어 있는 광경만이 그들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왜?”
쿵!
누군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땅이 울렸다.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려 보니, 기껏해야 가이아인 정도의 키를 가진 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응체?”
그것을 방증하듯, 정상적인 훈련으로는 만들 수 없는 두꺼운 근육의 벽이 보였다.
‘응체는 어려운 기술이다. 일화의 술이 성공하자마자 성공시켰다는 것은…….’
카리엘이 상황을 분석하는 가운데, 기르신이 청동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태어난 거인이여.”
앙케 라의 지시로 치러진 술법이기에 유리엘이 막으러 나서려는 순간.
“일단 있어 봐.”
카리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7단계도 천국에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생명 합체술. 과연 10단계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나는 거인 군단장 기르신이다.”
새로 태어난 거인 앞에 멈춘 기르신이 검을 뽑아 들고 말을 이었다.
“거인의 왕으로 선택받았다고 하나, 거인의 율법은 엄연히 무력제일주의. 이 자리에서 승부를…….”
새로 태어난 거인이 고개를 쳐든 순간, 숨이 멈춘 기르신이 검을 떨어뜨렸다.
청명한 쇳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새로 태어난 거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리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살기?’
아니, 살기가 아니다.
존재 자체가 너무나 압도적이기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내색하는 천사들은 없었지만 성광체가 흔들리는 것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이미르.”
흘리는 듯한 발음으로 음성을 내뱉자 기르신의 두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이미르다.”
모든 생물에는 천적이 있다지만, 이미르는 뭘 어떻게 해 보겠다고 만든 생명체가 아닌 듯했다.
‘거인의 왕. 아니, 생물의 왕이다.’
기르신이 곧바로 부복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왕이시여. 당신의 명에 따라 세계를 평정하겠습니다.”
이미르는 대답 대신 아라보트의 첨탑을 돌아보았다.
‘싸우고 싶다.’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질 법한 탄생의 의문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이 세계는…….”
이미르가 한쪽 발을 지그시 짓누르자 돌로 만든 바닥이 그대로 함몰되었다.
“너무 약하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이미르가 있던 자리에서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 터졌다.
“크윽!”
모인 자들이 천사와 마라, 중급 거인이었기에 피해는 없었으나, 광장은 초토화되었다.
“저런 방종한!”
카리엘은 이미르의 자아를 의심했으나, 유리엘은 폭발의 근원지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에게 적의는 없었을 거야.”
“적의가 없다니? 그냥 천사도 아니고, 대천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짓을……!”
“저기를 봐.”
반경 전체가 반구형으로 함몰된 가운데 유리엘이 이미르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미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무릎을 구부렸다가 폈을 뿐이다.”
“…….”
카리엘은 크레이터의 중심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리엘이 말했다.
“오히려 그래서 문제지. 대천사들을 눈앞에 두고도 일말의 적의도 없었다는 것은…….”
기르신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유리엘의 분석을 들은 모든 천사가 입을 다문 가운데, 아라보트 쪽에서 폭성이 터졌다.
쾅!
한 번의 도약으로 아라보트에 도착한 이미르가 첨탑의 벽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흐음.”
머리로는 지지대를 만들 생각이었으나 힘이 너무 세서 먼지처럼 부서져 버렸다.
‘불쾌하다.’
우주에는 단단한 물질들 천지지만, 이미르는 마치 고체가 없는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아무 느낌도 없어.’
힘을 조절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 이미르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발을 박찼다.
펑!
풍압만으로 육체가 붕 뜨고, 잠시 후 지상이 쾅 소리를 내며 납작하게 함몰되었다.
벽을 두부처럼 으깨고 들어가자 성소의 문이 코앞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앙케 라시여.”
동물적 감각이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앙케 라가 이미르를 맞이했다.
묘한 압박을 주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 이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보다 강하오?”
“강함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아니.”
이미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기준 따위는 없어. 나는 너보다 강하다. 어찌하여 내가 너에게 복종해야 하지?”
“내가 너에게 탄생의 축복을 내렸으니까.”
“아니, 저주겠지.”
손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한 이미르가 손바닥을 펼치고 앙케 라의 눈 밑을 짚었다.
“나에게는 성취가 없어. 어차피 내가 최강인데, 더 강해져 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손에 힘을 주어 앙케 라의 피부를 구기자 살점이 조금씩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봐, 조금만 힘을 줘도 이렇게…….”
“느끼고 싶나?”
이미르가 시선을 들었다.
“힘을, 육체를, 타격감을, 충격을 느껴 보고 싶나?”
“……당신이 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아니다.”
앙케 라의 촉수가 빠르게 움직였다.
“맥클라인 거핀.”
앙케 라의 살점을 뜯어내던 손가락이 다시 펼쳐지고, 이미르의 육체가 이름에 반응했다.
“거핀.”
이미 100억 명의 개성은 통합된 상태지만, 그들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핀이 최강이다.
사티엘의 성광체에 접속한 앙케 라가 눈에서 전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가라.”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내가 너를 거핀에게 인도할 것이다.”
천천히 몸을 돌린 이미르는 무너진 벽 앞에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뛰어내렸다.
잠시 후, 강력한 충격파가 첨탑을 흔들었다.
꽃밭에서 (3)
***
앙케 라의 지령을 받은 사티엘은 이카엘이 은신하고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왔구나. 기별이 없기에 걱정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