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83
“하지만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막상 그녀가 떠나고 나니 후회가 되더구나.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그립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슈라는 확신했다.
“부처시여.”
“그래. 나는 시로네를 이해했다. 가장 객관적인 시선에서 모든 걸 살필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 이제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중생에게 필요한 게 부처인지 야훼인지,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할 것이다.”
슈라는 이 세계의 운명을 판가름할 결정이 조만간 내려질 것을 직감했다.
만약 야훼가 옳다면, 나네는 기꺼이 시로네를 도와 마족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반대로 부처가 옳다면.’
세상은 닫힌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야훼도, 극선도, 극악도, 종말을 멈추지 못할 거야. 만약 가능한 자라면…….’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가올드.’
부처를 꺾은 자.
“그래.”
슈라의 생각을 읽은 나네가 눈웃음을 지었다.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인간 그 자체, 가올드겠지.”
마치 모든 것이 눈에 그려지는 듯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가 지시를 내렸다.
“이카엘을 데려오너라.”
꽃밭에서 (4)
***
이미르는 거핀을 소멸시키지 못했지만, 그의 움직임을 상당 시간 저지했다는 것만으로도 탄생 초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비극이 시작되었던 그날, 이카엘은 아이를 품에 안고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앙케 라는 아카식 레코드를 이용, 이카엘의 권능을 박탈했고, 수많은 천사와 마라가 덮쳤다.
아슈르, 레테, 라무스.
이카엘의 권속인 3대 수호신이 맹렬히 싸웠으나, 이카엘의 권능이 사라진 이상 버틸 재간은 없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2명의 마라가 소멸했고, 유일하게 생존한 아슈르마저 치명상을 입었다.
이카엘과 아이는 천국의 감옥에 갇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의 날이 열렸다.
광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신민들이 이카엘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타락한 천사에게 징벌을! 고통을! 소멸을!”
한때 자신이 통치했던 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카엘은 오직 아이를 걱정했다.
“제발!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아이, 우리 아이만은 살려 주세요!”
마라들이 소리쳤다.
“닥쳐! 너 같은 게 무슨 천사야! 고결한 정신? 천하에 음탕한 것 같으니!”
시로네는 눈물을 흘렸다.
‘이카엘.’
두 번째 접하는 과정임에도 이카엘의 오열하는 모습을 본 순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모두가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죽여! 죽여! 타락한 생물을 죽여!”
특히나 카리엘은 경멸의 수준이 아닌 증오에 가까운 눈빛으로 이카엘을 노려보았다.
‘인간의 아이를 낳았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가장 고귀하다고 여겼던 대천사가…….’
짐승의 욕구를 품은 것이다.
“제발, 제발 아이만은…… 부탁드립니다.”
이카엘이 간절한 표정으로 대천사들을 돌아보았으나, 모두 시선을 피했다.
오직 카리엘만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성광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왜 이런 짓을 해.’
도대체 왜?
가장 강력하고, 고결하며,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천사에게 저런 고깃덩어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뭐지? 이카엘, 당신에게 우리 천사들은 도대체 뭐냔 말이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천사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응앵. 응앵.”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마치 동물적 본능이 죽음을 감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로네는 알고 있었다.
그저 이카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임을.
“처형을 시작하라!”
징벌의 천사 오드엘의 3각 마라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콧구멍에서 뿜어지는 불꽃이 아이에게 닿자 이카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 돼! 그만! 아아아아! 아아아아!”
증폭의 능력은 봉인당했지만, 그녀의 절규는 천공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흐으으으.”
제불의 처소, 구석에 처박힌 사티엘이 그 소리를 듣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이카엘의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성광체가 산산조각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질질 짤 거야?”
결합의 대천사 메티엘이 들어왔다.
반쯤 미쳐서 웅크리고 있는 사티엘을 보자 그녀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약한 척을 해?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냐?”
“나가.”
사티엘의 목소리는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메티엘은 오히려 화가 났다.
“역시 너는 대천사에 어울리지 않아. 너무 나약해. 평소에는 그렇게 이카엘을 따르더니 배신하고, 이제는 피해자인 척. 도대체 너라는 천사는…….”
메티엘은 말을 멈췄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사티엘의 눈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 죄는 이카엘이 지었지. 인간의 아이를 낳았잖아. 그래, 나는 천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앙케 라 님도 나를 칭찬하셨어. 그런데 뭐가 어쨌다고?”
사티엘은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그래, 인간이 문제야. 저 하찮은 고깃덩어리들이 세계를 어지럽힌 거라고.”
인간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던 사티엘의 눈빛에는 율법처럼 차가운 긍지만이 서려 있었다.
“그래.”
메티엘은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그녀를 더 부추겼다가는 천사의 금기마저 깰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참수!”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3각 마라의 도끼가 아이의 목을 잘랐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반쯤 미쳐 버린 이카엘이 악을 지르는 소리는 대천사들에게도 고역이었다.
“아기! 우리 아기!”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던 이카엘이 오만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 고얀 놈들!”
다른 의미로 미친 모습에, 대천사는 물론 신민들까지 이카엘을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백경을 열어라! 내가 직접 전말을 밝히겠다!”
“백경? 크크, 아직도 네가 대천사라고 생각해?”
마라의 조롱에 더욱 화가 난 이카엘이 눈에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죄를 지은 건 내가 아니라 앙케 라!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밝힐 거야!”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모든 천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똑똑히 들어라! 앙케 라는 신이 아니다! 앙케 라는 거핀과의 회담에서……!”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정신에서 기억이 말소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시로네는 깨달았다.
‘천국에서 이카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큰 죄를 지어 아라보트에 갇혔지만, 모든 존재가 그 죄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이카엘의 죄가 아니었어.’
앙케 라가 정말로 지우고자 했던 것은, 거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의 죄였다.
‘신이 약속을 어겼다. 거짓말을 했다.’
이 세계가 불안정하다는 증거로 이보다 확실한 게 있을까?
거핀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까지 갔던 앙케 라는 리셋을 할 수 없었다.
‘리셋을 하면 거핀에게도 기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아카식 레코드에서 특정 사건만 말소시키는 것.
이런 식의 말소는 전체에 균열을 일으키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예 전체가 파괴될 터였다.
기억을 잃은 채 평온하게 잠든 이카엘의 얼굴을 시로네는 궁감으로 쓰다듬었다.
‘잊어버리세요.’
어쩌면 유일한 안식일 터였다.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게 살아갔다.
천사들 또한 비어 있는 기억에 찝찝함을 가진 채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나는 죄를 지었다.’
다만 이카엘만은 아라보트의 처소에 갇힌 채 한 걸음도 나오지 못했다.
‘앙케 라 님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어.’
남아 있는 건 죄책감뿐.
‘어떤 죄였을까?’
현재 다른 대천사들은 마지막 남은 가이아인, 맥클라인 거핀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1명의 개체라도 존재하면 울티마 시스템의 완전 해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핀. 분명 알고 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아.’
성광체에 가득 차 있던 정보가 사라지고 오직 느낌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싸우고, 반목하고, 소리 지르고.
‘그런 느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복……했었나?’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짐작이 가는 점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천사장이 아니다. 내 죄를 참회하기 전까지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초승달이 뜬 밤.
이카엘은 침소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달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의 장막 너머에, 천사만큼 키가 큰 인간이 서 있었다.
“나야.”
거핀의 얼굴을 본 순간 이카엘은 멍해졌다.
“가이아인? 어떻게 여기에?”
이카엘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거핀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그냥 앉아 있어.”
마치 마법처럼, 그녀는 열정적으로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지키지 못했어.”
한쪽 무릎을 꿇은 거핀이 손목을 붙잡자 이카엘이 황급히 뿌리쳤다.
눈앞에 있는 자가 유일한 가이아인이라면, 이름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거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지금 당장 네놈을 붙잡아 앙케 라 님에게 바치겠다.”
차가운 목소리에 거핀은 억장이 무너졌다.
‘당신은 내 전부야.’
서로 사랑했다고, 우리는 온 마음으로 이어졌다고 외치고 싶었다.
거핀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아이를 잃고 이카엘이 얼마나 슬펐을지는 오직 거핀만이 알고 있었다.
‘기억할 필요 없어. 영원히 잊어버려.’
이카엘이 이것으로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거핀은 기꺼이 떠날 생각이었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거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카엘이 문득 떠오른 듯 되물었다.
“아니, 그보다 그런 말을 왜 나에게 하지?”
거핀은 참지 못했다.
“사랑하니까.”
“헛소리! 결국 나를 능멸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지금이라도 네놈을……. 응?”
불같이 화를 내던 이카엘이 뺨에 흐르는 것을 느끼고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어째서?”
빛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내가 울고 있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거핀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으니까.”
그것이 마음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기억하지 못해도 슬프지 않아. 당신의 마음, 가져갈게.”
이카엘의 눈물이 허공을 뚱뚱 떠서 거핀의 손바닥 위에 머물렀다.
“감정은 남는다고?”
이카엘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왜 눈물이 멈추지 않지? 왜 이렇게 아프지? 대체 이 인간과 무엇을 했기에…….’
“애쓸 필요 없어.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때는…….”
거핀이 이카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몸을 일으키고 성광체에 살며시 입을 맞추자 이카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