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88
오랜만에 경어를 쓰면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으아아아아!”
미로가 벌떡 일어서며 악을 질렀다.
“이 거지 같은 도마뱀 새끼들! 다 죽여 버린다!”
파묻힌 발을 빼낸 미로가 땅을 박차고 달리는 순간, 강난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참아요! 참아!”
“놔! 이렇게 두들겨 맞고는 못 살아! 가서 똑같이 갚아 줄 거야!”
미로가 앞으로 쓰러지면서 실린 무게를 통해서 강난은 알 수 있었다.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긴, 아무것도 못 하고 받아 내기만 했으니.’
내색하지 않고 미로를 살피자,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흐으, 씨. 진짜 서러워서.”
천하의 미로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면서도 끝까지 참아 낸 이유는…… 결국 인류일 것이다.
‘극선이구나.’
지금까지는 가올드의 마음을 몰라주는 미로가 미웠으나, 지금은 문득.
‘이런 여자라서.’
가올드가 그 끔찍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까지 그녀를 도우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강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부 대륙으로 가요.”
“……이렇게 된 거야.”
미로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던 이루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래서 늦었다고요? 12사도에게 한 대씩 맞아 주느라?”
“그래. 빨리 오려고 했는데, 삭신이 안 쑤시는 데가 없더라. 나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야.”
앓는 시늉을 하던 미로가 표정을 고쳤다.
“아무튼 얘기는 들었어. 원소 폭탄. 확실히 시로네 친구답네. 정말로 깜찍한 전략을 생각해 냈어.”
이루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시로네가 알았다면 화를 냈을 겁니다.”
미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선택을 후회해?”
“아뇨. 할 겁니다. 이미 각오는 끝났어요.”
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쨌든 악을 물리칠 유일한 수단이잖아?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인류의 전력은 극도로 약해졌어. 여기에 걸어 보자. 나도 도와줄게.”
끔찍한 비극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희생자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이루키가 전장의 지도를 가리켰다.
“메이레이가 있는 한 정보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아요. 무등룡의 로그도 시로네에게만 전승됩니다. 그 전까지는 영면에 들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열람할 수 없었죠.”
“흐음. 그런데?”
“전략대로 가고는 있어요. 하지만 뭐라 해야 할까, 반발? 그런 반응이 있습니다.”
이루키가 자신의 검지를 반대편 손으로 꽉 쥐었다.
“마치 혈관의 맥이 느껴지는 것처럼, 적들의 내부에서 뭔가 박동하고 있는 느낌.”
“눈치를 챘다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니라서 찝찝한 거예요. 하비츠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토르미아를 비껴 직진하는 것. 우회하여 바슈카를 치는 것. 직진은 편리해서 좋고, 우회하면 바슈카라는 장난감이 있어요. 제 생각에, 약간의 충격만 줘도 지옥의 군대는 바슈카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다만 예상보다 꺾이는 느낌이 작아요.”
“흐음. 미묘하다 이거지? 충격을 주면 반발이 일어나고, 그렇다고 바슈카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지도 않고?”
“네. 군대를 하나의 유기체라고 봤을 때, 지금의 감정은 갈등에 가까워요.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 것일 수도 있고, 뭔가를 직감했지만 소수만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이 타이밍이야. 상대가 의심할수록 유인책은 어려워지니까.”
이루키는 미로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이곳.”
지휘봉이 꽃밭의 북쪽을 짚었다.
“여기에 충격파를 일으켜 주세요. 최소한 11도 이상은 꺾어야 합니다.”
미로가 피식 웃었다.
“비유한 거지?”
“네.”
고작 각도로 설명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직관적이라 좋네. 알아들었어. 나와 줄루, 강난이라면 11도 이상도 가능할 거야.”
미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열심히 해.”
미로의 등을 바라보던 이루키가 물었다.
“어째서?”
미로가 뒤를 돌았으나, 다음 말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죠?”
“…….”
“악을 증오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선량한 사람들도 죽습니다. 왜죠? 방법이 없어서? 당신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이루키의 눈이 흔들렸다.
“정답 비슷한 거라도 듣고 싶겠지. 설령 정신병자의 말이라도. 아니, 차라리 실컷 비난이라도 들었으면.”
미로가 산책하듯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오직 침묵의 정적.”
이루키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또한 그게 내 대답이야.”
이루키가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미로는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그랬어. 20인의 위원회가 열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했다.”
오직 가올드만이 끝없이 소리쳤다.
“서럽고 야속했지. 인간이 괴물처럼 보였어. 그런데 20년 동안 차원의 벽에 있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인류는 그때, 처음으로 조용했다고.”
침묵.
“인정하기 싫지만, 정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도 있는 거야. 모든 문제에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지. 그때 인류는, 지성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
미로가 과거의 슬픔을 떠나보내듯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원망할 것도, 화를 낼 것도 없는 일이었어. 만약 내가 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했다면, 또 그렇게 흘러갔을 거야. 그럼 인류는 멸망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이미 지나온 과거일 뿐이니까.”
미로는 이루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너는 여태까지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홀로 서 있는 거야. 괴롭겠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네가 어디로 향하든 길이 되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 테니까. 그렇기에 나 또한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뒷걸음으로 물러서며, 미로는 검지와 중지에 입을 맞추고는 이루키에게 내밀었다.
“너의 선택에 침묵한다.”
이루키의 두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기억해. 지금은 네가 세계의 주인이야.”
문이 닫히고, 이루키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미로가 말한 침묵이란, 지지한다는 뜻도 반대한다는 뜻도 중립을 지킨다는 뜻도 아니었다.
‘오직 나에게만 있는 선택권.’
무엇을 선택하든 최초가 될 것이고, 거기에서 새로운 미래가 태어날 것이기에.
“후우.”
과열된 뇌가 잠시나마 식으면서, 이루키는 오랜만에 3분 정도의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광신 (5)
세인 일행이 하비츠를 둥그렇게 포위하자 시옥도 안쪽에서 원을 그리며 포진했다.
‘특정 시간대의 환경을 조작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세인은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우리가 하비츠를 이탈시킨 사건조차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미래일 뿐이라면…….’
하비츠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지 원소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이, 여자.”
하비츠의 마음이 를 통해 전달되면서 모두가 동시에 깨달았다.
“피해!”
시옥이 메이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어째서?’
스톱 마법을 유지하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르민이 의문을 품었다.
‘시옥은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가?’
어쩌면 공방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습게 보는군.”
등 뒤에서 쿠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어느새 시옥의 측면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대칭의 극의.’
세인 일행에게 쿠안의 위치는 똑똑히 보이지만, 시옥은 그가 접근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율법.
‘여기서 두 번째 가설이 생긴다. 어째서 시옥은 12명, 혹은 12개인가?’
0.666초.
어떤 사건도 일어날 수 없는 시간의 감옥.
‘율법은 모든 결과에 1대1로 대응하지.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엉망진창이 되니까.’
시옥은 12명이 하나의 율법을 만든다.
‘즉, 열두 가지의 특정 현상이 결합되어 시간의 감옥을 탄생시키는 거야. 따라서 하나라도 없애면…….’
하비츠의 철벽에 구멍이 뚫리는 셈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릴 무렵에는 쿠안이 선두의 시옥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죽는 것도 모를 거다.’
그 순간.
“윽.”
선두의 시옥이 갑자기 동료의 발에 걸리면서 상체가 활짝 젖혀졌다.
‘뭐야?’
콩트라면 이보다 지독할 수는 없겠으나, 이미 검은 휘둘린 상태였다.
칼날이 로브를 베고 지나가고, 한 줄기의 핏물이 쭉 소리를 내며 승천했다.
“피?”
마치 기계가 작동을 멈춘 듯, 시옥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제법이군.”
선두의 시옥이 후드를 젖히며 모습을 드러내자 세인 일행의 눈이 커졌다.
“인간?”
귀가 뾰족하지도, 피부가 붉지도, 머리나 등에 뿔이 나지도 않은,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인간이라면 들을 수 있어.’
메이레이가 신의 주파수로 시옥의 파동을 도청했다.
“이건…….”
를 통해 파동을 공유한 에덴이 멍한 표정으로 시옥을 돌아보았다.
‘이들의 목소리는, 이건 분명…….’
오직 악에 매료되어, 생육신의 상태로 사탄의 추종자가 되어 버린 인간들.
“광신도.”
시옥의 정체는 12명의 광신도였다.
***
땅에 박힌 바위가 급류에 뽑히려면 얼마나 거대한 유량이 필요할까?
인포메이션 캐슬이 먼지처럼 부서졌다.
복잡한 성 내부에서의 전투는 활극을 방불케 했지만, 멀리서 보면 그저 거대한 질량이 쓸고 지나간 것이었다.
“돌진! 돌진!”
성을 무너뜨린 마족들의 진열이 합쳐지면서, 엄청난 충격이 대지를 두들겼다.
잔해조차 남지 않은 자리에 연합군의 시체들이 바닥을 통통 튀는 가운데.
“닥치는 대로 죽여!”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지하 터널의 음침한 공간에서 단테의 거친 숨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메아리쳤다.
“괜찮으십니까? 힘들면 저에게 맡기십시오.”
그를 부축하고 있는 3사단 간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단테를 살폈다.
낯빛이 창백했다.
“아뇨. 암호 체계를 접목한 미궁이에요. 많이 돌아다닌다고 찾을 수 있는 출구가 아닙니다.”
단테와 간부의 뒤편으로 인포메이션 캐슬에서 수성전을 펼쳤던 병사들이 따라왔다.
‘패닉 룸.’
마족들의 충격량이 인포메이션 캐슬의 내구력을 상회하자 단테는 지하 시설로 향했다.
그리고 직렬식 마법진 백도를 통해 만들어진 탈출로를 통해 병력을 대피시킨 것이다.
‘철두철미하군. 패닉 룸을 포기했으면 성의 기능을 훨씬 높일 수 있었을 텐데.’
마법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하긴, 내가 아는 어떤 마법사도 영웅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검사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오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얄미워 죽겠다고! 항상 나보다 빨리 진급하고 말이야! 약삭빠른 자식!’
군대 동기를 떠올리자 순간 이가 갈렸으나, 간부는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편한 거였구나, 누군가가 대신 생각을 해 준다는 것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부모를 만난 것처럼, 단테가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병력의 숫자도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많지는 않습니다.”
단테는 이미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부대에 편입하는 것도 좋지만, 지하로 이동하는 이점을 버리기 아까워요. 꽃밭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도착해도 밀릴 시간대는 아닙니다. 이대로 지하를 통해 이동한 다음 함정을 파도록 하죠.”
“함정요?”
간부가 의아하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