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9
“오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오. 나이를 먹었으면 그에 맞는 성찰이 있어야 할 터. 하지만 스승님은 지금도 달콤한 야망만 좇는 소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껄껄껄! 어리석은 알페아스여!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게냐? 한 걸음만 물러서서 보아라. 이 세상에 응당 그래야 한다는 정언 따위는 없는 게야!”
아케인의 몸에서 기운이 폭발했다.
또다시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페아스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의 어비스 메모리는 뇌가 버티겠지만 두 번째는 거의 절대적인 확률로 뇌사였다.
“어리석은 영감탱이! 죽으려고 작정했소?”
비웃음으로 응수한 아케인은 분지를 뒤덮을 만큼 거대하게 그림자를 확장시켰다.
땅에서 수많은 손들이 올라와 기억을 잃은 학생들을 전부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번만큼은 알페아스도 겁에 질렸다.
“그만두시오! 무의미한 살생일 뿐이오! 이런다고 당신에게 무엇이 남는단 말이오!”
“승자의 만족감이 남는다.”
“바보 천치 같으니! 그 나이를 먹고도 이기고 싶소? 당신이 언제까지고 소년인 줄 아냔 말이오!”
“똑똑히 들어라, 알페아스.”
생의 마지막 순간, 아케인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마법사는 영원한 소년이다.”
어둠의 권능에 붙잡힌 400명이 바가지로 퍼 올리듯 절벽 밖으로 날아갔다.
“학생들을 구하게!”
알페아스의 지시가 떨어진 순간 사드가 섬광으로 변해 날아갔다.
시로네가 뒤를 따르고, 이어서 네이드와 이루키도 절벽으로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무려 400명이었다.
어차피 전부를 살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런 생각조차 사치일 정도로 상황은 다급했다.
사드는 절벽의 중턱에서 에어 계열의 마법으로 공기의 그물을 펼쳤다.
하지만 최소 50제곱미터 이상을 만들어야 하기에 걸러지는 학생은 반드시 나왔다.
“제길!”
사드보다 밑에서 이루키와 네이드가 활약하고 있지만 학생 수준에서는 어려운 난이도였다.
아이부터 졸업반까지 우수수 추락하는 모습에 눈물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젠장, 젠장!”
어금니를 깨문 이루키가 드러누운 자세로 허공을 향하는 그때 한 줄기의 섬광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시로네!”
이루키와 네이드의 사이를 지나친 시로네는 끝없이 지상을 향해 치달았다.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그의 시야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들어왔다.
“에이미!”
시로네의 목소리에 에이미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어비스 노바에 걸린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반응이었기에 시로네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 다시 소리쳤다.
“에이미! 정신 차려!”
‘정신? 그게 뭐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어비스 노바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 생각을 원천 차단하는 데에 있을 테지만…….
“에이미! 에이미!”
에이미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바로 카르미스 가문이기 때문이다.
“에이미! 정신 차려!”
‘귀찮다구우. 제발 이러지 마아.’
“나야! 시로네란 말이야!”
‘시로네?’
무슨 뜻이었더라? 모르는 단어였다.
하지만 자꾸만 뇌리를 간질이는 세 음절을 놓아 버릴 수 없었다.
‘뭐지? 뭐였더라. 되게 궁금하네.’
그녀의 대뇌피질에 무의미한 패턴의 전기신호가 끝없이 반복되며 정보의 원천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확한 신호가 천둥 번개처럼 터졌다.
‘맞다! 시로네! 시로네였잖아!’
본능에서부터 막혀 있던 답답함이 풀리자 머리가 완전히 열리는 기분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잠시, 그녀의 눈이 붉게 타오르면서 홍안이 발동했다.
어비스 노바의 장막이 순식간에 타 버리고 모든 기억이 홍수처럼 들이닥쳤다.
‘이런 멍청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홍안. 학술적으로는 자기상 기억이라 한다.
카르미스 가문의 혈통은 붉은 눈이 발현되면 특정 시점으로 자신의 상태를 되돌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검을 베는 동작을 기억해 두고 똑같은 동작을 일말의 오차 없이 반복하는 식이었다.
스키마처럼 느낌의 영역이기에 오류의 수정은 즉각적이었고, 이 형질을 통해 카르미스 가문은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한 번의 실수는 발전의 밑거름, 두 번의 실수는 가문의 수치’라는 가훈만 보더라도 그들의 성향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뭐지? 지금 어떤 상태인 거야?’
에이미는 자기상 기억을 토대로 신경 레벨에서 오차를 분석했다.
현재 중력가속도의 영향권에 있고, 몸의 중심은 87.6도 기울어진 상태. 심장박동은 평소에 비해서 1.6배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추락하고 있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다만 섬광을 타고 내려오는 시로네가 보였다. 그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시로네를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바보같이…….’
먼저 다가와 주었는데, 커피를 건넸는데, 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말았다.
두 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차단하듯 에이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시로네!”
무한으로(3)
“에이미.”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을 확신한 시로네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서 다행이었다.
“고마워, 에이미.”
시로네의 눈물을 본 에이미는 불안했다.
‘왜 울어, 시로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그러다가 시로네의 눈빛에서 생의 의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감했다.
“시로네! 안 돼!”
“미안해, 약속을 못 지켜서.”
에이미를 끌어안은 시로네는 이모탈 펑션을 제약 없이 완전히 개방했다.
의식이 무한으로 퍼지면서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안녕…….’
아버지, 엄마, 오젠트 가문의 식구들, 학교의 친구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기에 시로네는 웃으며 떠날 수 있었다.
거대한 빛이 절벽 아래를 가득 채우고, 급기야 추락하는 학생들, 이루키와 네이드, 사드까지 찬란한 백광에 휩싸여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섬광이 솟구쳤다.
400명이 넘는 인원을 동시에 이동시키는 매스 텔레포트였다.
“…….”
땅에 드러누운 아케인은 보고 있었다. 절벽 위로 올라온 섬광이 수백 갈래로 분산되어 다시 지상을 향해 휘어지는 아름다운 장관을.
‘그렇구나.’
1명의 희생, 만 명의 생명.
시로네가 보여 준 모순 속에서 아케인은 비로소 확신했다.
자신이 어떤 세계에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멋진 악당의 인생을 살았는지.
‘평생을 놀아도 아쉬운 놀이터인 것이지. 그렇지 않으냐…… 알페아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한세상을 풍미했던 전설의 대마법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스, 스승님?”
아케인의 주검 앞에서 카니스는 멍했다.
그래도 제자가 아니었던가? 유언조차 남기지 않은 채 끝까지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떠나 버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우리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던 거야?”
바닥을 기어간 카니스가 아케인의 멱살을 붙잡았다.
“일어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차라리 내가 죽으면 되잖아! 왜 나만 남겨 두고 가 버리는 거야!”
아린은 슬픈 눈으로 지켜보았다.
초경에 비친 카니스의 모습은 구정물 같은 액체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 형상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액체처럼 쏟아졌다가 다시 사람의 형태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야, 카니스. 너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저 사람은 우리를 이용했어. 천하의 악당이라고.”
하비스트가 끼어들었다.
“아니, 카니스. 전부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아케인도, 나도, 그리고 언젠가 아린도 죽겠지.”
아린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으나 카니스는 화를 낼 기운도 없는 듯했다.
“왜? 내가 뭘 어쨌는데? 라둠에서 살아서? 재수 없는 자식이라서?”
“나약하니까.”
하비스트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언제까지 남들이 알아주기만 바라면서 살 거냐? 이래서 살아야 한다느니, 이래서 죽어야 한다느니, 그런 건 없는 거야. 아케인은 그냥 자신의 인생을 살다 간 것뿐이라고.”
자신의 인생을 살다 간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과 악보다도.
“스승님처럼…….”
“그래.”
하비스트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 소년처럼.”
400명 학생들이 퍼져 있는 중심에 시로네가 쓰러져 있었다.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켰다.
카니스는 하비스트의 상태를 살폈다.
“좀 어때?”
“어떠냐고 한들, 죽겠지. 생명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테니까.”
아린이 말했다.
“나랑 주종의 계약을 맺으면 돼. 카니스는 정신력을 소진해서 버틸 수 없을 거야.”
하비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뭐? 어째서? 이대로는 소멸하고 말 거야.”
“내 주인은 카니스니까.”
카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그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할 때였다. 이유 따위는 상관없이, 온전히 삶을 책임지는 것이다.
“하비스트, 너를 종속으로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두 번의 배신은 용서하지 않아.”
“크크크, 알아 모시죠, 주인님.”
“카니스! 너무 위험해! 만약 잘못되면…….”
아린은 말을 멈췄다.
액체로 흐물거리던 카니스의 형상이 마치 진흙이 스며들듯 단단해지고 있었다.
‘카니스…….’
언젠가는 그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될까? 그녀가 본 시로네의 초경처럼.
하비스트에게 손을 가져다 대자 얼마 남지 않은 카니스의 생명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내 삶이라면…….’
의식이 끊어진 카니스가 앞으로 쓰러졌다.
한편, 카니스 일행과 떨어진 곳에 알페아스는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학생들을 구하기는 했지만 잃은 게 너무나 많은 기분이었다.
“교장 선생님.”
에텔라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마법학교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기억을 되찾은 학생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고, 알페아스가 저지른 수십 년 전의 실수도 드러나게 된다.
“에텔라, 나는 죄인일세.”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는 삶이라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악입니다.”
알페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아케인과 마찬가지로, 알페아스도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암흑 마법을 대마법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일세. 하비스트는 기억 전이 분야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지. 어비스 노바는 마법협회에 규정 마법으로 등록될 것이야.”
아케인의 주검 앞에서 알페아스는 눈을 감았다.
“언제나 소년이었던 대마법사 아케인. 당신이 걸어온 마법의 길은 후세로 이어질 것입니다.”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하는 에텔라가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교장 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나 또한 처우를 기다리는 처지일 뿐. 징벌의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보다는 오늘의 영웅을 치하하는 게 어떻겠나?”
알페아스는 시로네를 찾았다.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소년이었다. 설령 자신이라도 400명을 동시에 이동시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큰일 났어요!”
시로네가 쓰러진 곳에서 에이미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알페아스와 에텔라가 걸음을 재촉하고, 이루키와 네이드가 반대편에서 달려왔다.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에이미가 먼저 소리쳤다.
“시로네가 숨을 쉬지 않아요!”
신을 만나다(1)
무한의 영역에서, 시로네는 끝없이 퍼져 나갔고 그럴수록 옅어졌다.
세상에 대한 미련마저 망각한 채 만물 모든 것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완전히 무로 돌아가려는 그때, 어떤 강력한 힘이 그를 한 점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