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92
한순간 거핀의 눈에 허무가 차올랐다.
“…….”
하지만 공허함은 잠시, 이내 애정이 충만한 눈으로 연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 보려고 한다.”
‘왜요?’
거핀은 연꽃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공교롭게도 대답을 한 셈이 되었다.
“이어지니까. 끝없이, 이어 나가야 하니까.”
연꽃에서 몸을 일으킨 거핀이 한달음에 넓은 호수를 뛰어넘어 육지에 착지했다.
“너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구나.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거겠지.”
연꽃과 소통은 할 수 없었지만, 4만 년 동안 버틴 식물에 변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네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면, 또한 이해한다면, 너에게도 마음이 깃들었다는 뜻이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거핀이 덧붙였다.
“바깥과 연결되었다는 의미다.”
‘바깥요?’
거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이 세상은 그만 문을 닫아야 하는 건지도 몰라.”
수많은 고통이 가득 차 있는 세계.
“하지만 그래도 이어지고 싶다면…….”
4만 년의 우정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거핀이 고개를 숙였다.
“인간을 도와 다오.”
인간.
‘…….’
선과 악, 공과 애,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는 존재.
연꽃은 고민했다.
그리고 거핀이 몸을 돌려 멀어지는 순간, 꽃잎에서 황금빛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싱그러운 꽃향기를 발산하는 소녀가 거핀의 방식대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화족의 탄생을 뒤로하고, 거핀은 오지의 숲속을 차분하게 거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확히 날짜를 세지는 않았지만 체감하기에 대략 4만 년 정도가 흘렀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까마득한 시간.
하지만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거핀에게는 인간이 점심때를 맞추는 정도에 불과했다.
“4만 년이라. 조금은 변했을까?”
처음 이 행성에 왔을 때 원시 부족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종족의 유지력은 시스템의 우열로 정해지고,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대가.
‘어쩌면 인간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거나, 어쩌면 아무도 없거나.
‘그렇게 되면 또 혼자로군.’
절망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출구를 발견한 거핀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기대하지 말자. 괜히 설렜다가 울어 버릴지도 몰라.’
애써 마음을 달래며 숲의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르는 순간 거핀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하하…….”
태양에 반사되는 찬란한 황금빛.
‘당연하지.’
우뚝 솟은 성을 중심으로, 인간의 문명이 지평선 끝까지 뻗어 가고 있었다.
***
망상의 9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에서 빠져나온 일행은 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설마 공간을 벤 것인가?’
그런 검술을 구사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
세인은 중지에 낀 반지를 보았다.
‘자신의 상상으로 망상을 베어 버린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를 착용한 모두가 히든 코드에서 풀려난 것은 당연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세인이 겪은 망상은, 철륜안을 지닌 상태였음에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쿠안은 시이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민의 마음도…….’
세인은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아르민이 입술을 깨문 채로 잔뜩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사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두 눈을 잃었던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시이나에게 먼저 마음을 던지지 못했던 것?’
아르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그것으로, 세인은 후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 일이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시이나를 떠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미안하다는 의미는.
‘……그 망상에서 행복하고 말았다는 것일 테지.’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자격이 있는 건 쿠안뿐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렸을 때, 쿠안은 아르민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허억! 허억!”
검을 한 번 휘두른 것으로 가쁜 숨을 내쉴 만큼 쿠안은 약하지 않았다.
‘어떤 망상이었기에?’
무의식에 간섭하는 시옥의 코드는 쿠안을 가장 행복한 사건으로 인도했을 터.
‘아마도 부상당하지 않은 몸이었을 테지.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그녀와 만나…….’
세인은 생각을 멈췄다.
‘그렇구나.’
오직 쿠안만이 망상의 9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행복한 현실이 오히려 그에게는 불행인 것이다.’
그런 모순.
쿠안은 시이나를 지키기 위해 육체를 파괴했다.
그만큼 사랑하기에, 쿠안의 입장에서는 시이나가 자신 같은 놈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자식아.”
천천히 몸을 일으킨 쿠안이 망상의 9시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쿠안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결말이, 시이나에게는 끔찍한 비극이 되는 모순.
결국 그녀가 자신과 함께 행복하게 웃는 최악의 결말을 경험한 쿠안의 눈은, 흡사 귀신이었다.
코드가 깨져 불쾌한 상태로 있던 망상의 9시가 표정을 풀고 웃었다.
“하하! 그녀? 나는 누군지도 몰라. 모든 망상은 내가 아니라 네가 만드는 거니까.”
시옥이라도 마음의 파동을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탄께서 저 여자의 능력을 탐내는 거지.’
신의 주파수.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쿠안이 비대칭의 극의를 발동하며 모두의 인지 속에서 사라졌으나, 나태의 4시 또한 당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쿠안의 질풍 같은 베기가 시옥의 곁을 계속해서 스치고 지나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그때 다크서클이 짙은 깡마른 소녀가 쿠안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재수 없는 자식! 평생 불행해라!”
복수의 10시였다.
‘히든 코드는?’
불쾌한 일이 벌어진다.
시옥 중의 누군가가 내뱉은 침이, 기묘하게 움직이는 쿠안의 눈에 맞았다.
“크윽!”
‘어떻게든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군. 확실히 이건 치트지만, 고작 침이라는 건…….’
불행의 발생 과정은 율법을 따른다는 것.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아. 하지만 망상에 빠졌을 때, 다른 시간들이 9시를 지원했다.’
히든 코드가 결합될 수 있다는 것.
‘불복의 2시는 모든 종류의 확률에서 승리한다. 만약 이것과 결합한다면…….’
끔찍한 불행이 닥칠 수도 있었다.
“리리아! 쿠안을 지원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리리아는 이미 사력을 다해 지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 돼. 율법의 상한선을 들켰어.’
이미 경험한 것 이상을 내놓지 않으면 나태의 4시의 치트에 대항할 수 없다.
눈웃음이 푸근한 배불뚝이 아저씨가 소리쳤다.
“껄껄껄! 이제 끝났군!”
절정의 11시.
“이쯤에서 제안하지. 1명만 남겨 주면 다른 사람의 목숨은 보장하겠네.”
그들이 원하는 건 메이레이였다.
“단.”
절정의 11시가 혀를 날름거렸다.
“남은 자는 나랑 놀아야 되겠지만.”
세인은 마음의 파동을 기다렸다.
‘히든 코드.’
욕망의 추구에 한계가 없다.
잠을 자거나, 자지 않아도 되고, 3천 두의 소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며, 평생 성적인 쾌락에 심취해도 정력이 고갈되지 않는다.
‘대체 이것들은…….’
시옥의 거래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히든 코드를 듣자 머리털이 곤두섰다.
메이레이가 마지막 파동을 전했다.
‘허무의 12시.’
주름이 깊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중년의 남자였다.
‘히든 코드는?’
시옥이 만든 모든 현상을 초기화시킨다.
‘해방이 아니야.’
끝없이 괴롭히다가 질리면, 초기화시켜서 처음부터 다시 즐기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어.’
시옥 전원의 히든 코드를 파악한 세인은 확신했다.
‘율법에 없는 시간 0.666초. 즉 사건 자체가 사라지는 황당한 현상은…….’
12명의 치트가 전부 결합되어 구현되는 것이다.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하비츠.’
세인이 시선을 돌린 곳에, 하비츠가 풀린 동공으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손가락 자르고 싶다. 소장 먹고 싶다. 비명 듣고 싶다. 눈알 핥고 싶다.”
‘그런 거였어.’
세인의 눈에 혐오감이 담겼다.
‘열두 가지의 치트. 이런 권한을 가진 채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그 뇌가, 그 정신이…….’
정상일 리가 없는 것이다.
하비츠가 말했다.
“한번 해 볼까? 우선 손가락부터.”
하비츠가 배니싱을 발동하는 것으로, 마침내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세인, 아르민, 메이레이가 하비츠의 능력에 대응하는 가운데 에덴이 방어막을 펼쳤다.
‘반드시 버틴다.’
리리아가 율법을 증폭시키자, 쿠안이 기상천외한 동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편견의 5시가 소리쳤다.
“저 검사를 믿지 마! 여자의 속옷이나 훔치는 음흉한 변태다! 너희들의 속옷도 훔쳤을 거야!”
에덴이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하지 마! 쿠안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집의 3시가 반박했다.
“저 녀석의 얼굴을 봐! 그리고 몸 상태를 보라고! 결론은, 저 녀석은 변태라는 것이다!”
리리아는 필사적으로 버텼으나, 머릿속은 이미 거대한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때 내 속옷이…….’
메이레이가 하비츠의 추적을 포기하고 쿠안의 마음을 모두에게 전했다.
“윽!”
진실이 밝혀지자 일행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마음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안 돼. 안 된다.’
쿠안의 분노는 폭발 일보 직전이었으나, 그럴수록 머리는 차가워졌다.
‘내 움직임으로 시옥을 뚫을 수가 없어.’
아직은 신의 주파수로 하비츠의 행동을 파악할 수 있지만, 반대로 심각한 단점이 있었다.
‘만약 하비츠가 또다시 사악한 마음을 폭발시킨다면…….’
에덴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방어막이 사라지면 남은 자들은 시옥의 제물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