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02
“흥, 인간의 불완전한 사고와 비교하지 마라. 우리는 가장 차가운 종족. 어떤 정보도 왜곡시키지 않아.”
모든 정보는 0과 1의 조합으로 저장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도 중립적으로 볼 수 있겠군. 나를, 인간을 도와줘.”
카라토르사가 얼굴을 드밀었다.
“우리는 신과 인간, 누구의 편도 아니다. 특정 존재의 의도가 시간의 흐름에 끼어드는 걸 막을 뿐이야.”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변하지 않는 세계.”
“이해력이 떨어지는군.”
카라토르사는 답답했다.
“네가 무언가에 개입하는 데 성공했다면, 앙케 라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존의 시간은 붕괴될 거고, 그때부터는 감당이 안 돼.”
“만약 내가 아카식 레코드의 로그를 너에게 전송해 줄 수 있다고 한다면?”
12사도의 눈에 불이 켜지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라토르사가 되물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로그? 태초 이래 벌어진 모든 사건, 모든 원자들의 움직임을 말하는 건가?”
“그래.”
“어떻게?”
카라토르사의 목소리는 도발적이었다.
“네가 바깥의 신호를 구현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데아라고 하지. 하지만 결국 이데아도 이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신호야.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는 이 세계를 꿈꾸는 자, 오직 앙케 라의 것이다. 너는 거기에 닿을 수 없어.”
“닿을 수 있어.”
거핀이 하늘을 가리켰다.
“바깥에서 직접 쏴 버릴 테니까.”
“……바깥?”
고개를 수직으로 쳐든 카라토르사는 어두운 하늘 끝에 있는 우주를 상상했다.
긴 정적 끝에 그가 중얼거렸다.
“우주 바깥으로 나가서…… 그곳에서…… 나에게…… 로그를 전송한다고?”
“그래. 어떤 세계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성공시킬 거야. 로그를 해킹해서 너에게 쏜다. 대신, 내가 성공한다면 너는 아카식 레코드의 로그를 토대로 시간의 흐름을 지켜 줘.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게.”
“광자계 이탈. 네가 사라지면…….”
카라토르사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앙케 라에게는 유일한 방해자가 제거되는 셈이지. 그때부터 리셋을 시도할 거고,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오류를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 네가 막아 줘야 해.”
“하지만 의문이군.”
카라토르사가 다시 거핀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시간을 수호한다고 한들, 그럼 앙케 라는 누가 막을 수 있는가? 너는 이미 없잖아?”
“헥사.”
거핀이 미소를 지었다.
“이카엘과 나의 아이가 이 세계에 있을 거야. 이름은 없어. 짓지 않을 거야.”
그럴 자격조차 없는 부모니까.
“그 아이가 세계의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그때 모든 것을 전해 주었으면 해. 이 세계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를.”
카라토르사도 이제는 현실적이 되었다.
“앙케 라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 헥사는 리셋에서 가장 먼저 제거될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하려는 거야. 헥사는 바깥 세계의 신호를 구현한 것, 거기에 초기화를 시키면 원인 자체를 제거할 수 있어. 그럼 앙케 라도 손대지 못해. 거의 준비가 끝났다. 차원의 벽과, 그것을 지킬 후계자까지…….”
“잠깐. 잠깐만.”
카라토르사가 말을 끊었다.
“로그를 이탈한 상태에서 리셋을 시도하면 두 번째 시대에는 너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아. 밑사건이 생긴다. 사용자들은 데자뷔를 갖게 되고, 천사라면 위화감까지 느낄 수 있어.”
“그래. 아카식 레코드에 균열이 생기겠지. 내 이름이 새겨진 유적들을 남겨 뒀어. 꼭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네가 역사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야.”
“흐음. 사용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리셋 자체를 긍정하게 만들겠다는 거로군.”
“그게 유일한 해법이지. 네가 말린다고 해도 나는 리셋을 한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내가 전송한 로그를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알겠다.”
12사도가 인간의 형태로 땅에 내려오고, 카라토르사가 몸을 끝까지 일으켰다.
“시간의 사도가 약속했다.”
“고마워.”
몸을 돌린 거핀이 헥사의 빛을 띄우는 그때, 카라토르사가 물었다.
“허무하지 않을 자신 있나?”
“…….”
“바깥에서 바라보는 이 세계는 한 줄기 신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것을 보면서도 네가 이곳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 너에게 소중했던 모든 게 거짓이라면 말이야.”
“할 수 있어.”
통합적 정신 체계를 이룩했던 가이아인, 그 찬란한 정신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거짓이라고 해도, 설령 그 이상의 허무한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랑할 수 있어.”
거핀이 가슴을 짚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며, 사랑하며 느꼈던 모든 것들은 진짜니까. 내 안에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
떠나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니다.
“나는 준비가 됐어. 이 세계에서 깨달은 것을 가지고 돌아갈 시간이 된 거야. 또한 그것이야말로…….”
거핀의 육체가 빛의 입자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진 신이라는 거겠지.”
음성만이 대기 중을 떠도는 가운데 카라토르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음을 가진 신이라…….”
세계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며 끝없는 공겁으로 수렴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역으로 올라간다.”
무한을 넘어.
모든 세계에 마음을 가진 신이 깃들일 수 있도록.
역사의 시대(4)
***
‘박지경.’
카라토르사와 거래를 끝낸 거핀은 초에니 바르도를 통해 이면 세계로 들어갔다.
마의 세계는 현실의 우주만큼 광대하지만 내부의 지형은 완전히 달랐다.
“험한 여정이 되겠어.”
미로가 있는 행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핀이 선택한 루트는 72개의 지옥을 넘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마신 베히모스.”
인간의 마와 달리 타락천사들의 마가 이면 세계에 흘러들어 탄생한 존재.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명확한 개념에서 태어난 마라와 구별된다.
“종속되지 않는다.”
마라의 상징인 뿔조차 없는 그는 긴 세월을 떠돌다가 미로의 행성에 정착했다.
물론 이면 세계의 기준이었다.
“오랜만이야. 짐승의 왕, 베히모스.”
거핀의 눈앞에 산처럼 거대한 덩치에 7개의 눈이 대칭형으로 박혀 있는 베히모스가 버티고 있었다.
“거핀, 네가 날 만나러 왔다고?”
“72개의 지옥을 넘었지. 아무리 불러도 초대를 안 해 주기에 말이야. 일부러 피한 거냐?”
“……흥.”
새침하게 고개를 튼 베히모스가 창보다 긴 손톱을 세워 옆을 가리켰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앉아. 간만에 술이나 마실까? 좋은 술을 하나 구했지.”
“부탁이 있어서 왔어.”
거핀이 뼈로 만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자 베히모스가 현실에서 공수한 술병을 땄다.
“알고 있어. 이미 은퇴했지만 그래도 내 권력은 이면 세계에서 먹어 주거든.”
베히모스는 너무 오래 살았고, 자신에게 흘러드는 마를 차단하는 것으로 은퇴했다.
지금은 그저 인간 세계에서 하급 악마나 하는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
그럼에도 마족들은 여전히 루시퍼 다음가는 원로로서 베히모스를 인정하고 있었다.
“마셔 봐. 괜찮더라고.”
베히모스가 손톱 끝으로 술병을 기울이자 거핀도 사양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아이를 낳았어.”
베히모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언제? 내가 알기로…….”
“그래, 죽었지. 하지만 죽지 않았어. 이카엘과 나는 여전히 이어져 있으니까.”
베히모스가 덩치에 비해 한 방울도 되지 않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 말했다.
“아가페인가 뭔가 하는 그거? 마음의 신호로 생물을 창조하는 능력이었나?”
마족들은 끔찍이 싫어하는 단어였지만, 이미 은퇴한 베히모스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 아이는 이미 죽었지만 아가페의 능력에서 육체는 중요하지 않아. 단,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
“인간이 아닐 거야.”
“…….”
베히모스는 술병을 따며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하면, 헥사와 아가페를 결합하면 인간의 육체를 구현할 수 있다.
“정신의 문제인가?”
거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나와 이카엘을 생각해 보면, 이 세계를 기준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자들이지.”
“흥, 고매한 척하기는.”
베히모스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너도 이면 세계에서 수많은 인간의 삶을 지켜봤으니 알고 있겠지. 인간은 선악공애의 성향을 모두 가진 존재야. 슬프다가도 웃고, 아프다가도 행복하고. 그런 모든 경험들이 어우러져서 이데아라는 자신의 관점을 찾게 되지.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는…….”
베히모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魔가 없다는 거로군.”
“바로 그거지. 나는 이미 통합적 정신 체계를 이룩한 가이아인이고, 아이의 엄마는 이 세계의 최초 개념인 이카엘. 마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그래서 말인데…….
거핀이 본론을 꺼냈다.
“네가 내 아이의 마가 되어 줘.”
술잔에서 시선을 돌린 베히모스가 이면 세계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말이야.”
그리고 다시 거핀을 가리켰다.
“그거 너무 완벽주의 아니냐? 마가 없는 인간이 1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을 거야. 그게 너와 이카엘의 아이답지. 굳이 표준 모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완벽한 건 아가페지 내가 아니거든. 가이아인의 통합적 정신 체계는 현재의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완성된 거야. 그게 없이는 절대로 울티마를 깨달을 수 없어.”
“기준이 없어진다는 거로군.”
“바로 그거야. 진정한 선이란 단순히 착한 게 아니라 내면의 악을 누를 수 있는 의지. 진정한 애란 바보처럼 퍼 주는 사랑이 아니라, 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던지는 각오. 선악공애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인간은 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어.”
“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선도 깨닫지 못하리라?”
“그런 거지. 선악공애의 순환 속에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인간에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이데아. 철학은 수단에 불과해. 궁극적으로는 선도 악도, 공도 애도 없는 것.”
거핀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봐.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깨달았으니까 최고의 악당인 너와 술도 마시고 있는 거야.”
고개를 돌린 베히모스가 입맛을 다셨다.
“나는 참회하지 않아.”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그리고…… 이제 와 그런 생각도 유치하잖아?”
“큼.”
베히모스는 옆에 놓인 술병을 전부 쓸어 담아 입속에 넣고 아드득 깨물었다.
“그러니까 날더러 죽으라는 거군. 루시퍼를 보내 버리더니, 이제 나까지 묻어 버리려고 들어?”
“때가 됐어. 알잖아?”
베히모스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마를 차단했을 때부터 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괜찮겠냐? 네 자식 말이야. 어떤 이유로든 나를 끄집어낸다면, 그놈을 찢어 죽일 수도 있어.”
“가능하면…….”
거핀이 씩 웃었다.
“최고로 세게 해 줘.”
“큭큭큭큭.”
거대한 몸체를 들썩거린 베히모스가 거핀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말했다.
“때가 되면 불러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마중을 나가 주지.”
술잔이 부딪쳤다.
***
다시 천국으로 돌아온 거핀이 향한 곳은 이카엘과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곳이었다.
처참한 풍경이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만큼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정했어.”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이카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장소.
거핀의 손바닥 위로 헥사의 육각형이 떠오르더니 빛의 연기로 풀어졌다.
오래전부터 보관해 두었던 이카엘의 눈물이 맑은 빛을 내며 눈앞에서 떠다녔다.
“확률은 반반이겠지.”
기술적인 문제는 아니다.
헥사의 일종인 아가페는 마음을 결합해 생물을 탄생시키는 기적의 능력.
만약 이카엘이 거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신호는 절대로 합쳐지지 않을 터였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 이카엘.”
거핀이 두 팔을 벌리자 미라클 스트림에 담긴 이카엘의 눈물이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사랑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사랑, 아가페.
미라클 스트림이 크로스의 형태로 폭발하면서 우주의 끝과 끝을 연결했다.
찰나의 순간 일어난 기적을, 시로네는 거핀의 시야를 통해 끝없이 음미했다.
“아…….”
빛은 말 그대로 우주를 가득 채웠고, 생물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응축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백광을 올려다보는 거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