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03
“이카엘.”
아가페가 성공했다는 것은,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고마워.”
자신의 전부를 던졌고, 그녀의 전부를 받았다.
“우리의 아이.”
눈물을 글썽이는 거핀이 백광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특별한 그림자를 보는 순간.
‘이것이 헥사.’
오메가의 전송이 끝났다.
시로네가 자신의 탄생 과정을 음미하는 동안 카라토르사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까지 네가 받은 정보가 최초의 우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오메가가 밀려들었다.
“이건?”
우주가 초기화된 횟수만큼 다시 시작되는 로그였다.
‘대단하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방대한 정보지만, 우주 전체에 비하면 달라진 사건은 0.1퍼센트 미만이었다.
‘거핀 말소 상태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최초의 역사를 지켜 내고 있어.’
리셋 이후 앙케 라는 자신의 오류를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의지를 따르는 천사들과 시간을 지키는 사도들의 전투가 11감을 통해 전해져 왔다.
“후우.”
무등룡의 한숨을 끝으로, 마침내 오메가의 모든 기록이 시로네에게 넘어갔다.
고개를 세울 기력도 없는지 카라토르사가 자세를 낮추고 턱을 바닥에 대었다.
시로네는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카라토르사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로그를 전송받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에 하나 다른 존재에게 넘어갔을 경우 우주의 균형이 급격히 기울기 때문이다.”
시로네는 이해했다.
얼마나 막중한 책임인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카라토르사가 느낄 해방감도.
“앞으로 어떤 존재가 이 세계를 관철시키든, 신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한다. 닫히거나, 이어지겠지. 그게 바로 거핀이 정의한 오메가 999년이다.”
세기말의 시대였다.
“그리고 내가 전해 줄 수 있는 로그도 여기까지야. 역사란 지나온 사건이기 때문이지.”
오메가에 시로네, 즉 헥사는 등장하지 않았다.
“네가 탄생한 이후의 로그를 알게 되면 그것은 이미 너의 삶이 아니게 된다. 지금의 너로 있을 수 없을 거야.”
시로네는 수없이 많은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울티마에 도달했다.
‘하지만 로그를 알게 되면 판단의 근거는 붕괴된다. 즉, 경지가 깨진다는 얘기.’
시로네가 살아가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친구들의 모든 사건과 마음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어.’
이것으로 충분했다.
심층에 마련되어 있는 지식의 서고는 완벽한 5차원의 큐브로 탈바꿈해 있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입자의 작용을 통째로 받아들였기에 학문이 말하는 수식이나 정의는 필요치 않았다.
시로네는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펼쳤다.
‘어떤 것을 떠올렸을 때.’
시공간 통합체인 5차원 큐브가 회전하면서 무한의 용적 속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낸다.
‘걸리는 시간은…….’
없다.
5차원 큐브 안에서 시간은 조작 가능한 물리량이다.
‘그 전지를 헥사와 결합시키고.’
시로네의 손바닥에서 육각형의 빛이 떠오르더니 맑은 소리를 내며 깨졌다.
“온 마음을 던지면.”
빛의 연기가 회전하더니 행성에 없는 꽃이 되어 손바닥 위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
카라토르사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가운데 시로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꽃이 수만 개의 빛으로 흩어져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단한 바닥에 오색찬란한 꽃들이 피어나고, 금세 동굴 안이 꽃향기로 가득 찼다.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적이 일어난다.”
신의 뇌.
미라클 스트림의 발동 원리였다.
거핀이 남긴 것(1)
카타토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네의 미라클 스트림은 그가 알고 있는 거핀의 능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제대로 이어졌구나.”
“응. 고마워.”
오메가를 경험한 시로네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신비는 없었고, 자연히 말도 편해졌다.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가이아인의 정신은 이 시대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고 존경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거핀을 대신해서 감사를 전할게.”
거핀 말소부터 대정화기에 이르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시간을 지켜 낸 자들이었다.
“사명을 다했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감회가 깊은지, 카라토르사는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오메가를 알았다고 끝난 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존재하는 시대의 역사는 알려 줄 수 없다. 앞으로도 너는 자신의 판단으로 세계와 싸워야 해.”
“각오하고 있어.”
“다만…….”
카라토르사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며, 두 눈이 똑바로 시로네를 응시했다.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거핀이 유일하게 허락한, 네가 존재하는 시간대의 역사가.”
“거핀이 허락한…….”
시로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거핀이 광자계를 이탈하기 직전, 또한 네가 갓 태어난 시점의 사건이다. 헥사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이기에 현재의 너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거핀은 양해를 구하라고 했다. 나도 사건의 내용은 몰라.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가지고 있는 로그를 지울 것이다.”
헥사를 남겨 두고 떠나는 상황에서 굳이 자신의 감정 따위를 전하고 싶지 않은 것.
‘부모의 입장이라는 거겠지.’
그래도 알고 싶었다.
‘친아빠라면서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오메가에 시로네는 등장하지 않기에, 거핀과 그의 접점은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거핀이 남긴 것.”
작게 중얼거린 시로네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응. 알고 싶어.”
카라토르사의 눈에 다시 황금빛 불이 켜지면서, 오메가의 어떤 기록이 밀려들었다.
이스타스에 거핀의 문이 설치되고, 20인의 심판이 머지않은 시점에 미로는 천국을 찾았다.
“그 아이야?”
타락의 고원.
전쟁의 여파로 모든 게 쓸려 나간 풍경 속에서 거핀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응.”
고개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마주친 거핀의 입가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겼다.
“어디 봐.”
미로가 아이의 겉싸개를 내리자 보름달같이 밝은 아이가 웃고 있었다.
“흐음.”
거핀이 피식 웃었다.
“예쁘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이카엘과 내 아이인데 잘생긴 게 당연하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그렇게 아까워서 어떻게 남한테 주고 떠나려고?”
“…….”
거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라만상을 다 꿰뚫어도 자식은 애달픈 것인가.’
안타까운 마음에 미로가 다시 아이를 살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래 뭐, 이카엘 90퍼센트 닮았네. 아가야, 너 운 좋은 줄 알아. 아빠 닮았으면…… 어휴.”
거핀이 황당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내 아들이구만! 잘 비교해 봐. 이게 어떻게 10퍼센트야?”
“아니, 얼굴은 100퍼센트 이카엘. 남은 10퍼센트는, 흐음, 아마도 여기일까?”
미로의 검지가 겉싸개를 천천해 벌리더니 아이의 하체 쪽으로 향했다.
로그를 받아들이는 시로네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미로 씨, 제발…….’
단지 영상이 아닌 11감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그녀의 생각까지도 훤히 보였다.
‘진짜로 보려고 하고 있어.’
그때 거핀이 황급히 몸을 뒤틀었다.
“이거 왜 이래? 우리 아들은 너한테는 못 줘.”
미로가 콧김을 내뿜었다.
“뭐야? 언제는 유일무이한 후계자이자 세계를 지킬 마지막 수비수라더니, 전부 허풍이었어?”
“몰라. 아무튼 우리 아들은 절대로 안 돼! 정상적인 여자랑 정상적인 연애를 할 거야.”
미로의 눈이 퀭해졌다.
“아저씨, 어차피 곧 기억하지도 못하거든요?”
광자계를 이탈한 거핀이 로그를 지우면 이곳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우쭈쭈, 착하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시로네를 어르던 거핀이 문득 다정한 눈빛을 드러냈다.
“이카엘을 닮았다고…….”
거핀의 감정이 궁감을 통해 들어오자 시로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그리울까.’
거핀의 눈빛을 발견한 미로가 표정을 풀고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시작해야지.”
“……응.”
그로부터 100미터를 전진하자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종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다.
“이게…… 바벨탑?”
거핀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망한 것도 이해해. 그래도 한때는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았어. 그리고 거대했지.”
신에 근접했었다.
“바벨탑 전투. 제2차 항전에서 가이아인은 공식적으로 신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역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지.”
“그 아이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
“생각해 보면 가이아인은 딱히 고향이랄 게 없는 것 같아. 울티마를 깨달은 이후부터 공겁을 거부하고 신에게 도전했으니까. 뿌리조차 사라지는 지금, 어쩌면 이곳이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거핀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들아, 이 탑에 깃든 가이아인의 마음을 기억해라. 비록 우리는 패했지만, 끝없이 도전했다. 절대로 세계에 굴복하지 않았어.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마지막까지 수호했다.”
바벨의 내부로 들어간 거핀과 미로는 끝없이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시로네는 깨달았다.
‘정말로 왔었구나.’
천국 프로젝트에서 바벨에 들어왔을 때, 데자뷔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이유였다.
미로가 물었다.
“무슨 보안이 이렇게 철저해? 예전에 가이아인이 이곳에 살지 않았어?”
미라클 스트림을 항시 발동한 상태로 보안장치를 무력화시키며 거핀이 대답했다.
“천국의 소행이야. 코드를 보니 카리엘이군. 본래 천국의 기술력은 가이아인의 것이야. 지금은 메카라는 신민이 그 유지를 이어 나가고 있지.”
“……안전한 거겠지?”
미로가 경계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거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봤자 기술일 뿐이지. 가이아인 고유의 정신만큼은 절대로 모방할 수 없어.”
미라클 스트림의 연기가 퍼져 나갈 때마다 복도의 붉은 경고등이 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조종실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지상과 천장에 설치된 원뿔 형태의 기둥이었다.
그 너머에는 카리엘이 만들었을, 거핀에게는 조잡해 보이는 갖가지 기계장치들이 있었다.
“바벨탑은 울티마 시스템으로 가동되지. 천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야.”
원뿔 사이에 손을 넣고 울티마 시스템을 발동하자 강력한 전기에너지가 응축되었다.
동시에 모든 장치에서 빛이 나며 바벨이 가동되더니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메인 시스템 접속. 코드명 바벨 프로젝트.”
미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화면에 운영 프로그램의 논리회로가 떠올랐다.
“이제 와서 가동시켜서 뭐 하게?”
“그렇기는 하지만.”
거핀도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어쨌든 나는 마지막 가이아인이니까.”
이 세상에 우리가 존재했었다.
“물론 헥사가 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 기록 또한 무로 돌아가겠지만…….”
그렇기에 오메가이다.
“이번에도 그냥 던지는 거야. 내 마음을.”
생각이 텍스트로 변환되면서, 화면에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문자가 적히기 시작했다.
미로도 읽을 수 없었다.
‘율법의 수 1.’
그렇기에 오직 거핀의 언어였다.
“가이아인은 개성에 따라 모두 다른 문자를 사용했지. 하지만 소통은 문제가 없었어. 결국 이 세계를 관통하는 신호는 하나니까.”
그것이 궁감, 울티마 시스템이다.
따라서 훗날 시로네가 이곳에 오게 된다면 거핀의 기록을 읽을 수 있으리라.
‘앙케 라가 제2차 리셋을 시도했을 때는…… 대략 오메가 412년 정도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