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27
그 신이 자신을 희생한 끝에 세상 바깥에서 쏘아 보낸 한 줄기의 빛, 희망, 메시아.
헥사.
‘그것이 나라면.’
어디까지나 차가운 세계를 부정하며, 모두의 분노를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카엘.”
돌이킬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조건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거대한 사랑이 이카엘의 성광체로 스며들었다.
“아…….”
이카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온 우주가 그녀에게 괜찮다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확언해 주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 천사다.’
마음의 궁극, 절대 박애의 사랑을 1명도 아닌 2명에게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일어나요.”
정화가 끝난 이카엘의 마음속에 더 이상 죄책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카엘은 시로네가 안쓰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무런 대가 없이,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죠?”
“모르겠어요.”
시로네는 솔직히 말했다.
“제가 강해져서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위선일까요? 어쩌면 거핀이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율법과 달리 마음은 돌이킬 수 있고, 시로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나네의 말처럼 현실은 고통스럽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번뇌도 없겠지만…….”
또한 존재했기에 이렇게 만나지 않았는가?
“저는 우주가 닫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것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고 믿어요.”
“그래요.”
이카엘은 납득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제가 돕겠습니다. 시로네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싸울 겁니다.”
정화를 끝낸 그녀의 진심이었기에 시로네는 더 이상 어려워하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옳을 수 있는지 나네가 말한다면, 저는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요.”
시로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 아느냐고.”
***
이루키가 바슈카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 정도 충격의 여파가 가시고 정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루키.”
시로네가 마중을 나왔다.
1시간 전까지 마차에서 함께 있었던 시로네를 문밖에서 보자 기분이 묘했다.
“분위기는 어때?”
“조금 진정됐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이미르라는 강적을 봉인했지만 오대성 2명이 사망했고 발키리 군단장 가르시아까지 잃었다.
두 사람은 토르미아의 왕성 크레타로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연합군의 피해는?”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는 않았어. 조만간 육군사령부에서 발표가 있을 거야.”
포니가 기다리고 있는 왕성에 도착하자 에이미와 네이드가 달려와 이루키를 끌어안았다.
“이루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로네가 미네르바에게 물었다.
“태성께서는 어때요?”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 당연하지. 가이아의 모든 힘을 5개의 행성에 집중시켰으니까. 일단 그것으로 이미르를 막았다고 해도, 더 이상 태성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시로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엇보다 마계가 문제예요. 군단장의 위치는 대부분 찾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미네르바는 즉각 알아챘다.
‘그렇군. 시로네가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지.’
현재 시로네는 12사도가 먼저 선점한 세계 각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
마족 군단장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수도,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사고의 회로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 신의 뇌는 시로네와 유사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시로네가 미소를 짓는 모습에, 미네르바는 찔린 듯이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태성께서 바슈카에 오신 이유도 이것 때문이야. 더 이상 마계에서 안전할 수 없어. 그래서 리안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셨지.”
“나?”
리안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 아직도 마족의 잔당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남아 있어. 게다가 마계를 개방할 수 있는 군단장들도 건재하지. 아마도 거기에 대한 대책 때문일 거야.”
“흐음.”
그 대책이라는 게 무엇인지 리안이 생각하는 그때, 가올드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컥! 컥!”
피는 고작 한 줌에 지나지 않았으나, 더 이상 흘릴 피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여태까지 그의 수발을 들었던 미네르바가 미로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야, 이제 네가 맡아. 나도 질렸으니까.”
미로는 바닥에 웅크린 채 연신 기침을 토해 내는 가올드를 쳐다보다가 몸을 틀었다.
“흥.”
그리고 상관하기 싫다는 듯 구석으로 걸어가 등을 기대자, 강난이 눈을 부릅떴다.
“저게 진짜!”
세인이 강난의 어깨를 짚었다.
“됐어. 우리가 하지.”
세인이 가올드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자 강난이 반대편으로 다가와 몸을 세웠다.
“좀 쉬어. 줄루가 있는 방으로 데려다줄게.”
현재 줄루 또한 이미르에게 공격을 당해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문으로 향하는 가올드는 홀을 나설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좇던 미로가, 문이 닫히자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진절머리 나, 진짜.”
전천투영의 무결점 심상에 도달한 순간부터 가올드의 고통은 그녀에게 충격을 줄 수 없었다.
‘이제 끝났어. 네가 아무리 나에게 집착해 봤자, 너만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단지 화가 날 뿐이었다.
“나도 들어가서 쉴게. 오늘은 해산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지금도 세계 각지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마족 전쟁, 하비츠 암살, 꽃밭의 붕괴, 원소 폭탄, 천국의 군대, 이미르의 봉인…….’
이 모두가 고작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피곤해.’
모두의 눈이 퀭해졌다.
***
바슈카에서 북쪽으로 21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연합군의 시체가 들썩거렸다.
돌을 씹는 소리에 이어 시체가 뒤집어지더니 파이몬이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꺼어어어억!”
목구멍 밖으로 점액에 뒤섞인 흙이 분수처럼 한도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하악! 하악!”
목을 흔들며 땅 밑에 박힌 몸을 빼내려 애쓰는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이 사라졌고 코는 문드러졌으며, 유일하게 움직이는 기관은 턱관절이 전부였다.
“카악! 카악!”
그래도 마족의 최고 장수인지라, 쉬지 않고 목을 흔들자 몸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보다 100배 이상 부풀어 오른 배 아래로 흙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됐다. 됐어.”
시로네의 아가페에 직격을 당한 순간 규정외식 밴으로 가장 멀리 이동한 그녀였다.
모든 운동량을 총동원해서 도착한 곳은 바로 이곳 지하의 120미터 지점.
빛에 녹아내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빛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한 듯했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야훼!”
마 또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왔다면, 시로네의 박애는 마의 특징인 극단적인 감정을 가장 안정적인 상태로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확실히 치명적이다.’
그녀는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 남은 상태였고, 흙을 파먹은 탓에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꾸엑! 꾸엑!”
여러 번 흙을 토했으나 차라리 뱃가죽을 찢어서 빼는 게 더 편할 듯했다.
“후후.”
조금 살 만해지자 파이몬이 밤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깔깔 웃었다.
어쨌거나 살았다.
“내가 이긴 거야! 야훼!”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조만간 각 대륙으로 흩어진 군단장들이 마계를 개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겼어.”
그녀의 육체가 썩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병원病原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질병은 바람을 타고 서남쪽으로 흐를 것이고, 급기야 온 세계를 감염시킬 것이다.
“사탄이시여.”
녹아내려 두꺼운 눈꺼풀로 달빛을 어림하는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온 세계를 절망으로 이끄소서.”
파이몬의 시체가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형체 없는 사신이 되어 바슈카로 날아갔다.
질병의 이름은 감정병(혹은 Emotion scale).
뇌의 특정 상태에 작용해 끔찍한 비극을 유발하는 전대미문의 재앙이었다.
마계 지옥(2)
***
달이 떴으나, 4명의 대천사가 싸운 장소에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가장 큰 흔적은 각기 다른 세 방향으로 10킬로미터 이상 뻗어 나간 거대한 홈이었다.
그리고 그 세 방향에서 사티엘과 유리엘, 레이엘이 거의 동시에 걸어왔다.
중앙에서 마주친 3명의 대천사들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유리엘이었다.
“……떠났군.”
사티엘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레이엘이 그녀의 손목을 빠르게 붙잡았다.
“침착해요.”
“놔.”
사티엘이 유리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진심이야. 놓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너부터 나에게 소멸될 테니까.”
유리엘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패전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는 것만큼 졸렬한 것은 없지.”
“남에게서 찾아?”
레이엘의 손을 뿌리치고 사티엘이 다가갔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너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도 천국을 배신할 생각이야?”
유리엘은 침묵을 지켰다.
사티엘이 손을 내밀자 사법 광륜 노스탤지어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분해시켜 주마.”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유리엘이 말했다.
“이카엘은…….”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유리엘이 사티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왜 우리를 떠났을까?”
레이엘이 말했다.
“천국보다 핏줄을 먼저 택한 거겠죠.”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그는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기괴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건 정말 이상하다. 천사에게, 그것도 천사장에게 인간의 자식이 있는 거야.’
유리엘이 말했다.
“감상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이카엘이 헥사를 선택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천국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사티엘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뭐? 지금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싶은 말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천사가 천국을 배신할 수 있다는 것 말이야.”
레이엘이 물었다.
“그래서 그냥 보냈다는 것입니까?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이카엘과 싸울 것이다.”
유리엘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천국이 아닌 나의 싸움이다. 오직 나의 의지로 이 전쟁을 정의하겠다.”
사티엘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레이엘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유리엘은…….’
행동이 무겁고 의견 표현이 서툴지만, 언제나 이카엘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던 것 같다.
‘가장 큰 박탈감을 느낀 건 사티엘이 아니라 유리엘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도.
‘유리엘은 떠났다. 이제 남은 대천사는 나와 사티엘. 그렇다면 나는…….’
솔직히 레이엘도, 이카엘이 떠난 순간부터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존재였구나, 이카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