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37
“뭐야, 갑자기?”
리안이 묻자 테스의 웃음이 자조 섞인 미소로 번지며 말이 이어졌다.
“우린 쿨하지.”
그녀가 리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면 나만 쿨한 건가? 사실 너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말이야.”
리안은 말이 없었다.
“……할래?”
가장 큰 용기를 냈음에도 대답이 없자, 테스가 황급히 분위기를 돌렸다.
“하하하! 농담이야! 설마 내가 너하고…….”
그래서 더 서러웠던 것일까.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었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냥 말만 해 주면 안 돼?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안 돼?”
“넌 좋은 사람이야.”
“왜! 왜!”
벌떡 일어난 테스가 리안의 앞에 섰다.
“너는 내일 가 버릴 거잖아! 아무것도 안 바란다잖아! 그냥 말 한번 해 주는 게 뭐가 어려워?”
“시로네는 왜 나를 선택했을까?”
뜬금없는 질문에 화가 났지만, 어차피 시로네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 말도 끌어낼 수 없을 터였다.
“이면 세계는 너만 들어갈 수 있고, 강한 데다가, 시로네가 가장 신뢰하니까.”
“아니.”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전부였다면, 시로네는 무조건 혼자서 갔을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로네는 세계 각지에 동시에 있는 것 같아. 그 얘기를 듣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거였어. 그럼 나는 어떻게 지키지?”
테스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어떤 공간에서 시로네가 죽는다면, 다른 공간에 있는 시로네는 어떻게 될까? 전부 죽는 것인가, 아니면 그 공간에 있던 시로네만 죽는 것인가?”
“그래서…… 시로네에게 물어봤어?”
“아니, 물어보지 못했어. 전술적으로 필요했다면, 묻지 않아도 말해 줬을 테니까. 하지만 시로네는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리안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어느 한 공간의 시로네가 죽으면,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시로네가 죽는다.”
테스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래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질 테니까.”
“하, 하지만 추측일 뿐이잖아. 내일 시로네에게 물어보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리안이 말을 끊었다.
“시로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친구가 끔찍한 고통을 당할 걸 알면서도 같이 하자고 했을 것 같아?”
아니.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옥에 갈 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로네를 지킬 거야. 테스,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나는 시로네 외에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아. 정말로 중요한 때에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현실에 남겨 둔 미련 때문에 판단이 늦어진다면, 전부 끊어 버리고 가야 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것은 조금도 책임질 수 없다고? 그냥 말 한마디 해 주는 것도? 1퍼센트만이라도?”
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0.1퍼센트라도.”
“…….”
“미안해. 얼마든지 원망해도 좋아. 이미 각오하고 있어. 나는 반드시…….”
“하하하! 하하하하!”
테스의 웃음소리에는 울음이 섞였으나, 어쩐지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정말 너답다. 그거 알아? 너는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야.”
“미안.”
“아니, 괜찮아.”
테스는 양손으로 리안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으니까. 이제야 알았어,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진정한 기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리안의 머리를 만지던 두 손에 바짝 힘을 준 그녀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 가서 싸워.”
“……테스.”
“내 말 똑똑히 들어. 반드시 이성을 유지해야 돼. 그리고 만약 시로네가 위험에 처한다면…….”
테스는 눈물을 참았다.
‘울지 말자, 테스. 웃어. 웃어야 돼.’
어떻게든 눈물은 보이지 않았으나, 끝내 웃는 얼굴은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시로네가 위험에 처한다면…….”
입술을 깨물면서 끌어 올린 말이 마침내 목을 통과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반드시 네가 죽어야 해. 약속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겠다고. 주군을 지키는 거야.”
가만히 고개를 숙인 리안이 눈을 감았다.
“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땅에 평화가 깃든다면, 테스와 함께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고.
선택할 수 없는 것(4)
***
크레아스 방위군 의무실에서 알페아스는 서저리에게 뼛조각을 맞추는 정밀 수술을 받았다.
알페아스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부상병들이 피를 흘린 채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흐으으으.”
회복 마법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나 신체에 심각한 기능 손상을 입은 자들이었다.
리리아가 물었다.
“시로네, 어떻게 해 줄 수 없어?”
“양자 현상에 불가능한 건 없지만 누군가를 치료하는 건 애매한 문제야. 헥사의 능력은 하나의 세계를 두고 두 사람의 인식이 충돌하는 거거든.”
시로네가 돌아보았다.
“보통은 내가 이겨. 11감을 기반으로 세계를 느끼는 나를 꺾을 수는 없지. 하지만 타인의 육체나, 만인이 인정하는 공통된 사고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태양을 갑자기 없애라고 하면 아마도 어려울 거야.”
단테가 말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 나네라면 더 큰 힘으로 태양을 없애겠지만, 마음은 율법과 달라. 미라클 스트림이 너의 생명을 앗아 갈 수는 있을 거야. 죽음은 당연한 인식이니까. 하지만 너를 여자로 만들 수는 없어. 5감을 초월한 확신이기 때문이야.”
“흐음, 마음의 기술이라.”
시로네가 볼펜을 꺼냈다.
“헥사의 기본은 완벽한 마음의 상태야. 예를 들어 내가 이 볼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면…….”
볼펜이 사라졌다.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내 인식이 너를 압도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와 똑같은 마음의 상태를 만들 수 있다면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시로네가 볼펜을 건네주자 단테가 그것을 받아 들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볼펜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지워 보려고 애썼으나 볼펜은 여전히 그의 손에, 그의 눈에 실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해했어. 어떤 방법을 써도 완벽한 마음의 상태는 만들어지지 않아. 그 상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의심을 차단할 수는 없는 거군.”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식의 한계라는 거지. 특히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있어. 절단된 다리를 재생시킨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일이 되는 셈이지. 아무리 간절해도 말이야.”
“진정으로 믿는다면?”
에덴이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연한 상식과 같은 수준으로 마음의 힘을 믿는다면? 그때는 치료할 수 있어?”
“그렇다면 불가능한 건 없어.”
시로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우리가 힘들게 싸우고 있지도 않겠지. 교장 선생님의 무릎을 고치는 건 율법적인 치료가 가장 편리해. 단순한 2차방정식을 대수학으로 풀 필요는 없는 거야.”
단테와 에덴, 리리아가 서로 볼펜을 돌려 가며 양자 현상을 시험해 보는 동안, 시로네는 의무실의 풍경을 살피고 문으로 향했다.
단테가 뒤를 따랐다.
“어디 가려고?”
크레아스 도시의 마족은 전부 소탕했고 피난민들도 도시에 합류한 상태였다.
“어디든. 여기에는 군인도 있고 함께 고통을 나눌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으니까.”
“양자 전송을 하면 되잖아?”
“동시 사건은 일종의 포석 같은 거야. 2명의 내가 서로를 인지하면 하나는 사라지지. 5감의 존재라면 벽 하나만 사이에 놓여도 서로를 인지할 수 없을 테지만, 나는 11감을 가지고 있어.”
단테는 입을 다물었다.
“양자라는 것은 본래 우주적 규모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상이야. 행성 안에서 사용하기에는 시공간이 너무 협소한 감이 있지. 만약 수십 킬로미터 거리에서 2명의 내가 지나간다면, 이건 보통의 인간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정도야.”
시로네가 두 주먹을 거의 달라붙을 듯이 맞대고 천천히 교차시켰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특정 공간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안 돼. 그런데 만약 어느 한 공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나는 싸우기 위해 감각을 극대화시키겠지.”
오른손을 펼친 시로네가 왼쪽 주먹을 덮었다.
“이랬을 경우 먼저 인지한 내가 진짜가 되고, 남아 있는 나는 전부 공空이 되는 거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면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어.”
“그렇군.”
“내가 감당할 범위 내에서 가능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싶어. 크레아스 외곽에도 수많은 마을이 있으니 갔다 올 생각이야. 그동안 부탁할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단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언제쯤 올까? 감정병 말이야.”
작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시로네 일행이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이유였다.
“24시간 안에.”
시로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대비를 해야 돼, 단테. 우리 모두 전과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거야. 마음을 지켜. 그리고…….”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너 자신을 구원해라.”
***
페시아 왕국.
토르미아의 남쪽에 있는 왕국에 마족의 잔당이 밀려든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남부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한 만큼, 마족을 막아 내기에는 물자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새벽 4시경에 이르자 수도를 관통한 마족들은 방사형으로 퍼져 눈에 보이는 대로 인간을 학살했다.
항구도시 베리켄트.
20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페시아의 젖줄에 진한 핏물이 스며들었다.
“으아아아! 사람 살려!”
베리켄트를 장악한 마족은 6군단 예하의 여단장 델라가 이끄는 군대였다.
미혹의 악마 델라는 흑발의 찰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색은 인간의 감정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골목을 도망치다 부두로 들어온 100여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남자, 여자, 노인과 어린아이.
대상을 물색하던 그녀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건장한 남자를 점찍었다.
일생을 바다와 싸운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뚜렷한 호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델라가 이면 세계의 언어로 물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마인족의 언어는 마치 수십 장의 종이를 동시에 찢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더러운 악마가!”
강하게 쏘아붙였지만, 남자 또한 마족들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빈틈을 노리고 바다로 뛰어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물 밑으로 잠수해서 선박에 숨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라.
“보아하니 대장인가 본데, 한판 뜨자. 너를 이기면 나를 풀어 주는 건 어때?”
잠시 생각하던 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간의 언어였고, 목소리가 의외로 아름답다는 것에 남자는 불쾌했다.
‘싸우는 척 옆으로 빠진다.’
물까지 거리는 20미터.
마족이라면 1초 만에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지만, 일격을 피하면 얘기는 달라질 터였다.
‘피할 수 있어. 피할 수…….’
계시처럼 뇌에서 스파크가 튀고, 남자는 생각을 차단하며 몸을 날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감에 의지해 몸을 날린 그가 바닥을 뒹굴었다.
‘여기서 뛴다.’
검은 바다가 보였다.
풍덩 하는 소리를 내며 남자가 물에 들어가자, 붙잡힌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생명에 대한 질투와, 자신은 죽을 거라는 절망감이 동시에 담겼다.
“인간답지 않지만, 인간다운 선택이네.”
델라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1명이 도망쳤으니 그 죄는 너희들이 갚아야 할 것이다. 그 전에…… 또 도전할 사람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델라는 깔깔 웃었다.
“좋아, 기회를 주지. 거기 너부터. 바다로 뒷걸음질을 쳐라. 한 걸음을 뗄 때마다 1명씩 죽이겠다.”
호명받은 남자는 즉시 일어났으나, 뒤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굳었다.
“그, 그런…….”
“어때서 그래? 어차피 다 버리고 도망칠 거였잖아? 할 거면 당당하게 하라고. 시작해.”
수많은 시선이 남자를 압박했다.
“싫으면 다른 사람 시킨다?”
판단을 내릴 겨를도 없이 그의 발이 저절로 뒤로 움직여 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