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40
친구들의 친구들, 그 친구들의 친구들로 이어진다면, 대체 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네이드가 배낭의 무게를 어깨로 어림하며 물었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오메가를 통해 세계의 모든 지리를 섭렵한 시로네지만 전쟁의 여파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건 어때?”
이루키가 발키리 총군사 때부터 저장해 둔 머릿속 세계지도를 펼쳤다.
“내 지도를 설명하자면, 지옥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전부 불이 밝혀져 있어. 어두운 부분은 섬처럼 드문드문하지. 그런 곳을 포인트로 삼아서 이동하면 될 거 같은데.”
“아하. 그럼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야?”
“음.”
세계지도를 생각으로 확대시키자 반경 내에 있는 수천 개 지명이 떠올랐다.
“보르슈아 지역.”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로스 왕국이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내려오는 형태의 국가로, 토르미아와 북쪽으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다.
“전쟁으로 거의 멸망했지만 바닷가 근처는 그다지 피해가 없는 모양이야. 우선 거기로 가자.”
네이드가 물었다.
“그런데 감정병은 어떡하지? 지금은 시로네의 능력으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나중에는 감당이 안 될 텐데.”
“뒤는 없다고 봐야지. 시로네와 리안이 이면 세계를 정화하면 해결될 거야. 만약 불가능하다면…….”
이루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똑같잖아? 세상이 끝나는 건.”
“물론 그렇지. 내가 걱정하는 건 이면 세계가 정화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불치 상태가 되는 거야.”
고통의 역치는 끝없이 높아지고,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헥사의 위력도 계속 강해져야 한다.
시로네가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 능력이 저하되는 건 안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세리엘의 말에 의하면…….”
시로네는 이제 막 세계보건기구에서 들어온 정보를 그들에게 전했다.
“감정병은 인간의 몸을 매개체로 전염될 수도 있는 것 같아. 바람의 방향과 다른 지역에서도 감정병 발생자가 발견되었거든. 세계기후기구에서 확인했어.”
이루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흐음, 그럼 예상보다 전파속도가 더 빠르겠군.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향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을 테니까. 물질적으로는 가장 큰 부동산인 집을 포기하는 셈이지.”
“응. 포니가 긴급 격리 조치를 취했지만 병사들조차 감염되어 있는 이상 이탈을 막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결정을 내린 거야. 핵심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헥사의 능력으로 잠복기를 늘리려고.”
같은 운명 공동체였기에 이루키와 네이드도 순순히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해했어. 그럼 출발하자.”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파멸로 치닫고 있지만 세 사람의 마음은 조금 설렜다.
네이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으로 여행하는 거네. 예전에 약속했잖아, 사회에 나가서도 함께하자고. 드디어 꿈이 이루어진 거야.”
“한가하니까 그렇지. 백수가 꿈이었냐?”
이루키의 말에 네이드가 삿대질을 했다.
“그러는 자기도 개털인 주제에! 감정병만 나아 봐. 아주 돈을 떼로 벌어들일 테니까.”
“하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시로네는 오랜만에 후련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모두가 웃을 수 있기를.
***
“시로네.”
미로가 방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세요?”
이제 곧 리안이 이면 세계로 떠나야 하기에 왕성의 분위기는 무겁다고 할 수 있었다.
“면담. 가올드에게 얘기는 들었지?”
“네. 드리모로 함께 가기로 했어요. 리안의 일이 끝나면 바로 출발할 거예요.”
“응. 그 전에 해 두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언제든 전할 수 있지만, 이미르의 정신에 들어가면 오직 임무에만 신경 쓰고 싶거든.”
숙제를 주려는 듯했다.
“네, 말씀하세요.”
“하비츠 말이야.”
미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 하비츠 암살을 시도하면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 확신하건대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야. 상황만 맞아떨어진다면 부처도 죽일 수 있을 거야.”
시로네는 그저 듣고 있었다.
“신의 주파수를 들으며 하비츠를 공격했던 쿠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어. 수치스러웠다고. 마치 망상에 빠진 아이가 된 기분이었대.”
“그렇군요.”
쿠안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다.
“하지만 하비츠는 분명 존재해. 메이레이는 물론, 리안도 어떤 느낌을 받은 순간은 분명 있었어. 따라서 망상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우리가 문제인 거야.”
“인식의 한계.”
“그래. 네가 말한 양자 현상의 장벽. 인간의 마음이 모든 걸 정의한다면, 배니싱은 정반대야. 아무것도 정의해서는 안 되는 영역에 하비츠가 있는 거지.”
“이를테면…… 순수성인가요?”
미로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바로 그거야. 순수한 존재. 즉, 어떤 선입견도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제 막 눈을 뜬 아이라면 하비츠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흐음.”
시로네가 턱을 괴었다.
“아마도, 아니, 분명 볼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본다고 해도 보는 게 아니니까.”
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하비츠를 볼 수 있어. 하비츠라는 형태가 뭔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저 시신경에 잡히는 모든 신호를 빨아들이는 거지.”
“……무적이 아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시로네가 말했다.
“하지만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비츠가 뭔지도 모르는 갓난아이에게 어떻게 도움을 받죠?”
“한 사람 있어.”
시로네의 눈이 커졌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아직 근접해 있는 아이. 아니, 그 아이라면 하비츠를 죽일 수도 있을 거야.”
“그게…… 누군데요?”
미로가 검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웨나 위저드.”
나네, 진성음, 시로네와 함께 상아탑 후보 서열 6위에 등재되어 있던 이름이었다.
다른 공간(3)
***
카샨 제국.
문화도시 아베리온은 세계 각지의 풍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관광특구였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제국답게 전쟁의 여파에도 피해가 크지 않은 도시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생존력은 참으로 끈질겨서, 마족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파라다이스처럼 보였다.
“흐음.”
그리고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하비츠가 배니싱의 능력을 발동하며 검을 뽑았다.
“사세요! 쌉니다! 아베리온에서만 볼 수 있는 왕선인장 진액이 단돈…… 컥!”
상인의 목을 베어 버린 하비츠는 그가 들고 소개하던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피 분수가 괄하게 터졌으나 시장의 어느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예쁜 목걸이 팔아요. 사막 수정으로 엮은 수공예품이에요. 아내에게 선물…….”
선인장 진액의 맛을 보며 하비츠가 팔을 내밀자, 검 끝이 노파의 목을 관통했다.
그 상태로 유리병을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그가 검을 뽑아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에 유리병을 그대로 갖다 꽂아 버렸다.
퍽 하고 병이 깨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행인은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이 당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비츠는 그의 복부에 검을 찔러 넣었고, 마침내 내키는 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그렇게 피바다로 변해 가는 시장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하비츠의 눈이 심연에 잠겼다.
“기분 나쁜 곳이군.”
마계가 개방되었을 때 하비츠는 신의 주파수를 통해 엄청난 쾌락을 맛보았다.
특히나 감정병이 발발했을 때는 거의 반나절 동안 황무지에 드러누운 채 전율했다.
하지만 아베리온에서 수집한 목소리는 그가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을 휘두르며 인파를 역류하던 그는 천을 파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여성이 허리를 굽힌 자세로 천을 고르고 있었다.
하비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우, 아.”
이제 갓 돌이 지났을 법한 아이가 하비츠에게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
피 묻은 검을 아이에게 내민 하비츠는 천천히 좌로 우로 움직여 보았다.
“아아. 아.”
아이가 검을 잡으려고 손을 아등거렸다.
천 가게의 주인인 중년 여성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아들이오? 호기심이 많네.”
“어머, 그래요? 희한하네요. 집에서는 얌전한데.”
“자기도 밖에 나오니까 좋은 게지. 카샨의 수호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고 계신 걸지도 모르고.”
아기의 엄마가 호호 웃었다.
“카샨의 수호신요?”
“어릴 적에 할머니가 해 주신 말씀이라오. 아기들은 신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구먼. 세파에 찌든 어른의 눈과는 다른 게지. 그래서 할머니 시절에는 아기가 허공에 손짓을 하면 기도를 올렸다오. 부디 우리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네에…….”
고리타분한 민간설화겠지만 막상 엄마가 되자 그런 것들도 관심이 갔다.
가게 주인이 넌지시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해 보는 게 어떻소? 밑져야 본전인 거니.”
“어, 그럴까요?”
막상 해 보려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아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눈을 감았다.
“신님.”
하비츠가 귀를 후비며 하품을 했다.
“우리 아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아기에게 얼굴을 들이민 하비츠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순진한 웃음이 터졌다.
“아우! 아우우!”
엄마는 깜짝 놀랐다.
“어머, 웃었다. 방금 들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어차피 우연의 일치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 보라니까. 신께서 응답을 해 주신 거지. 아기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을 거야.”
어쨌거나 기분은 좋았기에, 엄마는 저울질하던 두 장의 천을 모두 건넸다.
“이렇게 주세요.”
꽤나 비싼 천이기에 수지맞은 가게 주인이 흥이 나서 물건을 담았다.
“엄마가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네. 손수건 하나 더 넣었으니 아이 턱받이나 하게.”
“감사합니다.”
엄마가 물건을 받는 동안 하비츠는 아기의 고사리손을 잡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응. 악수. 악수.”
“아우. 아우.”
침을 흘리며 웃던 아기는, 엄마가 돌아서자 다시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잘 가.”
떠나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 준 그는 다시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제는 모래 폭풍이 심했지. 창문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칼을 휘두르자 일격에 목이 절단되며 피 분수가 솟구쳤다.
“칼날이 무뎌졌군.”
대장간으로 향하는 그의 등 뒤로 수백 구의 시체들이 핏물에 잠겨 있었다.
***
웨나 위저드.
한때 상아탑 후보군 6위에 랭크되어 있던 인재로, 그 후로는 종적이 모호했다.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아요. 지금 몇 살이죠?”
미로가 말했다.
“일곱 살. 위저드에 대한 얘기를 들은 건 위고가 시온에 합류했을 때야. 지금은 죽었지만…….”
“네. 애석한 일이죠.”
스카이 위고 또한 상아탑 후보군 9위에 랭크되었을 정도로 미래가 충만한 마법사였다.
‘강한 사람이었는데.’
비록 시로네에게 제압당하기는 했지만 덤프라는 화신술은 놀라운 경지였다.
‘상아탑에서는 그런 위고보다 네 살의 위저드에게 더 높은 평가를 내렸다는 건가?’
시로네도 슬슬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아이인가요?”
“모태각성자. 태아 3개월 무렵에 이미 스피릿 존을 개방했다고 들었어.”
“뇌가 형성된 직후네요.”
“그렇지. 미성숙한 뇌로 어른도 불가능한 집중력에 도달한 거야. 상상할 수 있겠어, 태아가 자궁 속에서 공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했을 때 벌어지는 일을?”
시로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모태각성자는 상당히 많지만, 스피릿 존으로 들어간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금 어디 있죠?”
“몰라.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인력 수급이 중요해졌을 때 상아탑 후보군의 명단을 얻기는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