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44
“어이! 무슨 말 좀 해 봐!”
쿠우우우우!
하늘은 성난 화염을 토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신호기에 빨간불이 켜지자 인포메이터는 안절부절 허리를 뒤틀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기본적으로 정화 대상자에게는 반드시 1명 이상의 인포메이터가 붙는다.
노동력이라면 차고 넘치는 세계였고, 심지어 대부분은 할 일이 없었다.
“카르마 체인을 자력으로 끊었어.”
그녀가 알기로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지옥 불의 게헨나라면 더더욱 그랬다.
삐! 삐!
리안이 소리칠 때마다 부저가 울렸으나 차마 응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화 시간을 말해 줘야 하는데…….”
광자계의 시간은 이면 세계에서 감정의 크기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된다.
즉 고통이 클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고, 고통이 약할수록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측정이 되지 않는 것인가?
반구형의 그릇에 담긴 핏물에서 떠오른 신호는 ‘측정 불가’라는 문구였다.
평생 처음이었고, 심지어 이런 신호가 나타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사장님!”
결국 신호기의 빨간불을 무시한 인포메이터는 곧바로 레테를 찾아 나섰다.
“뭐라고?”
레테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측정 불가라니, 무슨 소리야? 어떤 존재도 그런 신호를 받을 수는 없어.”
“정말로 그런 신호가 나왔다니까요.”
인포메이터의 억울한 표정에, 레테가 책상에 팔꿈치를 묻고 머리를 만졌다.
“게헨나의 사슬이라…….”
화자원관리공사는 지옥에서 녹을 받고 있지만 엄연히 독립적인 기관이다.
이면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집단으로, 마의 정화만이 지상 과제였다.
“특이한 놈이네?”
싱거운 반응이지만, 사실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사탄도 게헨나를 거스를 수는 없어. 그 녀석도 지옥 불에서 태어났거든. 한마디로 시스템 고장이잖아.”
“어떡하죠? 솔직하게 측정 불가라고 안내할 수는 없잖아요. 신호기는 계속 울리고…….”
“호들갑 떨지 마. 단순 오류야. 카르마 체인은 어떤 식으로든 정화 대상을 지옥에 묶어 두는 역할을 하지. 그게 잠시 끊어졌을 뿐이라고. 다시 연결될 거야.”
“그러다가 또 끊으면요? 생육신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요. 화공사에 올 수도 있잖아요.”
“…….”
눈이 퀭해진 레테가 문밖에 일렀다.
“모노라스, 들어와.”
그로부터 10초를 기다렸으나 복도에서는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아.”
고개를 깊숙이 숙인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열고 달뜬 소리를 냈다.
“아, 아아…….”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사장님! 무슨 일이십……!”
눈을 크게 뜨고 들어온 모노라스는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을 보았다.
인포메이터가 돌아보고 있고 책상 앞에서는 레테가 싸늘한 눈을 뜨고 있었다.
“…….”
긴 정적이 흘렀다.
“흐음.”
모노라스가 입맛을 다시더니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야!”
레테가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내가 불렀잖아! 제발 일 좀 하란 말이야! 너만 보면 내가 몇천 년을 늙어!”
모노라스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악다구니를 쓸 가치가 없다는 것은 이면 세계의 탄생 초기부터 알고 있었다.
“출장 좀 갔다 와. 지금 정화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으니까 전문가를 불러야 되겠어. 마도 공학의 도시, 라비에트. 대공에게 이쪽으로 와 달라고 전해.”
알겠다는 말도 없이 모노라스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레테가 빠르게 말했다.
“뇌물 받지 마. 알았어?”
“네.”
“접대도 받지 마. 마족들 때리지 말고, 주민들 괴롭히지 말고, 갑질도 하지 마. 아니, 아니다.”
레테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다 해. 다 해도 좋으니까, 제발 일은 제대로 해.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응?”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네가 누군데?
문 앞에서 몸을 돌린 모노라스가 멋진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날렸다.
“화공사 비서실장, 모노라스입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쳐다보던 레테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미쳐 버리겠네.”
***
정오가 훨씬 지났을 무렵, 시로네와 에이미는 토르미아 왕국의 남부에 도착했다.
마족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감정병의 여파는 이곳까지 번져 있었다.
집집마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에이미는 귀족 구역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내 기억에는 저 건물이 맞아.”
카르미스 가문의 저택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시로네는 명패에 새겨진 ‘크로스’라는 성을 확인했다.
“케이든.”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에 있을 거야. 혹시나 해서 발키리 부대 편성을 확인해 봤지만 입대하지 않았거든.”
“아직도 마야를 좋아하는 건가?”
“그러니까 틀어박혀 있는 거겠지. 그렇게 좋으면 고백이라도 해 보든가. 답답해 죽겠어.”
“하지만 케이든은…….”
“그래, 적십자성의 운명을 타고났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외의 모든 것에 100퍼센트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 당시에는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세계의 진리에 접근한 지금은 케이든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마음을 포기하는 대가로 율법의 극한에 도달하는 운명. 아마도 그런 기제일 거야, 적십자성은.”
“그래서 너에게 부탁한 거야. 미라클 스트림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케이든이 합류하면 인류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시로네도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좋아, 들어가자.”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으나 경비도 집사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왕국 최고의 가문 중 하나이니 감정병을 잘 제어하고 있을 테지만, 역시나 힘든 모양이었다.
“누구냐?”
담을 넘을까 생각하는 그때 정원 쪽에서 무도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케이든의 아버지였다.
“안녕하세요. 저 에이미예요. 카르미스 에이미.”
그녀를 지켜보던 케이든의 아버지는 오히려 시로네를 보고 눈을 빛냈다.
“야훼인가?”
“안녕하세요. 케이든을 만나고 싶은데요.”
문이 열리고, 케이든의 아버지가 뒷짐을 지며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올 줄 알았지. 내 아들이 정말로 멍청이가 아니라면 말이야. 들어오게.”
저택은 썰렁했고 공기마저 차가웠다.
감정병 탓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오래 묵은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을 나눈 지는 오래됐지. 피쇼라고 했던가,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로 지하에서 나오지를 않아.”
아버지가 철문을 두드렸다.
“케이든, 친구들이 찾아왔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한숨을 내쉰 그가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게.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지. 애석한 일이야. 가문의 천재가…….”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자리를 피하자 시로네는 에이미와 눈을 마주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케이든, 나 시로네야. 에이미도 왔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돌아가.”
귀를 대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분명 케이든의 목소리였다.
에이미가 말했다.
“금방 돌아갈 거야. 마야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
미끼를 던져 보았으나, 그로부터 5분이 지날 때까지 대답은 없었다.
“시로네, 열자.”
에이미가 문고리를 가리켰다.
“열 수 있지? 열어.”
“강압적인 방법은 설득에 도움이 되지 않아. 케이든이 원하지 않는다면…….”
“마야라는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잖아. 자기 안에 갇혀 있다면 이러나저러나 상관은 없어. 누군가라도 들어가서 끄집어내야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시로네는 문고리에 미라클 스트림을 시전했다.
조용히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벌어지자,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아냐, 이게 아냐!”
어두침침한 책상에서 케이든이 조명 하나를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에.”
온통 마야의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는 방을 보자 에이미는 소름이 돋았다.
“이것도 아니야!”
케이든이 그리던 종이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새로운 종이를 잡아당겼다.
처음에는 실패한 줄 알았으나, 시로네가 들어서 확인하니 완벽한 마야의 얼굴이었다.
‘기법이 참 묘하네. 어떻게 그린…….’
케이든을 돌아본 시로네는 생각을 멈췄다.
“흐으. 흐으으.”
저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케이든은 엄청난 속도로 펜을 좌에서 우로 그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직선이다.’
하지만 그 선들이 계속 더해져 면이 되자 완벽한 음각의 그림이 탄생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다시 종이를 던져 버린 케이든은 이번에는 오른손과 왼손에 하나씩 펜을 쥐었다.
두 손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선의 향연이 또 새로운 마야를 그려 내고 있었다.
“젠장! 왜! 왜!”
완성한 그림을 바닥에 치워 버린 케이든이 머리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왜 마야를 그릴 수 없지?”
시로네는 슬픈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아니,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어. 하지만…….’
케이든의 눈에는 마야가 아닐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어떤 그림에도 마야라는 여자의 본질은 담을 수가 없게 되는 것.
“케이든.”
시로네는 케이든의 어깨를 짚었다.
“마야에게 가라. 그녀는 지금 위험한 곳에 있어.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할 수 없어.”
케이든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마야를 그릴 수 없어. 그릴 수 없으면 지킬 수도 없어. 나는 안될 거야.”
에이미는 케이든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 댔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마야는 지금…….”
동시 사건에 대해 함구하는 시로네지만 이번만큼은 정보를 전했다.
“너만큼 안 좋은 상태야.”
케이든의 시선이 처음으로 시로네를 향했다.
카르마 체인(3)
***
갈리앙트섬.
울티마 시스템 추출 팀이 토아산에 도착하자 케르고 족장 마하투가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시로네 님.”
“네. 잘 지내셨죠? 오자마자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당분간 신세 좀 질게요.”
“신세라니요. 케르고의 영광입니다.”
마하투는 지하로 내려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신전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미로와 가올드에게는 익숙한 정경이었다.
“케르고 부족이라. 요새이기는 하지만…… 과연 안전할까?”
세인의 우려에 마하투가 말했다.
“지하에 따로 대피소가 있습니다. 제 직속 부하들이 돌아가며 24시간 지킬 겁니다.”
드리모를 통해 가야 하기 때문에 팀원들은 무방비 상태로 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로네가 섬에 기지를 꾸린 이유였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활동이 불가능하다. 동시 사건이 겹치는 일은 피하고 싶어.’
마하투가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