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45
“맡겨 주십시오. 케르고의 명예와 제 목숨을 걸고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땅을 기어가며 아리우스가 말했다.
“몽인은 꿈에 침투할 수 있습니다. 드리모를 통해 이미르의 렘 영역, 심층 6단계로 바로 진입하게 되겠죠. 하지만 빠져나오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도어를 설치할 수 없거든요.”
다이버들은 대상에게 키워드를 주입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도어를 설치한다.
“이것도 엄연히 마법이에요. 은하 바깥에 있는 이미르에게 키워드를 주입시킬 수 없습니다. 설령 간다고 해도 순식간에 즉사할 테고요.”
미로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와?”
“정말로 살아 돌아오실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대답이나 해.”
미로가 엉덩이를 걷어차자 앞으로 쓰러진 아리우스가 바닥에 턱을 찍었다.
“심해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거죠. 이미르의 꿈에서 다시 드리모로 빠지는 겁니다. 하지만 꽤나 어려운 이유는, 일단 심층에 도착하면 상층부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려요. 자아의 핵심이 공격당했기 때문이죠.”
강난이 턱을 괴었다.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즉, 에고이스트라는 놈들을 뚫어야 한다는 얘기지?”
“푸하하하!”
폭소를 터트린 아리우스가 얼른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튼 잘 생각해 보세요. 현실에서도 이미르는 최강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들어갈 곳은 이미르가 주인인 세계입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절망감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우리 팀에도 극선과 박애, 가올드 씨가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건, 싸워서 이기겠다는 선택은 죽기 전에나 하자는 겁니다. 일단 이미르의 정신에 들어가면 많은 정보가 생길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볼게요.”
아리우스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일행은 토아산 깊숙한 곳의 벙커에 들어섰다.
미리 준비한 침대가 있고 며칠 치의 식량과 물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마하투가 말했다.
“일단 문을 닫으면 신호를 보내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영원히. 100년 후에도 이 문은 케르고의 후예들이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사뭇 거창한 발언이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마워요. 다녀올게요.”
시로네의 인사를 끝으로 마하투가 문을 닫자,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조명 마법을 시전한 시로네가 침대를 가리켰다.
“시작하죠. 구체적인 전략은 일단 이미르의 정신에 들어가서 짜는 게 좋겠어요.”
6명이 하나씩 침대를 차지하고 눕자 아리우스가 수면 마법을 시전했다.
시로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오래전에 방치된 듯한 오두막 안이었고, 벽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루시드 드림으로 감각을 집중하자 오두막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 오래 묵은 먼지의 냄새.
“…….”
하얀 넝마를 걸친 마른 소녀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두막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악몽이구나.’
아마도 이 구간이 끝날 때까지 이름 모를 소녀와 오두막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위에 눌렸겠지만, 시로네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몽아.”
루버의 위성이자 꿈 설계자.
“장난칠 시간 없어.”
오두막의 문이 삐거덕 열리더니 창백한 얼굴에 눈이 똥그란 소년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장난은 아니에요. 악몽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기 때문이죠.”
시로네와 몽아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소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의미야?”
“의미 없어요. 그것이 악몽의 특징이죠. 요컨대, 끔찍하기만 하면 돼요.”
소녀의 손목을 잡은 몽아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열에 녹은 듯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
“악몽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처리해요.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누구나 소녀의 얼굴이 예쁘기를 바랄 테고, 또한 그럴 테지만…….”
“그 이면에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몽인께서 이미르에게 악몽을 주입할 생각이거든요. 설령 꿈의 주인이라도 부정적인 에너지에 휩싸이면 모든 상황이 이미르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팀의 기동력을 살릴 수 있어요.”
시로네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
“효과적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미르가 공포를 느끼는 상황이 과연 있을까?”
“알 수 없죠. 하지만 내면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사실 제가 더 걱정하는 건 실제로 악몽이 전개되었을 때예요.”
평범한 사람이 꾸는 악몽과는 차원이 다를 터였다.
“일단 나가시죠. 지금쯤이면 다른 분들도 악몽을 따라 도착했을 거예요.”
의자에서 일어난 시로네는 문으로 나가기 전에 소녀를 돌아보았다.
맨발로 서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시로네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어여쁜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자, 시로네도 마주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 잘될 거야.”
달빛을 빨아들이는 황무지의 끝에 미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열도 10왕국.
군단장 가마긴의 지진이 해일을 일으키면서 섬의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피난민을 태운 범선에 타고 있는 시로네는 갑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디오나스 왕국.’
그나마 가장 피해가 적은 국가지만, 무풍지대를 가로지르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릴 터였다.
“메시아님.”
독룡 포이네가 시로네에게 다가왔다.
“카이오스의 말에 의하면, 계속해서 지각 판이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해일이 일어나면 배에 있는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발성이 아니군요. 심각하네요.”
마계는 현실에 심긴 또 하나의 시스템이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옥의 정화가 끝나지 않는 이상…….’
시로네가 고민에 빠져 있는 그때 선원들이 담요와 먹을 것을 갑판으로 옮겼다.
“자, 차례대로 가져가십시오! 물자에 한계가 있으니 정량만 배분하겠습니다. 만약 어길 시에는 저희들도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으름장을 놓는 이유는, 고립된 바다에서 생존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리라.
“……먹을 거다.”
피폐한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돈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급품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그때 건장한 체구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어디 평민이 손을 대려 하는가! 왕국의 법도에 따라 데시카 장관님께서 먼저 취사하시겠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로사리온 왕국의 내무 장관 데시카가 차가운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사람들을 물리친 기사가 두툼한 담요와 식량을 잔뜩 챙겨 장관에게 바쳤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으나, 내무 장관의 기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문제가 생기겠는데요. 저 멸치처럼 마른 인간이 가져간 빵이 전체의 5분의 1입니다.”
물자를 실을 시간이 부족했기에 한 사람당 돌아가는 식량은 한 끼에 턱없이 못 미쳤다.
“적어도 자신은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것. 하긴, 생물이니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포이네의 눈웃음 속에는 범접할 수 없는 독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명만 내리시면 이 노인네가 따끔한 훈계를…….”
“가죠.”
포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우리도 받아야죠, 빵하고 물.”
줄의 끝에서 기다린 시로네는 자신의 차례에 보급품을 챙길 수 있었다.
예상대로 빵은 부족했고, 얻은 건 물 반 통과 허름한 담요 한 장뿐이었다.
먹지 못한 자들은 분노했으나, 아직은 기사의 검이 굶주림보다 무서웠다.
포이네가 시로네의 옆에 앉았다.
“메시아님도 고민이 많으시겠군요. 소인의 의견으로는 ‘추출’도 괜찮습니다만.”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로네가 말했다.
“데시카는 정의롭지 못해요. 하지만 추출을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준이 필요해요. 만약 이 자리의 모두가 데시카가 되었을 때,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원리나 원칙만으로 인간은 통합되지 않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포이네는 말을 아꼈으나, 가느다란 눈에 박힌 빛은 한층 더 섬뜩해졌다.
“천천히 마셔.”
시로네가 시선을 돌리자 여자아이가 하루치 물을 전부 마시고 있었다.
“저런. 바닷물을 마신 모양이군요. 아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죠.”
역시나 해갈이 되지 않는지, 마지막 한 방울을 핥은 아이가 빽 하고 울었다.
“엄마, 목말라! 목말라 죽겠어!”
엄마는 입조차 대지 못한 물이지만 자식의 고통에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물, 물을…….”
사람들의 시선이 장관에게 쏠리자 데시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물은 안 돼. 식량이야 기사들이 구하면 된다지만 바다에서 물은 생명이다.’
그때 시로네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아가야, 이리 와.”
물을 본 아이가 홀린 듯이 달려오자 시로네가 뚜껑을 딴 물통을 건넸다.
“이거 마셔.”
아이는 고개를 쳐들고 순식간에 물을 비웠다.
“이제 좀 괜찮니?”
“……네.”
아이가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이자, 포이네가 자신의 물통을 쥐여 주며 말했다.
“엄마에게 이걸 가져다 드리렴. 대신 이제부터는 아껴서 마셔야 된다. 알겠지?”
아이는 주저했으나, 결국 가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갑판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건너편의 남자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시로네에게 다가와 물을 내밀었다.
“자. 한 모금 하게.”
시로네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콧잔등을 긁었다.
“다는 못 주네만, 서로 돕고 살아야지. 마셔. 부담 가질 필요 없으니까.”
마치 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사람들은 비로소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저기…… 이거 같이 먹어요.”
작은 빵이 반으로 갈라지고, 먹을 것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나뉘어 쥐였다.
“할머니.”
한 청년이 포이네에게 물통을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한 모금도 안 마시면 대낮에 못 견디세요.”
12사도 중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알려진 독룡의 시선이 물통을 꿰뚫었다.
“…….”
드래곤에게는 한 방울에 불과한 물.
하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여태까지와 다른 따스한 기운이 녹아들어 있었다.
“고맙네, 젊은이.”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삼키며, 포이네는 데시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출의 기준.’
메시아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카르마 체인(4)
선원의 보급품은 하루를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으나 사람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외롭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시로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단 한순간이다.’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돌볼 수 있다면, 이 세계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을 것이기에.
수재에 넋이 나간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훈풍이 돌았다.
하지만 저 멀리서, 어쩌면 그들보다 높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데시카는 불쾌했다.
“저 녀석은 뭐야?”
일국의 내무 장관이라면 야훼의 이름은 들어 봤을 테지만 얼굴을 아는 건 다른 문제였다.
기사가 넌지시 일렀다.
“어딜 가나 저런 인간이 있지요. 앞으로 닥칠 비극을 모른 채 어리광을 부리는 녀석들. 정말로 나눌 물조차 없어질 때 저 녀석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요.”
데시카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마도 울며불며 사정하겠지. 삶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놈이군. 저런 놈이 끼어들면 힘들어져.”
사람들이 서로 돕기 시작하면 자연히 화살은 식량을 과점하는 데시카를 겨누게 될 것이다.
“처리해.”
“……알겠습니다.”
데시카의 기사가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시로네에게 걸음을 옮겼다.
“어이, 너.”
시로네가 올려다보았다.
“저요?”
“그래, 너. 지금 한 번은 봐주겠지만, 앞으로 이런 식의 행동은 금기다.”
“당신이 따르는 장관의 식량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물자를 공유하기 시작하면 결국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어느 세계에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지 않을 텐데?”
시로네의 눈에 처음으로 불쾌감이 어렸다.
‘이런 것이다.’
정말로 기분이 나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