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52
“거핀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아요. 비록 충돌했지만, 서로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위력은 대단했다.
“심층 5단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충격이었다는 증거죠. 어쨌든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시로네는 차분했다.
형태는 거핀의 모습 그대로지만, 어차피 이미르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강하다.’
하늘에 떠 있는 핸드 오브 갓의 크기만 봐도 전성기의 시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끼게 했다.
미로가 말했다.
“시작하자, 시로네.”
천수관세음의 화신이 하늘에 차오르자 거핀의 핸드 오브 갓이 짓눌렀다.
“흐읍!”
미로의 얼굴이 구겨졌다.
천수관세음의 주먹이 빛의 손바닥을 빠르게 연타했으나, 압도적인 힘에 밀릴 뿐이었다.
“내려온다!”
세인의 일월광륜이 펼쳐진 가운데 가올드와 시로네가 동시에 합공을 가했다.
“크으으으!”
가히 압도적인 위력.
거핀의 핸드 오브 갓은 더 빨라지지도, 그렇다고 느려지지도 않은 채 천천히 지상을 뒤덮었다.
모든 것이 밝아지고, 급기야 시로네는 온통 창백한 세상을 둘러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로네.”
귀신처럼 섬뜩한 목소리였다.
“어디지?”
방향도, 중력도 느낄 수 없었고, 심지어 시간마저 멈춘 기분이 들었다.
“아아아아아아!”
이어지는 비명 소리에 시로네가 소리쳤다.
“누구야!”
“……게…… 있어서…… 나…….”
끊어지는 음절에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분노.’
그들이 시로네를 불렀다.
“크으으으!”
하나의 음절이 100억 개 이상으로 겹쳐지면서 마치 굵은 현이 튕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주적인 음파 속에서 시로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이아인.’
이미르로 통합되어 있는 그들이 분노로, 절망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가이아인은 이미 통합되고 없어. 그런데 어째서 이런 소리가…….’
머릿속에 퍼뜩 생각이 스쳤다.
‘.’
예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일시적으로 광자계를 이탈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의 가설이 세워졌다.
‘만약 바깥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가 발동되었을 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마도 사용자가 아닐까?
‘현실에서 가이아인은 이미르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바깥 세계에서는 엄연히 각각의 개체.’
가 심층 5단계에서 열렸으니 완벽하게 깨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식을 차렸고, 그들의 의식이 흘러들고 있는 것이라면…….’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미르는 어떤 상태지?’
“아아아아아아!”
또다시 터지는 비명 소리에 시로네는 귀를 막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음파가 깨져서 귀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부르고 있어.’
울티마로 신호를 해독하고 있지만 그 의미조차도 파편으로 깨져서 들어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시로네는 이를 악물었다.
의미를 파악하기 이전에 그 언어에 담긴 극한의 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굳이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면, 1억 개의 단어를 나열해도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무심. 신은 무심하다.’
시로네는 알고 있다.
느낌을 언어로 변환하는 순간 그들이 전하는 말의 대부분이 왜곡된다는 것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이 개념 속에 녹아든다면 자체로 완벽하겠지만…….
그것은 또한 허무다.
‘생각하자. 생각하는 거야.’
시로네는 어떻게든 언어를 조합하여 현재의 느낌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썼다.
이를테면.
‘점 하나가 원을 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궤도를 순행하는 점이야말로 무한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고, 무심하지만.
‘무한에 갇혀 있다.’
조금 더 언어를 끌어다 쓰자면 무한이라는 정의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 건 무한이 아니지.
……라고, 어떤 가이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한 무한이란, 무한이라는 개념마저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닌,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한限을 생각하지 않는 무無.’
즉, 무한이 없는 무한이다.
‘마음을 비워.’
시로네는 마음을 비웠다.
‘존재를 잊어.’
시로네의 존재가 사라지자 우주와 물질과 개념들이 본래부터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무한무라는 거겠지.’
따라서 지금도 시로네가 여전히 존재하고, 혹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
‘주체가 없는 착각.’
비명 소리도 없고 가이아인의 목소리도 없었으나 그 착각은 계속되었다.
‘어때?’
어쩌면 이런 말을 들은 듯한 착각.
‘너는 이제 무한한가?’
시로네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눈을 번쩍 뜨자, 온 세상이 빛으로 폭발하며 모든 개념들이 탄생했다.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으아아아아!”
시로네를 중심으로 빛의 장막이 타들어 가듯 벗겨지고, 저 멀리서 아련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또렷했다.
‘우리는 갇혀 있는 신. 무한한 인간.’
심층 5단계의 풍경이 돌아오고, 핸드 오브 갓에 짓눌려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열어 다오, 헥사.’
순간,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바깥 세계의 신호가 뇌리에 처박혔다.
“크윽!”
의미는 모른다.
어쩌면 현실에서 딱히 쓰이지 않는 모래파기딱정벌레 같은 희귀 곤충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깥 세계의 신호였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 파편을 주웠다.’
시로네의 머릿속에 바깥 세계에 대한 극히 흐릿한 이미지가 그려진 것이다.
설령 그 이미지가 완전히 틀렸다고 할지라도.
‘설마…….’
거기서 촉발되는 상상은 현실의 그 어떤 것과도 달라서, 전율이 일었다.
“시로네!”
미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천수관세음이 거의 압살될 지경까지 눌려 있었다.
거핀의 핸드 오브 갓을 올려다보던 시로네가 어금니를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무한…….”
무無.
마치 로켓이 분사하는 연기가 퍼지듯, 미라클 스트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핸드 오브 갓.’
마치 추진력을 받은 듯 시로네의 핸드 오브 갓이 거핀의 손바닥에 충돌했다.
‘착각일 뿐이야.’
사력을 다해 버티던 일행이 급격히 가벼워진 압력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시로네의 핸드 오브 갓이 끝없이 커지더니 거핀이 만든 빛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이야아아!”
마치 어른이 아이의 손을 꺾듯 힘차게 밀어붙인 시로네의 핸드 오브 갓이 하늘로 솟구쳤다.
‘거핀.’
그리고 거핀의 핸드 오브 갓과 함께 수직으로 지상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이미르가 추억하는 당신이지만, 볼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쿠쿠쿠쿠쿠쿠쿠쿠!
빛의 폭포에 직격을 당한 거핀은 오롯이 서 있는 상태로 소멸을 맞이했다.
그 순간 시로네는 본 것 같았다.
빛에 파묻혀서 스러지는 거핀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진 것을.
빛의 폭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고, 그로부터 5분이 지난 뒤에야 사라졌다.
“끝난 건가?”
개처럼 엎드리고 있던 아리우스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강난이 윙크를 하며 엄지를 들었다.
“잘했어, 시로네. 이번에는 네가 해냈네.”
팀이기에 누가 성공하든 상관없지만, 가올드가 나서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두고 싶었다.
“운이 좋았어요.”
“운이라…….”
미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시로네를 눈에 담았다.
‘기술은 같다. 위력을 높일 수 있는 이유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묘하게도 경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차마 시로네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이질감. 그래, 이건 본능보다 더 깊은 곳에서 생기는 막연한 두려움이야.’
즉, 생물을 초월하는 우주적 이질감.
아마도 몽인 루버가 조금은 차갑게 시로네를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 위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루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로네는, 오대성은 좋은 사람이다.’
드리모의 화신으로서 꿈을 꾸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지만, 시로네의 꿈은 참으로 맑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여파의 크기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황이 꼬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르고네스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최후의 순간’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밝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루버는 고개를 저었다.
‘미숙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하니 충분히 헤쳐 갈 터.’
다만 훗날 시로네가 슬픔에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아리우스가 말했다.
“일단 내려가죠.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요. 여기에서 일주일 정도 소모했나요?”
미로가 쏘아붙였다.
“다 네가 못나서 그런 거잖아. 여태까지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하여튼 도움이 안 돼.”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방법을 알았으니 빨라질 겁니다. 물론 심층 4단계에 잠들어 있는 신을 파괴할 수 있다면요.”
“…….”
거핀이 첫 번째라는 건 확실히 의외였지만, 가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누가 있든 때려잡으면 그만이야.”
일말의 두려움 없이 가올드가 구덩이로 몸을 던지자 곧바로 강난이 뒤따랐다.
“시로네, 우리도 가자.”
모두가 심층 5단계를 떠난 뒤에도 시로네는 잠시 남아 생각에 잠겼다.
‘밝히면 안 되겠지.’
무한무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미로와 루버의 시선이 전보다 냉랭해진 것을 느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솔직히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이건 말이 안 돼.’
만약 어떤 사건에 전례가 없다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은 실수일 것이다.
두려웠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했다.
“거핀.”
뒤를 돌아본 시로네는 마지막 순간 거핀이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그는 정말로 거핀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