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53
“상관없지.”
무한무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에게 그가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잘 있어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시로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심층 4단계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어. 계속 나아가는 거야.’
어쩌면…….
그것조차 주체가 없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무한이란(2)
***
아크로스 왕국의 보르슈아 지역.
험한 산길을 걷고 있던 시로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헥! 헥!”
개처럼 혀를 빼물고 경사를 오르고 있던 네이드가 땅을 짚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힘들어?”
“사라졌어.”
“응?”
선두에서 가고 있던 이루키가 몸을 돌리더니 털썩, 엉덩이를 땅에 댔다.
“좀 쉬자. 무슨 일인데?”
“동시 사건 중의 하나가 사라졌어. 아니, 어쩌면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어딘데?”
“이미르의 정신. 정확히는 거핀의 핸드 오브 갓에 휩싸인 순간 존재감이 사라졌어.”
“거핀?”
실제 거핀은 아니었으나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아무튼 신호가 끊어졌어. 양자 신호가 이곳의 나와 얽히지 않고 있다는 뜻이겠지.”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가 있나? 양자 신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잖아. 어떻게 그걸 막는데?”
“없지. 적어도 이 우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시로네가 턱을 괴고 말했다.
“지금의 나와 이미르의 정신에 있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야.”
네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죽은 건…….”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이곳에 있는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시로네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루키가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면, 경지의 상승 같은 것인가? 하지만 너, 무한의 마법사잖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양자 신호는 중첩될 거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시로네는 말을 멈췄다.
‘바깥 세계.’
우주 바깥에서 들어온 정보와 결합했다면 울티마 시스템도 차단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이미르의 정신에 있는 시로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달라질 것은 없어. 우리는 이대로 진행하자. 그쪽 임무가 끝나면 밝혀질 거야.”
이루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세 사람은 다시 가파른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힘들어 죽겠네. 이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시간 낭비하는 거 아냐?”
이루키가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내 머릿속 지도에 의하면 이곳으로는 마족의 군대가 지나가지 않았어. 당연히 길이 험할 수밖에.”
해가 떨어질 무렵 정상에 도착한 시로네 일행은 인상을 쓰며 구역질을 했다.
“윽!”
엄청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냄새가 갇혀 있었던 모양이군. 공기의 질부터 달라. 대체…….”
이루키가 산 아래를 살폈으나 달조차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 보자.”
내리막길은 조금 더 빨랐고, 그렇게 머릿속 지도를 밝히며 중턱에 도착했다.
“이게 뭐야…….”
대략 100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을 입구에 간판이 부서져 있었으나 말라붙은 피 때문에 읽을 수 없었다.
“들어가 보자.”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길바닥에 쓰러진 시체가 보였다.
“후우!”
구더기로 뒤덮인 시체는 부패되어 들짐승조차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시체를 살핀 이루키가 말했다.
“둔기에 머리가 깨졌어.”
“마족일까?”
“동선으로 봤을 때 거리가 너무 멀어. 게다가 마족의 소행이라기에는 건물들이 너무 멀쩡해.”
“그럼 혹시 감정병의 후유증으로…….”
이번에는 시로네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감정병은 토르미아를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퍼질 거야. 여긴 북동쪽이니 전염 경로의 정반대편인 셈이지.”
이루키가 나뭇가지를 던지며 말했다.
“일단 살펴보자. 생존자가 있을지 모르잖아.”
마을 중심부로 갈수록 시체는 더욱 많아졌는데, 하나같이 둔기로 머리를 당했다.
“시로네, 여기.”
네이드가 가리킨 벽에 ‘내가 왕이다’라는 글귀가 피로 적혀 있었다.
벽 아래에 손목 두 개가 절단된 남자의 시체가 시무룩한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시로네, 누군지 알겠어?”
“아니. 벌써 22년이 지났으니 얼굴만 보고 알 수는 없어. 적어도 이름이라도 알면…….”
네이드가 남자의 옷을 뒤졌다.
“뭔가 있어.”
꺼내서 확인하니 누군가가 보낸 서신이었다.
“읽을 수 있겠어?”
“응. 시로네, 불 좀.”
네이드가 다가오자 시로네와 이루키가 좌우에 달라붙어서 함께 편지를 읽었다.
-여보,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여자, 그래요,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그 여자―원래 이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가 온 이후부터 모든 게 미쳐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여자?”
네이드의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시로네는 계속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기억해 보세요, 여보. 우리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마을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난 적이 있나요? 그 사악한 여자는 간교한 말로 촌장님을 속여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결국…… 우리의 아이까지 제물로 삼았어요.
시로네는 이 순간 남자의 잘린 두 손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 불안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사실…… 어릴 적에 마을 바깥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약초를 캐다가 다리를 다쳐 길을 잃은 저를 구해 주었죠. 요르 신의 놀라운 권능으로요. 그분은 사랑의 마음을 가르쳐 주었어요.
이루키가 생각했다.
‘요르 교단의 인물. 선교 활동 중에 만난 건가?’
-여태까지 비밀로 한 이유는…… 알잖아요,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바깥을 두려워하는지. 하지만 나는 알아요. 이 세상은 신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바깥을 두려워한다.’
편지를 읽는 시로네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 여자! 악독하고 표독스러운 년! 악마가 분명해요! 마을 사람들이 그 여자의 말을 믿는다는 게 무서워요. 그래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마을 사람 모두가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최면술의 일종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쉽겠지만, 시로네는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촌장님을 따라 신의 성지로 갈 거예요. 어쩌면 사람들을 꿈에서 깨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요. 오직 나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어요.
여자는 다음 줄에 글을 이었다.
-당신과 싸우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요. 미친 건 마을 사람이지 내가 아니라고요. 이제 막 태어난 우리 아들을 봐요. 레아스를 데리고 도망치세요.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아들을 잃게 될 거예요.
네이드가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읊었다.
“아내, 라비카.”
시로네의 5차원 큐브로 이루어진 지식의 서고에서 오메가의 기록이 검색되었다.
‘정말 많구나.’
우주에는 수많은 라비카가 존재했고 개중에는 다른 문명의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광속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종족은 우주에서 테라포스가 유일했다.
‘개인으로 따지면 얘기가 다르지만.’
시로네는 지역과 연도를 물리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설정했다.
‘딱 1명. 이 사람이다.’
일곱 살까지의 정보만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현재 나이는 스물아홉 살일 것이다.
“여긴 카시람 마을이야. 230년 전에 전쟁 피난민들이 흘러들어 와 지어진 곳이지. 오랫동안 외부와 격리된 상태로 자급자족해 왔어.”
이루키가 말했다.
“건물의 숫자에 비해 시체가 너무 적어. 편지에 적힌 신의 성지라는 곳으로 간 모양인데.”
하늘로 날아오른 네이드가 전방을 가리켰다.
“시로네, 이루키. 저쪽으로 가 보자.”
네이드가 비행하는 곳을 따라 달려가자 완전히 허물어진 건물이 보였다.
가장 큰 건물이었고, 불이 났었던 듯 자재들이 전부 숯이 되어 있었다.
“마을 회관. 어째서 불태운 거지?”
핸드 오브 갓을 시전한 시로네가 거대한 빛의 손으로 건물을 움켜쥐었다.
한 움큼을 들어 올리자 마을 회관 내부의 처참한 풍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을린 시체들이 하나같이 턱을 크게 벌리고 몸이 비틀린 채 쓰러져 있었다.
“여기서 싸움이 있었군.”
건물 잔해를 내려놓은 시로네는 강당 쪽에 쓰러져 있는 석재 벽을 살폈다.
“건물이 불타면서 쓰러진 모양이야. 어쩌면 불에 타지 않은 게 있을지도 몰라.”
핸드 오브 갓이 엄지와 검지로 벽을 일으켜 세우자 판자로 만든 벽보가 드러났다.
왼편에 촌장이 적은 글귀가 있었다.
-경배하라. 신의 사자인 내가 이르노니, 돌아올 곳을 불태우는 것으로 신의 성지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오른쪽에 안내 문구가 있었다.
-오후 5시에 마을 회관을 불태울 예정이니 전원 참석 바랍니다. 사정이 있거나 불참하실 분들은 신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식량은 지참 금지이며, 순결한 아이의 피로 모두의 죄를 갚는 행사가 있습니다.
네이드가 말했다.
“뭔가…… 정상적인 것 같은데 비정상적이네.”
“그걸 미쳤다고 하는 거야. 아무튼 신의 성지라는 곳을 찾아보자.”
시로네 일행은 마을을 살폈다.
타살과 자살의 시체들로 장식되어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담력을 시험했다.
창고 건물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 시로네가 물레방아 건너편을 가리켰다.
“폭파의 흔적이 있어.”
절벽 아래에 거대한 돌무더기가 보였다.
“입구를 봉쇄했나 봐.”
200년간 폐쇄적인 생활을 했던 그들이 어떤 힘으로 입구를 폭파시켰는지 의문이었다.
이루키가 말했다.
“시신의 부패 상태로 보건대 시간은 최소한 3주 이상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도 이미 끝났을 시간인데.”
“가 보면 알겠지.”
핸드 오브 갓이 큼지막한 바위 하나를 옮기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종유석들이 날카롭게 세워진 고불고불한 길이 보였다.
“저기요! 누구 있어요?”
네이드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잡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좁은 입구를 엉금엉금 기어가며 이루키가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입구를 봉쇄한 거지? 인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던데.”
“글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만 촌장도 들어갔잖아. 게다가 식량을 지참하지 말라고 한 게 마음에 걸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었다.
좁은 통로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크륵. 크륵.”
“쉿.”
네이드가 신호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가 샤이닝 마법의 조도를 낮췄다.
‘적외선 시야.’
미라클 스트림을 발동하자 시로네 일행의 시야가 옅은 녹색으로 어둠을 벗겨 냈다.
‘이런 씨…….’
쥐처럼 몸을 웅크린 3명이 죽은 시체의 배 속에 얼굴을 파묻고 뭔가를 삼키고 있었다.
“손가락은 나에게 줘.”
말투가 너무 담담하여, 세 사람의 귀에는 마치 ‘저기 소금통 좀 건네줘.’처럼 들렸다.
“춥춥. 춥춥.”
애써 외면해도 청각이 장면을 재구성했고, 네이드는 결국 참지 못했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시체를 둘러싼 세 사람이 고개를 들자 적외선 시야에 그들의 안광이 보였다.
“누구야!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