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6
현재 시로네는 슬로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
아마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에만 밤을 다 보냈을 터. 물론 정말로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서였다.
“그럼, 마법을 해제하겠네.”
알페아스가 시간을 정상으로 되돌렸으나 시로네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고, 이후의 일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허억!”
갑자기 숨을 크게 몰아쉰 시로네가 상체를 일으키자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시로네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슬로 상태에서 보던 세계는 색채로 가득 찬 한 폭의 추상화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색채가 고정되면서 익히 알던 풍경이 드러난 것이다.
“어, 너희들…….”
아는 얼굴을 본 뒤에야 안도감이 들었다.
이루키와 네이드는 멍한 표정이었고, 뒤편에는 세리엘의 손을 맞잡은 에이미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많이 흐른 편이 아니었다.
이모탈 펑션에 들어간 이후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차원의 틈새를 열어 빠져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벌써 10일이 지났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시로네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하하, 안녕?”
“안녕 같은 소리 하네, 이 짜식이!”
“아욱!”
에이미는 시로네의 얼굴에 주먹을 대고 힘껏 돌렸다.
힘에 밀려 쓰러진 시로네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야! 갑자기 왜 그래?”
에이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일상으로(2)
“나쁜 놈!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쁜 자식!”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시로네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에이미의 눈물이 그간의 시간을 말해 주는 듯했다.
“미안해. 나는…….”
“시로네가 돌아왔다!”
네이드와 이루키가 에이미를 시로네에게 밀더니 그 위로 몸을 날렸다.
엉겁결에 시로네의 품에 안긴 에이미의 얼굴이 빨개지고 친구들의 무게에 깔린 시로네가 소리쳤다.
“으아! 아파! 아프다고!”
있는 힘껏 몸을 뒤틀자 이루키, 네이드, 에이미 순으로 침대 밑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돌아오자마자 봉변을 당한 시로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후우, 대체 뭐야?”
알페아스가 웃으며 다가왔다.
“환영 인사 한번 거창하구나. 역시 젊음이 좋은 게지.”
“교장 선생님.”
시로네의 얼굴이 비로소 진지해졌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네이드에게 물었다.
“아케인은 어떻게 됐어? 다른 친구들은? 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야?”
“왜냐니? 너, 자그마치 10일이나 죽어 있었다고.”
“뭐? 10일? 죽어 있어?”
“당연하지, 인마! 심장이 안 뛰는데 어떻게 살아 있냐? 궁금한 건 우리야. 설명 좀 해 봐.”
충격을 받은 시로네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기억은 생생하지만 어디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때 교사들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소란…….”
시이나와 에텔라는 침대에 앉아 있는 시로네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물론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자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시, 시로네.”
에텔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이모탈 펑션을 지지했던 당사자이니 내색은 안 했어도 10일 동안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을 터였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또…….”
에텔라는 말을 들을 겨를도 없이 달려가 시로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뇨. 제 탓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어도.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친구들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반면에 당하는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피지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질식할 것 같았다.
“선……생님.”
“응?”
“살려 주세요.”
무호흡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은 에텔라가 황급히 힘을 풀고 물러섰다.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시로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으나 이런 느낌 또한 현세의 것이었다.
되돌아왔다는 사실이 마냥 좋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응?”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 말실수를 깨달은 시로네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이 자식! 뭐가 어쩌고 어째?”
무엇이 서러운지 에이미가 도끼눈을 뜨며 시로네의 볼을 잡아당겼다.
“왜? 나는 그렇게 현실감이 없던? 응?”
“아야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네이드와 이루키가 폭소를 터트리는 가운데 알페아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로네가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가장 바빠질 사람은 그였다.
“교장 선생님.”
복도에서 몸을 돌리자 어느새 의무실을 빠져나온 시로네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친구들에게 경과도 듣고. 어차피 당분간은 휴교 상태가 이어질 것 같으니 말이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것?”
시로네는 다른 차원에 갔던 일을 짧게 고했다.
무한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부터 차원의 터널을 통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경위까지.
처음에는 알페아스도 흥미로워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표정이 굳어지더니 시로네가 여자에 대해 말했을 때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가 나를 알고 있다고 했느냐?”
“네. 교장 선생님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요. 기억이 흐릿하지만, 분명 그랬던 것 같아요.”
알페아스의 표정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기에 시로네는 괜한 얘기를 꺼냈나 싶었다.
“그래. 누군지 알 것 같구나.”
“네? 알고 계시다고요?”
알페아스는 유능한 마법사지만 다른 차원에서 만난 여자는 삶을 초월한 곳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접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알페아스의 생각은 달랐다.
우연이 아닌 필연. 시로네가 그녀를 만난 건 이모탈 펑션을 깨달은 순간부터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죠, 그 여자는?”
“아드리아스 미로. 당시에는 시공의 미로라고 불렸지. 스케일 마법을 전공한 내 제자란다.”
“제, 제자?”
시로네의 표정이 멍해졌다.
무엇보다 신의 권능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모든 능력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스케일 마법이 뭐죠?”
설명할 말을 고르며 알페아스가 눈썹을 긁었다.
“시로네, 마법사회에서는 이모탈 펑션에 도달한 자들을 언로커라고 부른단다.”
“네.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구나. 미로 또한 언로커다. 어릴 때부터 탐구심이 대단했지. 그녀는 끝도 없이 파고들어 갔다. 우주보다 더 큰 세계를, 입자보다 더 작은 세계를. 스케일 마법이란 시공의 무한함을 깨달은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란다.”
시로네는 당시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의 능력은 시공간의 상대성을 다루고 있었다.
“미로라는 분은 저를 쭉 지켜보았다고 했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걱정할 필요 없다. 미로는 너와 다른 차원에 있으니까. 하지만 네가 이모탈 펑션을 개방했을 때는 순간적으로 같은 차원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 미로의 말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어째서 굳이 저일까요? 언로커는 희귀하지만 아케인의 말에 의하면 그리 적은 숫자도 아니라고 들었어요. 저보다 뛰어난 언로커가 많을 텐데요.”
알페아스는 수염을 만지며 뜸을 들였다.
지금부터 나올 내용은 20년 이상 근무한 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다.
“미로는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초대 회장이다.”
시로네는 미로를 떠올렸다.
현재 자신의 연구회를 창설한 사람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초대 회장이라면 거의 20년 전의 인물인데도 나이를 먹지 않은 듯했다.
“미로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았어.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고 보았다. 동기들과 합심하여 이스타스에 연구회를 개설했지. 현재 토르미아 마법협회장인 미케아 가올드도 초창기 멤버 중의 1명이란다.”
네이드의 말에 의하면 마법 창고 이스타스의 마스터키는 이루키와 같은 서번트 능력자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로도 아니고 가올드도 아닐 터.
초창기 멤버들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로네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알페아스도 18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미로는 착한 아이였다. 그날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문득 놓친 사실이 있음을 깨달은 그는 다시 시로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로네, 혹시 우리 학교 학생들의 총인원이 몇 명인지 알고 있니?”
“어, 그게…… 아뇨.”
정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닌 듯 알페아스는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총원은 항시 변하지. 누군가는 졸업하고, 휴학을 하고, 징계를 받으니까. 하지만 총원이 몇 명이든 이 학교에는 언제나 1명이 부족하단다.”
알페아스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미로가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미로는 여전히 이 학교에 있거든.”
학교마다 하나씩 있는 괴담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학교에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분명 그녀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지 않은가?
“아…….”
그 순간 스케일 마법이 떠올랐다.
“설마?”
“그래. 미로는 이스타스에 있다. 스케일 마법으로 만들어진 상위 차원이지. 아는 사람들은 그곳을 이스타스의 상층부라고 부른단다.”
알페아스는 시로네의 어깨를 짚었다.
“약속해 주렴. 오늘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상층부는 네가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상층부에 관여해서는 안 돼.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미지의 세계. 언로커. 스케일 마법.
모든 정보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물론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어떤 식이든 거짓말이 될 터였다.
알페아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 미로에 대해 알고 싶다면 케르고 유적에 대해 조사하는 것 정도는 해도 좋다. 분명히 말하지만 너를 달래기 위해 제안하는 게 아니다. 이건 협박이야. 상층부를 조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해. 그러니 이것만은 꼭 지켜 주렴.”
시로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상층부의 비밀을 직접 파헤치기보다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 정도면 족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그분이 이스타스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으스스하네요. 연구회에서 잠도 못 잘 거 같아요. 갑자기 나타날 것 같아서.”
“하하, 걱정하지 말거라. 미로는 절대로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까.”
시로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신한다는 것은 증명할 방법도 있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알페아스의 눈에 슬픔이 스쳤다.
사실 확신을 가지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미로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미로에게 이 세상은…… 너무 아픈 곳이니까.”
***
다음 날.
알페아스와 카니스, 아린은 마법협회의 조사를 받기 위해 수도 바슈카로 떠났다.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협회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임시 휴교가 이어질 것이라 했다.
시로네는 의무실에 입원했다. 10일이나 심장이 안 뛰었으니 경과를 지켜보자는 의료진의 판단이었다.
시로네도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친구들과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세리엘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시로네, 미안해. 커피까지 사 왔는데 그렇게 해서. 많이 서운했지?”
“아니에요. 기억을 잃은 건 어쩔 수 없죠. 세리엘 선배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어?”
“하하! 정말 괜찮다니까요? 마음 쓰지 마세요. 저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두 손을 맞잡은 세리엘이 순한 눈망울로 말했다.
“시로네는 정말 다정해.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내 몸을 요구할 거야?”
“네?”
시로네가 황당하게 쳐다보았고 친구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세리엘, 요즘 너 무슨 책 읽어?”
“응! 바로 이거!”
기다렸다는 듯 세리엘이 소설책을 꺼냈다.
도색적인 빨간 커버에 루주를 진하게 바른 여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아래 ‘원초적 올가미’라는 제목이 보였다.
일상으로(3)
“이게 요즘 서점가에서 가장 뜨거운 책이야. 유부남 귀족이 시녀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인데 거기서 이런 대사가 나오거든. 제가 당신의 접시를 깨뜨렸네요. 이제 어쩌실 거죠? 제 몸을 요구할 건가요? 그러자 귀족이 그녀를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에…….”
“그만.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