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7
에이미가 손을 들어 중지시켰다.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부터가 재밌는 대목인데…….”
“세리엘, 아무리 소설이 좋아도 제발 현실과 혼동하지 마. 그런 책들은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걸로 독자들을 사로잡으려고 그러는 거야.”
“흥! 네가 안 봐서 그래. 너도 한 번만 읽어 보면 푹 빠질걸! 이거 빌려줄까?”
세리엘이 책을 내미는 것과 동시에 에이미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그녀의 요구를 받아 줬다가는 최소한 10일은 감상평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시로네가 쿠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오늘로 의무실도 마지막이네. 그동안 찾아와 줘서 고마웠어. 세리엘 선배님도요.”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솔직히 졸업반에서 공부하느라 죽을 맛이었거든. 쉬려고 마음먹어도 다른 애들이 쉬지 않으니 뭐……. 어쨌든 에이미나 나나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좋았지 뭐야.”
에이미도 부정하지 않았다.
매일 순위 경쟁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참이었기에 임시 휴교는 졸업반에 단비와도 같았다.
세리엘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교장 선생님이 걱정돼. 솔직히 이번 결정은 의외였어. 크레아스 자치구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인데 마법협회에서 감찰을 받으시겠다니.”
대륙에서 명망이 높은 만큼 사태를 무마시킬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알페아스는 학생회의 의견을 전부 수용했다. 결국 마법협회에서도 가장 악독하다는 감찰3부로 안건이 넘어간 상태였다.
“감찰3부는 마법협회에서도 특검이라고 불린다지. 인맥이고 뭐고 무조건 법대로 한다더라고. 알페아스 교장 선생님이라도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거야.”
시로네가 말했다.
“교장 선생님은 40년 동안 고통을 안고 사셨어. 이번 기회로 조금이나마 짐이 덜어질 수 있다면,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네이드가 말했다.
“일단 경과부터 지켜보자. 우리가 대체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거냐? 휴교가 끝나면 바빠질 테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두자고.”
“응.”
시로네는 창가를 돌아보았다. 오후의 나른한 태양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수도 바슈카.
지저 산맥에서 내려다본 바슈카의 정경은 왕성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핵심 기관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퍼진 구조였다.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입바른 농담으로 지저 산맥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건물이야말로 국가를 상징하는 기관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마법협회는 압권이었다.
18층에 달하는 건물은 토르미아 왕국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마법사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타 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마법사회의 감찰 및 첩보 임무까지 도맡고 있는 국가의 중추부였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견학하고 싶은 곳.
하지만 알페아스와 카니스 일행의 인솔 책임자로 낙점된 사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스승님, 이게 정말 최선일까요?”
“내가 원한 일이다. 유일하게 후회되는 거라면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뿐이지.”
알페아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사드 또한 딱히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협회의 문턱을 넘어서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기에, 스승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페아스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카니스와 아린을 데리고 들어간 그는 감찰부에 자수했고, 그렇게 3명은 각자 독실에 갇혀 하루를 대기했다.
다음 날이 되자 알페아스가 먼저 조사실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카니스와 아린은 마법 장치로 도배가 된 격리 시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 제어장치는 스피릿 존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하비스트조차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3시간을 기다리자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카니스, 아린. 나와.”
혐의가 입증된 것이 아닌데도 마법협회 간수들은 벌써부터 두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고 있었다.
알페아스의 조사를 통해 대충 전말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카니스와 아린은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복도 반대편에서 알페아스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무심하게 지나칠 생각이었지만 어깨가 교차하는 순간 알페아스가 멈추더니 간수에게 요청했다.
“잠시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을 주겠소?”
“아, 네. 하지만 너무 오래는 안 됩니다.”
자신을 대할 때와 다른 간수의 태도에 카니스는 코웃음을 쳤다.
알페아스가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력으로는 아케인보다 떨어지는 그가 승자의 여유를 갖는 게 기분이 나빴다.
간수가 자리를 피해 주자 알페아스가 다가왔다.
“너무 긴장할 것 없다. 몇 가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나오면 된단다.”
“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 제자처럼 순해 빠진 놈이 아니야.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어. 어떤 상황이 닥치든 겁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카니스는 분명 또래 아이들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았기에 잃어버린 부분도 많았다.
알페아스는 미래가 창창한 두 사람을 원래의 길로 되돌리고 싶었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것이다.”
“무슨 소리야?”
“이번 일이 끝나면, 마법학교에 오는 게 어떠냐?”
카니스는 욕을 먹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것인가? 생사를 넘나들며 마법을 익힌 자신에게 온실 속의 화초와 섞이라고 하다니.
“웃기지 마. 스승님이 약해서 진 게 아니야. 어비스 노바만 아니었다면, 아니 정식으로 붙었다면 당신 따위는 한 방에 날릴 수 있었어.”
“그럴 수도 있었겠지.”
알페아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을지도 모르지.”
카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악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합당한 이유를 들이밀어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야. 너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나는 너에게 어둠이 아닌 미래를 주고 싶구나.”
“어째서 나를 신경 쓰지? 동정인가?”
“나 또한 아케인의 제자였다. 너에게는 사형이 되는 셈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인연도 영원히 이어지는 법. 네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도와주도록 하마.”
카니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와 새로운 인생이랄 게 있을까? 배운 거라곤 전투뿐이었고, 그렇기에 전장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알페아스가 멀어지자 간수가 다시 두 사람을 데리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인페르노의 감옥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조사실은 정갈하고 깔끔했다.
왜소한 남자가 등을 지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뒷모습만으로는 은발이라는 것 외에 확인할 게 없었다.
“조사관님, 이번 사건의 용의자인 카니스와 아린입니다.”
“아, 이쪽으로 오시죠.”
쇠를 가는 듯 섬뜩한 목소리.
악명 높은 감찰3부의 현장을 뛰는 자답게 칼날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카니스와 아린은 테이블을 돌아들어 가 비로소 조사관을 마주 보고 앉았다.
무서운 인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마른 아저씨였다.
다만 가느다란 실눈으로 웃는 게 꺼림칙했다.
“감찰3부 조사관 사키리라고 합니다. 카니스와 아린, 본인 맞으시죠?”
“맞습니다.”
카니스가 담담하게 답했으나 아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사관의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것은 없기에 카니스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린, 왜 그래?”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떠는 아린을 발견한 순간 카니스는 직감했다.
초경으로 세상을 보는 그녀에게 사키리는 대체 어떤 형태인 것일까?
‘뭘 봤기에 이 정도로 놀라는 거지?’
“카니스, 읽을 수가 없어…….”
초경이 읽어 내지 못할 것은 없다.
원래부터 감정이 없거나 인위적으로 차단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린이 바라보는 사키리의 모습은 섬뜩했다.
전신이 거울처럼 매끈한 금속 재질이었고 계란형의 얼굴에는 이목구비의 굴곡조차 없었다. 손과 발은 원뿔처럼 삐죽해서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제스처조차 읽어 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형태였다.
“이런, 숙녀분이 놀라셨나 보군요. 초경이라고 하죠, 그거? 마법은 차단했지만 고유의 특질까지는 막아 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물론 두 분이 난동을 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사키리는 펜을 내려 두고 다리를 꼬았다.
아린은 원뿔형의 다리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다가 풀리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 사람, 장난치고 있어.’
단순히 감정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집중.”
아린은 화들짝 허리를 세웠다.
조사관의 얼굴이 원뿔로 튀어나와 그녀의 미간에 멈췄다.
“……해 주시죠. 일단은 공무 집행 중이니까요. 아린, 맞습니까?”
아린의 턱이 덜덜 떨렸다.
“네, 맞습니다.”
미간을 겨눈 원뿔은 아마도 사키리의 시선.
이토록 깔끔한 초경은 처음이었다. 어떤 범죄자도 이 사람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풀이 죽은 채로 기다리자 사키리의 초경이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뭐, 일단 알페아스 씨의 진술을 토대로 경위서를 작성하기는 했습니다만,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죠.”
질의응답이 1시간 정도 이어졌다.
사키리가 만족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정리하며 말했다.
“네, 대부분 진술이 일치하네요. 아닌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런 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감찰부 조사관이 내뱉을 말은 아닌 듯했다.
사키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사뭇 가벼운 태도로 두 팔을 벌렸다.
“결국 일종의 세뇌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죠. 아케인은 당신들의 불행한 삶을 이용해서 어린 시절부터 세뇌를 시킨 거예요.”
“……뭐?”
카니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악당이라고 말했다면 당당하게 인정했을 테지만, 사키리의 발언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스승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 없어. 전부 내 의지로 했고, 내가 저지른 일이야.”
카니스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 아린은 초조했으나 사키리의 초경은 변화가 없었다.
“악질적인 수법이군요. 불쌍한 아이들을 구원해 주고 존경하게 만든 다음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난 이런 게 필요한데 말이야, 물론 꼭 네가 해 줬으면 하는 건 아니야.”
카니스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협회의 판단이었다.
1명이라도 더 성과를 올려야 하는 감찰부에서 갑자기 세뇌를 운운하다니. 정신병원에라도 처넣을 생각인가?
일상으로(4)
“그래서?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세뇌당한 걸 인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무죄판결이 나겠죠, 두 사람 모두.”
카니스는 멍했다.
설령 핵심 주동자가 아니라고 해도 무죄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우리가…… 무죄라고?”
“아, 물론 세뇌당한 사실을 인정하면 그렇죠. 어쨌거나 현재 마법협회에서는 아케인이 어린아이들을 세뇌했을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쉬워서 오히려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듯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사키리는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 서류철을 뒤졌다.
사실이든 아니든 아린의 초경이 무용지물인 이상 확인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아케인의 전담 변호사가 공문을 보냈더군요. 익명을 요구했습니다만, 공증은 끝난 상태입니다. 일단 좀 보시죠. 그의 재산 내역과 유서, 상속에 관련한 서류입니다.”
“유서?”
사키리가 서류를 테이블 위로 밀자 카니스는 고개를 숙여 읽었다.
유서는 특별하지 않았다. 사후에 처리할 사안들을 적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중에 이런 문구가 보였다.
-모든 재산을 카니스에게 양도함.
‘스승님.’
사실은 따듯한 사람이었다거나, 남몰래 제자를 챙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념대로 살았기에 카니스를 대한 태도에도 거짓은 없었을 터였다.
제자의 목숨 따위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카니스를 유일한 제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
카니스는 재산 내역을 확인했다.
각종 던전을 포함한 부동산과 마법 기재와 같은 현물, 값비싼 아티팩트와 진귀한 약초 그리고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금액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 10, 100, 천, 만…….’
마지막에 적힌 재산의 총액이 뇌리에 새겨졌다.
‘48억 골드.’
대마법사 아케인이 150년 동안 모아 온 재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거액이었다.
사키리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요, 사실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케인이 카니스 군에게 유산을 상속한 건 분명 제자로 인정하는 마음이었겠죠. 하지만 마법협회에서는 말이죠, 그러니까 일종의 세뇌라는 것은 그런 거잖습니까? 거짓된 자아를 주입하는 거죠. 결국 카니스 씨는 아케인에게 속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협회에서도 어떻게든 무죄방면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고요. 다만 그렇게 되면…….”
“상속은 받지 못한다? 아케인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키리는 처음으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초경은 털끝만큼도 변화가 없었다.
“네, 바로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카니스 군이 세뇌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당연히 아케인의 제자라는 것도 부정하게 되겠죠. 결국 이 재산은 불법 자금으로 처리되어서 협회에 환속될 텐데, 그 전에 카니스 군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죠. 세뇌를 당한 것을 인정한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서명을 하면 되는 거죠.”
사키라는 한 장의 서류를 더 내밀었다. 제목을 읽은 카니스의 눈에 힘이 빠졌다.
상속 포기 각서
“…….”
어떤 식으로 말을 꾸며도 결국 카니스의 재산을 강탈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48억은 큰돈이지만 대체 얼마나 두 사람을 하찮게 여기기에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 재산을 빼앗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일까?
“시간을 드릴 수도 있지만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범죄의 자의성을 의심하는 심증이 되니까요. 사실 말이 됩니까? 당연히 세뇌를 당한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미래가 창창한 카니스 군과 아린 양이 그런 흉악한 놈을 따라다녔겠어요?”
카니스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싸우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무엇이 아린을 위한 선택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곳도 라둠과 다를 게 없구나.’
법이라는 허울을 썼을 뿐, 오히려 더 거대한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전장이었다.
카니스에게서 대답이 없자 사키리가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시간을 드리죠. 1시간 정도…….”
“서명하겠습니다.”
무릎이 반쯤 펴진 사키리가 동작을 멈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잘 생각했습니다. 자, 그럼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