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70
“시옥.”
율법에 없는 시간, 0.666초.
“응?”
땅에서 솟아오른 검은 그림자가 하비츠를 에워쌌으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뭐야!”
회전하면서 지켜본 키도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강력한 충격이 측면을 강타했다.
“크윽!”
창을 세워 막은 키도가 땅을 미끄러지며 타격 지점을 살피자 검은 로브가 서 있었다.
“……좋은 판단이었다.”
방랑의 6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동을 했다고 가정한 결과를 얻는다.
“너희들은 또 뭐야?”
키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방랑의 6시는 시옥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하비츠는 각자의 시간에 서 있는 자들을 살피며 한 바퀴를 돌았다.
“뭐야?”
4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1명 어디 갔어?”
시옥은 인간이었고, 대답을 들을 필요 없이 신의 주파수가 전해 주었다.
“흐음, 시로네라.”
배니싱의 현상이 사라지자 키도는 사방에 쓰러진 시체들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참혹하고 괴이한 풍경이었지만, 키도에게는 그보다 먼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우오린은 내가 지킨다.’
마음의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비츠! 똑똑히 들어라. 여기서 한 걸음…….”
“좋아, 안내해.”
“……응?”
하비츠가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네가 마중을 나갈 거라고 하는데? 마음의 소리로 말이야. 그래, 확실히 여흥치고는 괜찮았어.”
멍한 표정으로 창을 내린 키도가 갑자기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이 여자가 진짜……!”
물밑 작업(1)
열도 10왕국.
‘카르트시아’ 10개의 왕국 중에서 디오나스는 최동단에 위치한 섬이었다.
“가마긴이 일으킨 지진은 네 번째 섬, 미토아 왕국에서 발생했습니다. 다른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한 덕분에 디오나스는 해일의 피해가 가장 적죠.”
시로네의 설명을 들은 선장이 파이프를 물었다.
“흠, 괜찮을까요? 수재민에게는 사정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워낙 소문이 좋지 않아서.”
‘카르트시아’에 묶여 있지만 본래 디오나스 왕국은 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수룡 카이오스가 말했다.
“왕조가 세워진 것은 120년 전, 해적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국가의 주 수입원이 해상 약탈일 정도로 질이 안 좋은 사회죠.”
“어쩔 수 없죠. 마계를 소멸시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낼 곳이 필요해요.”
시로네는 선장실을 나섰다.
대형 함선의 꼭대기에서 뒤를 살피자 수많은 배들이 늘어선 장관이 펼쳐졌다.
‘대략 삼백 척.’
카이오스가 끌어모은 피난선으로, 전체 탑승자의 수는 2만 명에 달했다.
시로네는 배의 종류와 크기에 맞게 편대를 꾸리고 사람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지정했다.
포이네가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까지는 순항 중, 이라고 해도 될까요? 물론 사건 사고는 매일 터지고 있습니다만…….”
식량 다툼은 물론 사소한 잠자리 영역 싸움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란이 일었다.
“법 집행을 강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루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을 겁니다.”
“압박의 강도가 세지면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도 있어요. 작은 소란 정도는 기름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포이네는 왼편에서 항해하고 있는, 아라크네의 국기를 단 범선을 살폈다.
“저런 것을 달고 다녀서야,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라크네의 장관이 타고 있는 배로, 인부들도 전부 무장한 병력이었다.
“어쩔 수 없죠. 카르트시아의 대표는 아라크네니까요. 그쪽에서 힘을 써 주면 수재민이 디오나스에 정착하는 게 훨씬 쉬워질 거예요.”
물론 내막은 따로 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인솔을 자청한 것은 아닐 거야. 목적은 이제 곧 열리는 성전 재편성. 세계 강국과 싸우기 전에 물밑 작업을 해 두려는 거겠지.’
어차피 정치와 인권은 뗄 수 없는 관계, 일단 지켜보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국기 정도는 내버려 두세요. 치외법권을 자처하지 않는 이상 일을 키울 필요는 없죠.”
포이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후, 메시아님이 계시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놈은 없겠죠. 다만 창고 물품의 전수조사를 거부한 건에 대해 몇몇 편대장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식량을 뒤로 빼돌리는 게 아니냐는 거겠죠.”
아마도 그럴 테지만, 창고를 개방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을 터였다.
“식량은 넉넉해요. 공급이 부족할 경우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조건부 합의를 하세요.”
“알겠습니다.”
포이네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는 가운데 카이오스가 배 밑을 가리켰다.
“메시아님, 저기…….”
아라크네의 범선 쪽에서 작은 쾌속선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령 깃발을 확인한 시로네는 사도를 데리고 1층 갑판으로 곧장 뛰어내렸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사다리를 무시한 채 공중을 도약해 하나둘씩 착지했다.
“뭐야?”
아라크네 범선에 호의적이지 않은 탑승객들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때.
“엇차.”
유일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 여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저 사람은?”
미인이었고, 아라크네 국민이 아닌 사람에게도 낯이 익은 유명인이었다.
“바르호 란기?”
미스 아라크네.
세계 미인 대회에서 연을 맺은 적이 있는 시로네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익숙한 시선 처리로 사람들에게 인사한 그녀가 호위를 받으며 갑판을 가로질렀다.
“시로네 씨!”
란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로 배에 타고 있었네요? 소문만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아, 이런 우연이라니.”
“란기 씨가 어떻게 여기에?”
난민 지원 임무에 미스 아라크네가 동행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은…….”
잠시 주저하던 란기가 혀를 내밀었다.
“이 배에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지원했어요. 앞으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
토르미아의 수도에서 남하한 마족의 무리 중에서 어떤 부류는 정착을 했다.
제8군단 예하 7여단이 그들이었다.
“자, 오늘의 전리품이다.”
마을을 약탈해서 가져오는 것은 대부분 식량도 보물도 아닌 인간 그 자체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줄줄이 끌려온 인간은 마족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섭취되었다.
밤마다 들리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동물들조차 떠나 버린 으슥한 산맥.
“……이제 좀 살겠군.”
그곳에 설치된 특수한 뼈 감옥에 구스타프 4기예가 감금되어 있었다.
‘꽃밭’에서 입은 치명상은 거의 완치되었으나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하비츠가…… 하비츠가…….”
제타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를 배신하다니. 왜? 왜?”
발칸에게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었으나, 그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스모도가 말했다.
“그만 좀 해. 벌써 며칠째야? 그리고 하비츠가 네 남편이냐? 배신은 무슨…….”
구더기를 집은 그가 앞 이빨로 톡톡 깨물더니 맛있게 삼킨 뒤에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잖아? 더 재밌는 것을 찾았나 보지.”
제타로가 짜증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최고의 예인이야. 내가 죽인 인간만 몇 명인지 알아? 도대체 더 재밌는 게 뭔데?”
스모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무슨 신종 고문법이라도 발견했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거.”
아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뼈 감옥의 구석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발칸은 감옥 바깥의 상태를 살폈다.
‘부상은 거의 회복되었다. 탈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게 있을까?
‘어쨌든 적당히 많이 죽이고 적당히 즐긴 편이지. 하비츠도 지루해서 떠난 것 같고.’
발소리가 들렸다.
“야! 밥 처먹어라!”
하루 종일 구더기만 씹어 대고 있었던 터라 소리만 듣고도 장이 움직였다.
“일단 먹자. 오늘 메뉴는 뭐야?”
신장 3미터가 넘는 마족들이 목에 사슬이 걸린 나타샤를 앞세워 다가왔다.
“크크, 글쎄? 뭔지 맞혀 보는 게 어때?”
창살 사이로 넣어 준 음식은 돼지 족발처럼 생긴 고기였고 비린내가 났다.
나타샤가 물었다.
“상처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너는?”
넝마를 걸친 나타샤의 피부에는 장난처럼 새겨진 상처와 사슬 자국이 보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듯했으나 힘든 내색은 없었다.
“괜찮아. 먹어. 사람 고기는 아니니까.”
마족이 사슬을 잡아당겼다.
“야, 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죽고 싶어?”
나타샤가 목에 감고 있는 장치에서 12개의 칼날이 튀어나와 피부를 찔렀다.
붉은 피가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약간의 힘만 가해도 나타샤의 목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속도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
결국 발칸, 스모도, 제타로가 인질로 붙잡혀 있기에 참고 있는 것이었다.
스모도가 고기를 퉤퉤 뱉었다.
“더럽게 맛없네. 차라리 구더기가 낫겠어. 나타샤, 다른 고기는 없어?”
“썩어서 그래. 구해 볼게.”
마족이 사슬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크크. 자, 원하는 대로 해 줬으니까 따라와. 오늘의 놀이는 아주 재밌을 거야.”
칼날이 침투하는 것을 느낀 나타샤가 고개를 쳐들고 천천히 물러섰다.
“나타샤, 떠나라.”
발칸이 말했다.
“그냥 다 죽이고 떠나.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우리 때문에 참을 필요 없어.”
마족의 눈이 부릅떠지자 뼈 감옥이 쇳물처럼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너희들…… 정말 죽고 싶어?”
여단장 마가수라의 능력으로, 마기에 반응하여 폭발을 일으키는 감옥이었다.
스모도가 고기를 득득 뜯으며 말했다.
“그래, 나타샤.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가 뭐라고 너까지 여기에 박혀 있냐?”
마족들도 이제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닥쳐. 진짜로 죽인다. 마가수라 님도 우리를 탓하지 않을 것이야.”
최초에 구스타프 4기예를 살려 두라고 지시한 자는 제9군단장 파이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계가 되어 소멸했다.
물론 명령까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구속력은 훨씬 약해진 상태였다.
“나타샤, 끝내 버려.”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제타로는 발칸과 스모도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이제 재미없어. 하비츠도 없는데 더 놀아서 뭐 해? 그만 돌아가자고.”
사슬을 쥐고 있는 마족이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나타샤의 목에 칼날이 더욱 깊이 들어가고, 달구어진 뼈 감옥에 기포가 일어났다.
찰나의 판단으로 한쪽이 궤멸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괜찮아.”
나타샤가 친구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일단 돌아갈게. 여기서 푹 쉬고 있어. 다음에는 더 싱싱한 음식을 구할 테니까.”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제타로의 눈에 살기가 돌고, 고기를 씹고 있는 스모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을 뿐.
나타샤가 마족에게 돌아가자, 목의 칼날이 빠지고 뼈 감옥이 빠르게 식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발칸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너랑 똑같아. 아무 생각 없어. 그냥 버틸 수 있으니까 조금 더 살아 보는 거야.”
“너한테…… 버틸 수 없는 게 있기는 하냐?”
나타샤는 인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