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73
“디오나스가 유물이나 흔적을 찾았다고 쳐도, 그걸 과연 공유하려고 들까?”
“그래서 제가 가는 것이죠. 막대한 보물과 무기, 최고의 미녀로 무장해서요.”
전수조사를 하면 나오게 될 것들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회유하겠다고? 아무리 상대가 해적이라도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디오나스의 국왕 칼트가…….”
케언즈가 란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스 아라크네에게 미쳐 있다면? 실제로 무장 함대를 꾸려 침략을 시도할 정도로요.”
결국 해적이다.
“물론 란기는 아까운 인재죠. 하지만 곧 성전도 열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정치에 끼어들기 싫었던 거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수많은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손 떼. 란기 씨는 내 친구이기도 해.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용서치 않겠어.”
“아직은 제 것입니다만?”
란기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킨 케언즈가 승부를 노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협상에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오대성께서 도와주시면 란기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이걸로 오대성도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거야.’
“케언즈.”
시로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페르미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어?”
인간에 대한 이해도, 시스템을 교란하는 기술 등에 케언즈는 분명 발군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네? 아뇨.”
어떤 거래를 했는지 기억마저 지워 버린 마약왕에 비하면 갓난아이 수준이었다.
“그 녀석한테 많이 배워야 되겠다.”
물밑 작업(4)
***
베나하르는 황급히 짐을 챙겼다.
‘떠나야 한다.’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배는 아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나하르의 수행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서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끝났어. 다 끝났다고.”
거금을 들여 구입한 고급 시계를 가방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지퍼를 잠갔다.
“너도 빨리 짐 챙겨. 최악의 상황에서는 이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르니까.”
허튼소리를 하는 비서실장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는다고요? 마족들입니까? 아니면 해일이 밀려오고 있나요?”
베나하르는 멈칫했다.
과연 수행원이 말한 마족이나 해일보다 야훼가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흐으으…….”
낮에 보았던 시로네의 눈빛이 떠오르자 다시 신진대사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인간의 뇌는 얼마나 좁은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정말로 있다고 온몸으로 느끼기 전까지는.’
“비서실장님.”
베나하르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떨자 수행원은 더욱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의무관을 부를까요?”
“야훼가…….”
베나하르는 이를 가득 깨물었다.
“야훼가 이 배에 타고 있다. 지금 외교 장관하고 협상을 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좋은 일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케언즈 님의 협상 능력은 최고니까요. 물론 야훼도 상아탑의 비호를 받고 있지만 이런 경우…….”
“흐흐. 흐흐흐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야훼라는 게 뭔지 알아?”
“4대 초인 중 1명으로 박애의 상징이죠.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도 피난민을 돕기 위해서고요.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성향이기도 합니다.”
선악공애 중의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질 때도 있었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해?”
베나하르처럼 극단의 진실을 몸으로 접하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게, 그게 정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냐? 천만에. 그건 어떤 사고의 극단에서 미쳐 버린 거야. 제정신이 아니야. 괴물이라고.”
수행원이 눈을 깜박거렸다.
“극악은 나쁘고 야훼는 착하다고? 아니, 선악공애에 어느 하나 정상은 없어. 놈들은 인간의 범주 바깥에 있고, 그곳에서 각자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싸울 뿐이야.”
“하지만…… 좋은 사람이잖아요, 야훼는.”
“나는 보았다.”
베나하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눈빛을. 그 정신을. 내가 범선을 폭파시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순간, 야훼는…….”
살의도, 적의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래, 박탈. 그 순간 야훼는 나라는 존재를 그저 ‘필요하지 않다.’라고 느낀 게 분명하다. 그건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인간의 감정이 아니지.”
신의 논리에 가까웠다.
“일단 그렇게 되면 머리가 텅 비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어. 협상이니, 거래니…… 그런 건 인간들의 세계에서 인간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 시로네는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 하지만 나는 인간이고 싶다. 돈도 벌고, 여자도 만나고, 가짜 명예라도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고. 다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잖아. 나는 간다.”
수행원의 대답 따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베나하르가 문을 열고 나갔다.
“…….”
쾅 하고 문이 닫힌 자리에는 그의 머릿속처럼 혼란스러운 방의 풍경만이 남았다.
케언즈는 불쾌했다.
“흐음.”
시로네의 미소도 그렇지만, 자신의 장기를 깔아뭉개는 게 더욱 짜증 났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저는 페르미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뭐, 유명한 사람인가요?”
“마법학교 동창.”
‘어이가 없네.’
애초부터 개인적인 친분이라면, 어떤 대답을 했든 바보가 되는 건 똑같지 않은가.
“하아. 시로네 님, 피차 프로들끼리 이러지 말죠. 감정을 앞세운다고 국가 간의…….”
“케언즈.”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손 떼.”
“…….”
여전히 란기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케언즈가 턱을 움직이며 눈싸움을 벌였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잠시 후 뱀처럼 허리를 감은 손이 슬그머니 빠져나와 제자리로 돌아갔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일단 충돌을 피한 케언즈였으나, 시로네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다만 시로네 님이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삼류라는 겁니다.”
말투는 다시 차분하게 돌아왔으나 말에 담긴 내용은 거칠 것이 없었다.
“동창의 이름을 꺼낸 이유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니, 여태까지 그 녀석보다 인간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어요.”
케언즈의 협상 방식을 접하고 나자 비로소 페르미의 전략이 짐작이 갔다.
“선택을 하라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 녀석은…….”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어떤 선택지도 나에게 주지 않았을 겁니다.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 놈은 그걸 알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시로네가 마약왕과 거래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슬슬 화가 나는군요.”
사실은 이미 화가 나 있지만.
“저는 란기를 해적에게 주는 것도, 오대성이 저를 도와주는 것도 좋습니다. 어느 것도 손해는 아니에요. 이게 바로 협상의 기술이라는 겁니다.”
케언즈가 권하듯 손을 내밀었다.
“남은 건 시로네 님의 선택입니다. 란기를 갖느냐, 버리느냐. 여기서 뭐가 더 남았죠?”
“당신의 각오.”
시로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으면서, 식당 전체가 위아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케언즈가 엉거주춤 일어서고, 주위를 둘러보는 란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으로 윽박지르려는 게 아니니까.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요.”
그것까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가?
“정말로 기분이 나쁜 이유는, 당신이 제시한 선택지에 내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항목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니, 그거야…….”
몸을 일으킨 케언즈가 테이블을 돌아오려고 하자 시로네의 눈이 부릅떠졌다.
“앉아.”
말에 따르지 않더라도,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시로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입장을 바꿔 보려고요. 당신이 제시한 선택지를 고르면 나는 패배감이 들 겁니다.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이성을 잃을지도 몰라요. 확률은 반반입니다.”
“…….”
“자, 이제 대등한 위치가 되었으니 다시 협상을 진행하죠. 만약 나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좋아요. 선택을 하겠습니다. 다만 그 후에 일어날 일, 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로네가 차분하게 내뱉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야훼에 대한 세간의 시선.
인질을 잡았다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시로네를 반만 아는 것이다.
‘달라질 건 없어. 내가 말하면 시로네는 선택을 할 것이다. 다만 그 이후의 일…….’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인가?
‘아니야. 정말로 배를 가라앉힐 리가 없잖아. 그냥 허세라고. 이런 협박은 이골이 나게 겪어 봤어.’
그것 또한 사실이지만, 지금 케언즈의 앞에 있는 인간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
무섭다.
‘진짜로 저지르면 어떡하지?’
솔직한 심정이었고, 상아탑의 별과 대등하게 협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란기.”
애써 감정을 숨기려고 했으나 케언즈의 표정은 이미 굴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시로네 님 옆으로 가.”
여전히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게 짜증 났으나 인질 협상의 핵심은 냉정함이었다.
“아,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란기가 황급히 옷가지를 챙겨 시로네의 옆자리로 넘어갔다.
배의 떨림이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로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협상을 잘하시네요. 아라크네의 미래가 밝아요.”
순수한 칭찬이었다.
“하하하! 역시 못 당하겠네요. 우위를 점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했는데, 제가 한 방 먹었습니다.”
손부채로 땀을 식히는 케언즈를 보며 시로네는 그에 대한 평가를 상향했다.
“아뇨.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죠. 큰 건이 해결되었으니, 작은 건은 금방 끝나지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어이, 음식 아직 멀었나? 다 식었잖아. 따듯한 걸로 다시 가져와.”
직원들이 곧바로 음식을 교체하고, 케언즈가 일어나 와인을 손수 따랐다.
“자, 건배하시죠. 아라크네 왕국과 상아탑의 번성을 위해.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간의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때로는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게 있다.
“네. 그럼.”
테이블의 중앙에서 잔을 맞댄 시로네는 달콤한 포도주를 입술에 대었다.
‘……힘들다.’
천장에 달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마치 다른 세계의 것처럼 생소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
다음 날 아침.
시로네가 타고 있는 범선의 비상 경적이 수평선을 타고 퍼져 나갔다.
배에서 듣는 사람들은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고, 모두 얼굴을 감싸며 갑판으로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치안 임무를 맡은 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가운데 시로네가 선장실로 들어갔다.
“뭐죠?”
“습격입니다! 해적이에요.”
선장이 가리킨 북동쪽 바다를 돌아보자 까만 점들이 수평선에 아른거렸다.
“디오나스?”
“아마 그럴 확률이 높지만, 아직 영해에 진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포이네가 말했다.
“노렸다면 제대로 짚은 것입니다. 나중에 걸렸을 경우 발뺌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왜?”
시로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라크네와 얘기는 끝났을 텐데. 어째서 이 먼바다까지 온 거지? 그것도 저런 대군을…….”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애초부터 아라크네와 협상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라크네가 공물로 실은 보물을 전부 약탈하고 아닌 척하겠다는 거죠. 해적다운 발상이기는 합니다만…….”
포이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라크네 같은 강국을 상대로 펼칠 전략은 아닌 것 같군요. 뭔가 확신이 있는 걸까요?”
“마이카의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