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77
시로네는 홀로 갑판에 나와 별을 보았다.
‘무엇이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인류가 찾아야 하는 해답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왜 있는 것일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물기가 남아 있는 란기가 가운을 걸친 차림으로 다가왔다.
“란기 씨, 안 잤어요?”
“아뇨, 일어났어요. 아침 먹고, 운동하고, 이제 막 씻고 나오는 길이에요.”
별을 보니 새벽 5시였다.
“중요한 일이 있는 거죠, 디오나스에? 그래서 왕과 담판을 지으려는 거고요.”
시로네는 말이 없었다.
“제가 칼트에게 갈게요.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거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적어도 시로네 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란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예요, 그 웃음은? 저는 진심이라고요. 시로네 씨를 위해서 가겠다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란기 씨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시로네는 동이 트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어.’
바다 건너에 무엇이 있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기에.
“아, 저기.”
란기가 황홀한 표정으로 가리키는 곳에 황금빛 육지가 아스라이 반짝거렸다.
해적들의 나라, 디오나스였다.
전기 문명(4)
***
디오나스 왕국의 해변을 따라 수많은 화기들이 설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밀림처럼 우거진 숲 너머에 왕성이 있었고, 하늘에는 천연색의 새들이 날아다녔다.
아라크네 범선에 타고 있는 시로네는 우선 피난민들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포격이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 여기서 대기하고, 제가 육지로 올라가 보죠.”
그때 대포 소리가 터졌다.
시로네 일행이 돌아보았으나 하늘로 쏘아 올린 건 색종이가 담긴 폭죽이었다.
이어서 경망스러운 음악이 울리고 한 척의 쾌속선이 빠르게 다가왔다.
“정지!”
쾌속선에 탑승한 아라크네의 기사단이 해적들과 이야기를 하고 되돌아왔다.
“디오나스의 왕 칼트가 환영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왕성으로 모시겠다고 합니다.”
공문을 읽은 케언즈가 종이를 구겼다.
“흥! 뻔뻔하군. 동생을 시켜 우리를 치려고 한 주제에, 이제 와 들여보낸다고?”
시로네가 말했다.
“어쩌면 바다 위에서 싸우는 게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죠. 아무튼 우리는 갈 겁니다. 아라크네는 어떡하시겠어요?”
“……당연히 가야겠죠. 하지만 범선은 정박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적들의 수작을 모르는데 보물을 들고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하여 케언즈와 수행원, 시로네와 사도로 구성된 소수의 팀이 꾸려졌다.
“저도 갈게요.”
란기가 끼어들었다.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어쨌든 첫인상이 중요하니까요.”
“자네가?”
어떤 의미로는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공물이었기에 케언즈는 못마땅했다.
“여긴 적진이야. 자네가 위험에 처하면 외교전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이곳이 더 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가장 안전한 장소는…….”
란기가 시로네의 팔을 끌어안았다.
“바로 여기 아닐까요?”
“…….”
케언즈는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겠습니까?”
시로네는 그녀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가려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또한 란기의 경우에 한해서는 배가 더 위험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같이 가죠. 어차피 쟈크라는 우리 수중에 있으니까요. 인질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총 11명이 디오나스의 쾌속선을 타고 상륙했다.
정글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무 사이를 합판으로 연결시킨 복잡한 길이 보였다.
작은 초소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감출 수 없는 살기가 배어 나왔다.
포이네가 미소를 지었다.
“놈들의 적의가 민망할 지경이군요. 물론 감춘다고 해도 알아챘을 테지만.”
길이 험한 탓에 란기와 케언즈는 몇 번이나 마법의 도움을 받아 성에 도착했다.
“이게 왕성?”
300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벽돌 건물이었고, 규모도 중부 대륙의 수도원 크기였다.
“전하께서는 소박하신 분입니다. 물욕도 권력욕도 없이 안빈낙도를 추구하시죠.”
사신의 설명에 포이네가 웃었다.
“그런 인간이 꽃다운 처녀를 납치하라고 시켜? 허기야, 해적의 말에 뭔 의미가 있겠냐마는.”
“전하를 모독하지 마시오. 함부로 그분의 생각을 읽으려고 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
거짓이 아니라는 느낌은 공포에 질린 쟈크라를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성문을 열자 붉은 장판이 깔린 곳을 따라 해적들이 줄줄이 도열해 있었다.
확실히 대해적의 부하다운 기도였으나, 시로네는 눈앞의 인물에 주목했다.
“칼트.”
붉은 머리를 산발로 늘어뜨린 남자가 손바닥을 드러내며 그들을 맞이했다.
“평화의 성지에 온 여행자들이여, 환영합니다.”
보통 사람이 온음의 억양을 쓴다면 칼트의 억양은 대부분 반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있는 한 그 무엇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 기묘한 억양은 불쾌하고, 예술적이었으며, 인간쓰레기 같았다.
“나는 상아탑의 오대성이다.”
시로네가 나섰다.
“당신의 친동생, 쟈크라가 우리의 선박을 공격했어.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거야.”
칼트는 무심한 시선으로 동생을 살폈다.
“설마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이 녀석이 어젯밤에 모든 걸 실토했어.”
“읍! 읍!”
마음의 기술마저 깨고 고개를 흔드는 쟈크라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요, 동생을 보냈지요. 내 영혼의 반려자 란기,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은 칼트가 고개를 숙였다.
“친히 이곳까지 모셔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군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란기.”
란기는 몸에 전기가 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호오, 그러고 보니 앞머리를 다듬으셨군요. 한 2센티미터, 아니 2.3센티미터 정도.”
섬세한 남자라면 란기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속눈썹. 열세 번째 속눈썹이 0.7도 정도 휘었군요. 손목 위 7.3센티미터 지점에 있던 솜털은 어디로 갔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털인데.”
정신적인 구토가 밀려드는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손댈 필요가 없죠.”
칼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기어 나오듯 신음 소리를 내뱉은 그가 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느껴집니다. 당신의 몸, 당신의 반응, 당신의 생각까지 전부……. 아아, 방금 당신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통합. 끝내주는 기분.”
란기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싫어. 죽어도 싫어.’
지금 당장이라도 시로네를 붙잡고 이 사람하고는 살 수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통합이라고.”
시로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란기의 모든 것을 간파하는 능력은 전자기장의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로네가 알고 있는 특별한 감각의 개념을 떠올리게 했다.
‘울티마 시스템.’
궁감은 전기일 것이다.
실제로 바벨에서 받아들였던 울티마 시스템 또한 전기의 형태가 아니었던가.
‘우주가 전기에서 탄생했다면 궁감이 전기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일무이한 최초의 하나.
“나는 누구인가?”
칼트가 말했다.
“온 누리의 파동을 느끼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 신일 수도 있고, 한낱 거름일 수도 있는 자.”
시로네는 확신했다.
‘바벨에서 울티마 시스템을 흡수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 고작 오감으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 거대한 느낌이 10년 이상 그를 지배했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도 이해가 되었다.
“본인도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말해 주지. 칼트, 당신은 병들었어. 치료를 받아야 돼.”
“치료? 내가 병들었다고?”
“그래. 오파츠 때문일 거야.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내가 도와줄게. 지금 그거…… 어디에 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던 칼트가 침묵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병들었다고…….”
시로네의 목소리가 아닌, 파동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사실임을 전하고 있었다.
해적들이 무기를 쳐들었다.
“전하! 속지 마십시오!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서 오파츠를 빼앗을 속셈입니다!”
사실 그들은 오파츠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13년 전에 칼트의 인격이 변한 이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려 갔을 뿐이다.
“오파츠? 아, 마이카 말이군.”
칼트는 아련한 시선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곳이야. 보이나? 지금 이곳에도 있어. 이 공기 중에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흠칫 정신을 차린 그가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보고 싶나? 너에게도 보여 줄까?”
이번에는 포이네가 말렸다.
“메시아님, 위험한 일입니다. 완벽하게 분석하기 전에 행동에 옮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시로네의 주파수는 이미 칼트와 공명하고 있었다.
“갈 수 있다고, 마이카에?”
“아니, 가는 게 아니지. 그들이 부르는 거야. 그래, 분명 부른다는 느낌이지.”
‘그들이라.’
5감으로 내뱉은 말은 11감의 단계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좋아. 내가 직접 봐야겠어.”
칼트가 멀쩡히 다녀온 곳에 자신이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오라.”
칼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눈에서 푸른 전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혀를 내밀자, 직사각형의 얇은 금속판이 얹혀 있었다.
“뭐야?”
아라크네의 관리들이 수군거렸으나 시로네는 특별히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생물이 기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 현상. 어쩌면 칼트는…….’
이미 오파츠가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메시아님, 이건 정말 위험합니다. 육체에 이물질을 심는 것만은 참아 주십시오.”
“괜찮아. 그래 봤자 5감으로 만든 물질이야.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야.”
칼트가 건넨 금속판을 살핀 시로네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몰라. 그냥 뭐…… 머리에 꽂으면 되지 않을까?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했거든.”
시로네는 귀 뒤쪽에 칩을 대고 눌렀다.
‘안 들어가는데.’
결국 뼈를 뚫어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걸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괜찮아. 날 믿어.”
칼트의 흐리멍덩한 눈빛이 신뢰감을 떨어뜨렸지만 시로네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흐읍!”
정말로 뼈를 뚫었을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금속판에 전기가 흐르며 시로네의 정신에 침투했다.
“허억!”
고개를 쳐든 시로네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이고 자기장이 그를 감쌌다.
“메시아님!”
몸을 날린 카이오스와 포이네는 익숙한 충격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크으으으!”
뇌가 타들어 가는 느낌.
여기서 더 진행되면 기억이 손상되겠지만, 두 사도는 끝까지 손을 내밀었다.
“메……시……아…….”
전기에 휘감긴 카이오스의 손이 시로네에게 닿기 직전, 칼트가 중얼거렸다.
“그들을 만나라.”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