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92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든 세리엘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에이미한테 말하면 죽는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입 다물고 있어.”
“하하! 알았어. 일단 손부터 보자.”
세리엘의 전공이 회복 마법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기분의 문제였다.
상처는 길었으나 다행히 깊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흥분한 거야?”
의자에 앉아 시로네의 치료를 받던 세리엘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몰라. 요즘 계속 악몽을 꾸거든. 아무래도 케이스 검수를 줄여야 할까 봐.”
시로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힘들지.”
“감정병.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거. 제정신으로 버틸 게 아니야.”
세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거야? 만약 내가 너라면 미쳐 버렸을 거야.”
“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수많은 케이스를 분석한 끝에 지침을 만들었잖아. 네가 살릴 수 없었던 사람보다 살린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만 알아줘.”
“그래.”
세리엘은 고마웠다.
“아, 너를 부른 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야. 혹시 출장도 가능할까?”
“출장? 무슨 일인데?”
세리엘은 담배를 끄고 책상을 뒤졌다.
“어디 갔지?”
서류를 더듬거리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널브러진 문서를 한 장씩 살폈다.
“응, 이거다. 일단 한번 볼래?”
시로네가 살피자 감정병 케이스가 접수되는 지역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점 하나가 100명이야. 단위를 줄이면 훨씬 정교해지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할 거야.”
“응. 뭔지 알겠어.”
분명 비정상적인 분포도였다.
“이모션 스케일의 병원은 바람을 타고 전파돼. 감염경로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격리 정책을 발동한 시점에서 전파력은 크지 않아. 따라서…….”
시로네가 말을 받았다.
“감정병 케이스가 보고되는 빈도수는 중부 대륙이 가장 많아야 하고,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줄어들어야 정상이라는 거지. 하지만 이 지도를 보면 마치 바람이 끊긴 것처럼 군데군데 비어 있는 지역이 있어.”
“그래. 마치 남부 대륙에 무풍지대가 있는 느낌이지. 처음에는 마족의 침략을 받은 건 줄 알았지만, 성전에 문의하니 지옥의 군대는 칼레의 국경선에 막혀 있다더군. 그래서 이번에는 그 지역에 대해 조사했어. 혹시 왕국의 행정 도시, 혹은 군사적 요충지가 아닌지.”
“하긴, 그럴 경우 사망자를 공표하는 게 자국에 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니야.”
세리엘이 지도를 짚었다.
“내가 조사한 결과 케이스를 보고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어. 오히려 별다른 특색이 없는 지방 소영지가 대부분이었다고.”
“조사관은 보냈어?”
“일단 상부에 보고는 했어. 내 의견에 설득력이 있다면 긴급 발령을 내리겠지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각국의 귀족들을 뒤로 미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그들의 재산을 환수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상부의 결정을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답답해서 그 뒤로도 고민을 좀 해 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보고가 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로 감정병을 이겨 내는 지역이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흐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남부 대륙 전체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건 너무 스케일이 크잖아? 그렇다고 핵심 도시도 아닌 작은 마을…….”
말을 멈춘 시로네는 지도에 있는 빈 공간을 가상의 선으로 연결했다.
“뭔가의 루트구나.”
“같은 생각이야. 그래서 밤새도록 조사했지. 그 지역에 유통되는 특산물, 심지어 농기구 재료까지. 결과는 어느 하나 부합되지 않음. 거기서 벽에 막혔다가, 어젯밤에 작심하고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 만약 어떤 지역의 물건이 남부 대륙으로 유통되고 있다면, 가장 수혜를 받은 곳은 그 물건의 생산지일 테니까.”
“그걸 다 조사했다고?”
생산지를 찾는 방법은 하나였다.
“보고서를 넘버 1부터 전부 꺼내서 하나하나 점을 찍기 시작했지. 그렇게 한 2시간 했나? 갑자기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장소가 떠올랐거든.”
시로네는 집중했다.
“그래서 지도를 포기하고 그 장소가 나올 때까지 서류를 넘겼지. 결과는 0. 감정병 케이스가 한 건도 보고되지 않은 지역, 아니 왕국이 있어.”
세리엘이 남부 대륙, 정확히는 최남단 아이론 왕국의 위에 국경선을 그렸다.
“어딘지 알겠어?”
머릿속으로 떠올린 시로네는 소름이 돋았다.
“케시아 왕국.”
페르미가 있는 곳이었다.
“마약이구나.”
“그래, 이건 마약 밀매 루트야. 케시아에서 생산되어 남부 대륙 각지로 퍼지는 거지. 그리고 이 마약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감정병 케이스가 보고되지 않아.”
“하지만…… 가능한 일이야?”
“바로 그게 문제야. 모든 종류의 모르핀, 안정제, 진정제, 심지어 특수 약물까지 실험했지만 감정병의 증세는 약화되지 않았어. 대체 이게 뭘까? 어떤 약물을 쓰기에 감정병을 이겨 낼 수 있는 거지?”
시로네는 입을 가리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상해. 심지어 페르미가 마약 밀매업자가 된 것은 마계가 열리기 훨씬 전의 일이야. 이 상황을 예견할 수 있을 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아.”
있을지도 모른다.
‘페르미니까.’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어. 하지만 그 녀석이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았다는 것은 더 믿기 어려워. 만약 이 모든 게 전부 계산된 것이라면…….’
기억에 없는 그날, 페르미는 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제안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까?
“케시아로 가 줘.”
시로네를 바라보고 있던 세리엘이 볼펜의 끝과 끝을 양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조사관이 확인하기 불가능한 일이야. 페르미는 이미 케시아를 장악했으니 공식적인 대응을 하기도 애매해. 어려운 부탁인 건 알지만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면 좋겠어.”
“알았어.”
감정병의 억제 수단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앞두고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이었다.
“지금 출발할게.”
또 다른 시로네가 케시아로 떠났다.
다른 신념(2)
성전 칠왕성 중의 하나인 아이론 왕국은 남부 대륙 8왕국을 대표하는 강국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단점을 메우고도 남을 선진 정치와 자본력이 그들의 무기.
하지만 언젠가부터 남부 대륙의 세력 구도에 미묘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작은 천사의 눈물.
케시아라는 작은 왕국에서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있는 환각제의 명칭이었다.
“한적하군.”
케시아의 수도는 실로 한적했다.
한때 난무했던 범죄와 테러도, 집을 잃고 울부짖던 소녀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유령도시처럼, 굳게 닫힌 집들 사이로 가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올 뿐이었다.
페르미는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이 또한 평화가 아닌가.”
다듬지 않은 턱수염이 하관을 풍성하게 덮었고, 염색 머리는 이제 장발의 끝에 남아 있었다.
“빠르뮈.”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페르미가 광기의 장난 같은 미소를 드러냈다.
“니아카.”
페르미는 중부 대륙 출신이지만, 이제 남부 특유의 억양이 자연스레 묻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다들 자고 있을 시간에.”
까무잡잡한 중키의 남자가 시종 코를 킁킁거리며 페르미 앞으로 다가왔다.
“찾았잖아. 회사로 가 보려고 했는데. 혹시 그거 가지고 있어? 천사의 눈물.”
통칭 엔젤이라 한다.
“당연히 있지.”
페르미는 심하게 풀려 있는 니아카의 동공을 들여다보며 주머니를 뒤졌다.
“정량대로 주입해. 너무 많이 하면 재미없으니까. 자, 이거 받고 돌아가.”
작은 비닐 봉투에 설탕처럼 반짝이는 백색 가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고마워. 근데 돈이 없어. 일을 못 하니까. 나랑 같이 집으로 갈래? 내 마누라라도 괜찮다면 데려가.”
케시아에서는 누구도 일하지 않았다.
“괜찮아. 이제 돈은 필요 없으니까.”
아이론 왕국을 제외한 남부 대륙의 7개 왕국이 페르미의 손아귀에 있었다.
“자, 이건 부인에게 가져다줘. 이 정도 서비스는 고객 접대의 기본이지.”
니아카의 어깨를 두드린 페르미가 또 다른 마약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킁킁.”
봉투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은 니아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하아아. 이제 좀 살겠군.”
반쯤 초점이 되돌아온 니아카가 코에서 봉투를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빠르뮈. 너, 엔젤 안 하지?”
“왜 그렇게 생각해?”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이 좋은 것을 왜 안 하는 거야? 아프지 않아?”
“나까지 즐기면 누가 약을 만들겠어? 적어도 1명은 이 도시를 지켜야지. 안 그래?”
“하긴…….”
두어 번 코를 킁킁거리던 니아카가 집으로 돌아가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고마워.”
페르미가 미소로 배웅했다.
“정량을 지켜. 경고야.”
아마 내일쯤이면 니아카는 페르미를 만났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잠시 머물러 있던 페르미는 먼지와 쓰레기만 굴러다니는 황량한 길을 걸었다.
블록 끝에 서 있는 최신식 건물의 첨탑에 금화륜의 상징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대낮의 열기를 쫓아내는 서늘함이 피부를 감쌌다.
“그래. 발굴단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뒤를 따르는 직원의 동공도 약간은 풀려 있었다.
“2시간 전에 깨어났습니다. 지금 회복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페르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현실의 시간으로 3일 하고 17시간. 이번 발굴 작업은 상당히 터프했군.’
자동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최신식 의료 설비가 갖추어진 백색의 공간이 나왔다.
벽을 따라 200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하나도 빠짐없이 텅 비어 있었다.
“어라? 왔네?”
욕실의 문이 열리더니 이제 막 씻은 마르샤가 머리의 물기를 말리며 걸어 나왔다.
“어디 갔었어? 계속 찾았잖아.”
금화륜과 손을 잡은 앵무 용병단은 이제 전 세계 길드 랭킹 2위까지 도약했다.
단순히 용병 길드가 아닌 현존하는 모든 길드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산책이죠.”
“……요즘 자주 나가네. 어차피 거리에는 아무도 안 다녀서 볼 것도 없지 않아?”
“그게 멋진 게 아닐까요?”
페르미의 말을 곱씹던 마르샤가 침대 위의 철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자. 여기. 이번에는 좀 힘들었어. 위험한 지대인 데다가 너무 깊은 곳에 묻혀 있어서. 대략 200년은 파고 들어간 것 같은데…….”
“수고하셨습니다.”
상자를 넘겨받은 페르미는 중앙에 박힌 보석을 통해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마르샤가 스웨터를 입으며 말했다.
“아직도 흥정이야? 7개 왕국의 돈은 전부 싹쓸이했으면서 쫀쫀하기는.”
“그래서 묻는 거죠.”
“오래갈 사이니까 적당히 받을게. 80억 골드. 일괄 대형 금화로 준비해 놔.”
페르미가 눈웃음을 지었다.
“4일치 봉급이 80억 골드라.”
“식구가 몇 명인데. 전부 나누면 남는 것도 없어. 아무튼 그렇게 준비해 둬. 난 술 마시러 갈 테니까.”
어깨를 토닥이며 지나가는 마르샤를 향해 페르미가 상자를 넣으며 말했다.
“늘 하던 방식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문을 나서기 직전 마르샤가 돌아보았다.
“면도 좀 해야겠다. 너…… 그때 이후로 아이들에게 한 번도 안 가 본 거야?”
“그건 좀 개인적인 문제네요.”
“그래. 너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냥, 황량한 거리를 산책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마르샤가 회복실을 나서고 자동문이 닫히자 페르미는 거울을 돌아보았다.
이상한 사람이 서 있는 듯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사건을 도굴하다 보면 현재의 시간은 잊게 되는 법이다.
욕실로 들어간 페르미는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얼굴에 비누칠을 했다.
서걱서걱.
얼마나 오래 자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수염이 피부 위로 말끔하게 벗겨졌다.
“…….”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긴 머리를 붙잡고 면도칼로 잘라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거울을 보자, 페르미라고 불렸던 인물의 말끔한 얼굴이 비로소 드러났다.
“회장님.”
욕실에서 알몸으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내 옷을 가져다줘. 그곳에 갈 거야.”
“……네.”
엔젤에 취해 잠시 사고가 느려진 그녀가 뜻을 이해하고 고급 정장을 가져왔다.
정갈하게 단추를 채운 페르미는 전신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자신을 비춰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