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93
“흐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가 향한 곳은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링거를 꽂고 있었고,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시간을 체크하며 약물 투여량을 조절하는 중이었다.
“회장님.”
마스크를 쓴 의사가 고개를 숙이자 페르미가 어깨를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페, 페르미.”
이 방에서 유일하게 성인인 여성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상체를 세웠다.
페르미의 어머니 욜가의 동지이자, 아라모네스 보육원의 원장인 레이첼이었다.
“선생님.”
그리고 어쩌면…… 페르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할 터였다.
의사가 차트를 빠르게 넘겼다.
“엔젤 투여량은 평균치를 넘지 않았습니다. 감정병은 억제된 상태고, 의식 활동은 하루 4시간 정도입니다.”
레이첼이 말했다.
“페르미, 이러면 안 돼. 이 어린아이들에게 마약을 투여하다니. 이건 너무나 큰 죄야.”
감정병이 발발하는 역사를 ‘채굴’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페르미에게 레이첼은 욜가를 대신하는 사람이자 1명의 여자였으니까.
“약 덕분에 편하게 잘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이 약이 없으면 고통을 겪어요.”
모를 리가 있겠느냐마는, 엔젤의 장기 투여로 인해 그녀의 이성은 약해진 상태였다.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지? 이게 정말 최선일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생각할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내가 해결할 거니까. 선생님은 그냥 편안히 누워서 꿈을 꾸세요.”
자신을 다정하게 침대에 눕히는 페르미를 올려다보며 레이첼의 눈빛이 흔들렸다.
‘페르미.’
그때도 그랬다.
동료의 아들, 설령 순간의 실수라도 아홉 살 소년에게 입술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무나 뛰어나고 또 영특해서.’
세상에 불가능할 게 없을 것 같은 그 거대한 느낌에 의지하고 말아 버린 것이다.
“페르미. 나, 사실 너를…….”
“또 올게요.”
그 마음조차 알고 있다는 듯, 페르미는 레이첼의 실언을 사전에 차단했다.
“아, 아아…….”
링거의 투입량을 늘리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주무시게 두세요. 감정적 변화 또는 증폭이 질병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숙이는 동안 페르미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모두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재밌게 놀아라.”
현실의 지옥이 아닌, 달콤한 꿈속에서.
“회장님.”
페르미가 방을 나서자 금화륜의 수행원이 구두 소리를 내며 뒤를 따랐다.
“성전 총회가 머지않았습니다. 그 전에 근접 국가인 아이론 정도는 잡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내버려 둬. 우리에게 필요한 카드를 그쪽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페르미의 말이라면 신뢰도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이론을 제외한 남부 7왕국의 대표로 출사표를 내겠습니다.”
“흐음.”
페르미는 시로네를 떠올렸다.
“그것도 보류해. 조만간 손님이 찾아올 거거든. 패는 끝까지 맞춰 봐야 하지 않겠어?”
“네. 그럼.”
그 말을 기록한 수행원이 걸음을 멈추고, 페르미는 홀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마르샤에게 받은 상자를 선반에 내려놓은 그는 전면 유리창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
황량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페르미는 이스타스에서 만난 욜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아들이니까.
인류에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그녀.
극선 미로에 비견되는 여걸이지만 오히려 성향은 박애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크…….”
페르미의 목덜미를 타고 핏줄이 올라왔다.
‘또 시작인가.’
엔젤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정신이 탁해지면 역사의 ‘채굴’이 어렵기 때문에.
“염병할.”
감정병의 고통이 전신을 찌르자 그의 콧잔등이 맹수처럼 일그러졌다.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린 상태였다.
“…….”
갑자기 페르미의 눈에 살기가 차오르더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몸을 틀었다.
오른손에 쥐인 군용 나이프를 역수로 붙잡고 왼쪽 손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쾅!
손뼈와 의자 팔걸이까지 뚫고 내려온 칼날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쯧.”
혀를 차며 담배를 꺼내 문 페르미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불을 붙였다.
“후우.”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창밖의 풍경을 향해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이제 좀 낫군.”
태양이 불쾌할 정도로 이글거렸다.
다른 신념(3)
***
“컥! 컥!”
시로네가 창자를 통해 빠져나온 곳은 라비에트 시내의 으슥한 골목이었다.
“으으, 기분 진짜 이상하네.”
강력한 장腸운동을 20분 동안 경험했더니 마치 배설물이 된 기분이었다.
“응?”
골목 틈새로 드러난 시내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동시에 골목 뒤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침입자는 한 놈이 아니다! 샅샅이 찾아내서 도륙을 내라! 잠행대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물의 외형이 섞여 있는 개성적인 마족들이 시로네의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야! 너!”
사자의 얼굴을 가진 마족이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시로네의 앞에 착지했다.
“너 뭐야? 악마족인 것 같은데, 지금 도시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거냐?”
“아, 그게…….”
사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너, 설마 도망친 거냐?”
7장군 중의 하나인 크로세이드가 악마족이었기에 충격은 당연할 터였다.
“이 한심한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장에서 도망치는 마족이 어디 있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낸 마족이 자비 없이 목을 그어 버리려는 그때.
“무슨 소란이야?”
골목 어귀에서 고양이의 얼굴을 가진 여성이 전신의 털을 세우며 다가왔다.
“아, 대장님!”
라비에트 7장군, 잠행대장 오리스였다.
“도시가 소란스러워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국에 같은 마족끼리 싸우다니, 이게 무슨 추태냐?”
“아닙니다, 대장님. 이 녀석 탈주병입니다.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하더군요.”
시로네를 살핀 오리스는 부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악마족. 게다가 지성종이구나.’
아무리 봐도 전투병은 아니었고 외모로 추정하건대 나이마저 상당히 어렸다.
“대장의 죽음은 슬픈 법이다. 하지만 부처가 온 것도 아니고, 마족이 공포에 질려서야 되겠느냐?”
“아, 죄송합니다.”
산에서 내려왔다는 의심을 막을 수 있다면 탈주병이 되는 것도 좋으리라.
오리스가 시로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크로세이드가 무력으로는 가장 강했다고 해도 전쟁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니, 너의 지성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가자, 내가 부대로 복귀시켜 주마.”
말이 끝나는 동시에 오리스가 시로네를 붙잡고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우와.”
속도라면 시로네도 뒤지지 않지만, 놀란 이유는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확실히 인간하고는 다르네.’
“후후, 그리 놀랄 것 없어. 너도 열심히 훈련하면 언젠가 나처럼 빨리 달릴 수 있을 테니. 하긴, 마족은 좀체 노력을 안 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시로네에게 영광스러운 추억을 남겨 주고 싶은 오리스가 말을 이었다.
“너는 지성종이지. 본능을 이기고 도망쳤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마족은 적을 두고 도망쳐서는 안 돼.”
“네. 이제 도망치지 않을게요.”
진심이었다.
도망치는 자가 오히려 눈에 띄는 상황이라면 싸우는 편이 속이 편할 테니까.
“호호!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이 오리스가 침입자를 전부 처리할 테니까.”
7장군의 연합 부대가 있는 도심에 도착한 시로네는 특수기동대에 합류했다.
“……탈주했다고?”
잠행대원에게 설명을 들은 제7분대장 이샤크가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쳇, 나약한 지성종 같으니라고.’
어차피 급한 상황이 아니면 책상에 틀어박혀 숫자 놀음이나 하던 놈일 터였다.
“당장 죽이는 게 마땅하지만 오리스 님의 체면을 생각해 이번만 봐주지. 얼른 들어가!”
“아, 네.”
제7분대의 악마족 사이에 시로네가 끼어들자 거인과 소인을 보는 듯했다.
“이 꼬맹이는 뭐야? 너, 그런 몸으로 싸울 수나 있겠냐? 아무리 악마족이 강하다지만…….”
“내버려 둬. 이미 정신이 썩어 빠졌는데 어른이 되었다고 별거 있겠어?”
이샤크가 소리쳤다.
“조용! 서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들 준비됐나?”
“네!”
악마의 대답이 우렁차게 들렸고, 시로네의 목소리도 음파에 한몫을 더했다.
“끝장을 내 버리자!”
제7분대의 출동 구호에 맞춰 200명의 악마족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대체 침입자가 누군데 이 난리야?’
그들의 속도에 맞추면서도 시로네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인종이라 들었다.
하지만 7장군 중의 하나를 해치웠다는 것은 종족이 갖는 한계를 깨는 결과였다.
“저기다!”
갑옷을 걸친 기마라의 부하들이 바리케이드를 친 가운데 한 여성이 날뛰고 있었다.
“끼익! 끼익!”
시로네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손유정?’
라비에트에 쳐들어온 자가 마인종이 아닌 실제 원숭이였을 줄이야.
“끽! 너무 약하잖아!”
두 자루의 곤봉을 휘두를 때마다 치안대의 갑옷이 산산조각 깨져 나갔다.
“공격! 포위망을 벗어나기 전에 처리한다!”
이샤크의 뒤를 따라 특수기동대 200명이 동시에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이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군대에 휩쓸리면서도, 시로네는 전투의 무의미함을 직감했다.
‘제천대성의 증손녀.’
오메가에 의하면, 손오공은 이미르를 상대로 가장 긴 시간의 혈투 기록을 가진 무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옥에?’
무엇보다 실체가 아니었다.
울티마로 느끼는 그녀는 생물로 정의되기 전 단계의 특수한 신호에 불과했다.
‘분신. 그렇다면 본체는 따로 있다는 건데…….’
스트링 능력은 헥사와 유사하지만 결코 실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사실 그 실재가 전부이기는 하지만.’
결국 반쪽짜리 무력.
그럼에도 손유정의 무위는 특수기동대와 치안대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깔깔깔! 이쪽이야! 이쪽!”
도시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던 손유정이 방향을 틀어 이샤크에게 접근했다.
이샤크도 뿔에서 전기를 일으키며 정권을 날렸으나, 오히려 그의 팔이 끊어졌다.
“크으으으!”
죽음을 각오했으나 손유정은 일인일격의 원칙을 세운 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 자식이……!”
원숭이의 유희에 분노한 이샤크가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망연자실했다.
200명의 부하들이 단 일 합을 겨루지 못하고 곤봉에 묵사발이 되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뭐야?”
부하들이 하나둘씩 땅으로 꺼져 가는 가운데 시로네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이샤크가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