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09
61장. 죽음이 죽음에게
“최후의 신화가 완성되면 더 이상의 동맹은 불가능하다고요.”
한 지역의 유일한 신화를 사이에 둔 결전.
나는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음에도 마지막에 와서야 속내를 밝힌 죽음의 왕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예요? 요르문간드에 맞서기 전에 동맹을 맺으면 됐잖아요.”
“세 개의 세력이 최후의 신화를 두고 다툴 것. 그것도 오딘이 걸었던 제약 중에 하나였단다.”
헬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마 훗날의 싸움을 대비한 것이겠지.”
나는 그가 야마와 벽하원군을 염두에 두었음을 직감했다.
야마를 이용하기 위해 잠시간 동맹을 맺었으나 종내 발드르를 이용해 그를 처리할 속셈이었을 터.
그 과정에서 대륙 밖으로 나가면 마주치게 될 벽하원군까지 처리하기 위해, 부러 제약을 걸어 마법의 힘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운명은 이러한 형태로 흘러왔구나.”
문득 미드가르드에서 그림 리퍼와 마주친 때를 떠올렸다.
-곧 종말 신화가 실현될 거예요. 휘말리기 전에 북유럽을 나갈 수 있다면 어서 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미 벌어진 결과를 피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도리어 그것을 불러오고 말았던 것을.
“오딘도 이 마법을 완성하고서야 비로소 알았을 거야. 우주가 그에게 다른 두 신을 보여줬던 진정한 이유를.”
이어지는 말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 셋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오딘에게는 우리 셋이 아니라 다른 두 신이 보였다는 뜻인가요?”
명백하게 다른 목적을 갖고 실행했던 일이 결국 그와는 상관없는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이.
“그래, 우주의 인과를 읽어 미래를 설계하는 자들이라면 언젠가는 모두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완성한 것은 그저 더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조각일 뿐이었다고.”
미소 짓던 눈이 문득 무언가를 한탄하듯이 깊어졌다.
“그때가 오면 거의 모든 마법사들은 오딘과 같은 얼굴로 파국을 맞이한단다.”
그녀는 마법사의 죽음에 대해 말했지만, 꼭 마법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나 어린 왕이여, 너는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그녀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너의 그림을 완성했을 때, 너는 오딘과 같이 비참한 얼굴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다정하게 속삭인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지.”
어느새 그 손에서는 거듭 깊은 신성이 발하고 있었다.
“너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잖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도 차사들을 언급하는 것이 잔인하리만치 야속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고 해서 흐르는 운명까지 멈출 수는 없어.”
파아아앙!
검붉은 신성과 함께 그녀의 팔이 나를 향해 덮쳐왔다.
채애앵!
반사적으로 죽음을 들어 부딪치는데 신성이 휘감긴 팔은 철을 맞댄 양 무거웠다.
“저 사신과 달리 내게는 힘이 그대로 남아 있단다. 네가 잘 싸워준 덕이지.”
채애앵!
채애애앵!
채앵!
쉴 새 없이 휘둘러지는 팔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몇 번이고 검을 부딪쳤다.
헬은 정말로 나를 죽일 것처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저 내 공격을 흘려 넘기는 것만으로는 내 죽음을 취할 수 없어.”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자신의 신화를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파아아앙!
헬의 신성은 계속해서 무겁게 나를 덮쳤고,
“아니, 나는…….”
나는 검으로 그것을 받아내며 짜내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 모르겠어요, 헬.”
채애앵!
그녀의 신성을 받아친 검이 울음 같은 쇳소리를 내었다.
“왜 꼭 하나만 남아야 한다는 건지.”
채애앵!
채애애앵!
채앵!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이 뒤엉키고 금속음이 덧씌워졌다.
“신화의 형태가 어떠하든, 소중한 이들과의 이별을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모두 같을 텐데.”
채애애애앵!
찰나 헬의 팔과 내 검 사이에서 길게 불꽃이 일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또한 너의 운명이겠지.”
파아아앙!
그녀의 신성이 순간 폭발적으로 번쩍였다.
“……!”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신성이었다.
그에 맞서 본능적으로 나의 신성 또한 강하게 일으킨 그때.
“하지만 세상에는 때가 되면 마무리되어야 할 신화도 있단다.”
푸우우욱.
돌연 검의 끝에서부터 번져오는 선명한 죽음의 감각.
예상치 못한 끝에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헬의 가슴에 박힌 내 검이 보였다.
“헬……!”
나는 헬을 꿰뚫은 검을 뽑아내야 할지 내버려 둬야 할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멍해졌다.
한데 그 잠깐 사이, 그녀는 죽음의 신성을 피운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고는 품에 안듯 잡아당겼다.
“내가 태어난 땅은 너무도 척박해서 노략과 전쟁이 아니면 쉬이 살아남을 수 없는 가혹한 곳이었어.”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전쟁과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고 우리는 상실의 고통을 덮어줄 영광의 신화가 필요했지.”
그녀의 목소리에 맞춰 업경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세상의 정경을 전해주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던 북쪽의 사람들.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신의 전장으로 향하던 용맹한 전사들.
그 맹렬한 기세에 누군가에게는 광전사라고까지 불렸던 이들에 대해서.
그들이 내가 기억하는 신화의 헬과 오딘을 섬기던 이들이라는 것을 깨닫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세상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당신들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절박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어디서 왔어요?”
어쩌면 내가 살았던 세상을 기억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이에게.
“당신들은 대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된 거예요?”
하나 그렇게 묻는 순간 다시 깨달았다.
헬이 정말로 나와 같은 세상에서 왔을지라도,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신은 결국 실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신화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을지언정 그것을 믿는 인간에게는 결코 허구가 아닐 테니.
“우윽……!”
한데 그렇게 물은 순간이었다.
또 한 번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핏물에 잇새를 물었다.
한순간에 내부를 잘게 바스러트리는 듯한 고통에 직감했다.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해줄 수 없다.
아직 내게 답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영광의 신화는 언젠가 끝이 나야 해.”
헬이 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거칠고 척박한 시대가 끝나고, 가족의 품에서 맞이하는 평온한 죽음이 더 이상 불명예가 되지 않는 때가 올 테니까.”
그녀의 손끝에 맺힌 죽음의 신성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핏물이 멎고 고통 대신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에 맞이하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끔찍하고 비통한 죽음이 되는 날이 올 테니까.”
그녀의 신성이 내 몸을 치료할수록 그녀의 몸은 반대로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렇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날이 올 테니까.”
-언젠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이 지옥에 아무도 남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담담히 스러져 가는 죽음의 왕의 목소리에 내가 아는 또 다른 죽음의 왕이 목소리가 겹쳐졌다.
“……당신이 말했던 신화의 종말이란.”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위한 새로운 신화였나요?”
다만 그녀는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얼굴로 조용히 미소 지을 뿐.
“이제 정말로 이별이구나, 어린 왕이여.”
헬은 내 얼굴을 짧게 어루만지다가 다시 나의 검에 올렸다.
“네게 전부를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나 보구나.”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죽음의 신성 중 일부는 나의 검으로 스며들었고, 일부는 사금처럼 반짝이는 알갱이로 흩어졌다.
“아무래도 오딘이 마지막에 무언가를 남긴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다시금 웃었다.
“그래도 약속대로 내 신화는 너의 것이 되었으니─”
부디 나를 대신해 그들을 아름다운 날들로 데려다주렴.
아주 작은 파편으로 사라진 그녀가 채 끝내지 못한 말을, 업경의 권능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주었다.
“헬…….”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소멸을 받아들일 수 없어 가만히 숨만 삼켰다.
“오, 이런…….”
뒤에서 그림 리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이 그렇게 가버리면 마력이 바닥났어도 마지막까지 한껏 쥐어짜 볼 생각이었던 내가 무지 뻘쭘해지는데.”
천천히 돌아보자 그가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으쓱이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는 또 다른 사신의 죽음에 대한 어떤 슬픔도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아, 킹.”
두 손에 발하던 모래알처럼 검은 신성을 거두어들이며 리퍼는 말했다.
“세상에 널린 게 죽음인데, 서로를 상처 입힌 끝에 맞닥뜨리는 죽음은 너무 비참하잖아.”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죽음이고.”
장난기 어린 눈이 다정하게 반원을 그렸다.
“그것은 언제나 아이보다 어른에게 먼저 찾아오는 법이야.”
“리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명랑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눈이 지금은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무거웠다.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저승으로 돌아가면 다시 저 눈을 마주할 수 있는데도, 나는…….
“괜찮아, 킹.”
차분히 다가온 리퍼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라그나로크를 초래한 발드르의 죽음에는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있지.”
그 손은 다정스레 내 머리칼을 넘겨준 다음,
“그의 죽음으로 세상은 타락하고 종말을 맞이했지만,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와 새롭게 찬란한 세상을 열 것이라고.”
검을 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신화적 죽음이야.”
리퍼의 커다란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죽음의 형태를 빌린 세상의 정화.”
어떤 확신이 담긴 것 같은 그의 목소리처럼.
“어린 죽음이여, 네가 이 땅에서 새로이 받아들여야 할 죽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테지.”
푸우우욱.
그것이 끝이었다.
헬이 그러했듯 스스로를 찌른 그가, 일부는 작은 파편으로 흩어지고 다른 일부는 나의 검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한데 반으로 나뉘어 사라져가는 그를 마주하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리퍼……!”
이렇게 그의 일부는 이대로 나의 신성이 되고, 다른 일부는 머지않은 미래의 한반도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리퍼, 우리는……!”
그것을 깨달은 나는 사라져 가는 그의 로브 자락을 쥐며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한반도의 저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하나의 그를 떠올리면서 절박하게.
“리퍼, 우리는 꼭, 다시……!”
“이런, 킹.”
한데 내 말에 그는 그저 다정하게 웃기만 했다.
“킹은 정말로 죽음을 앞둔 인간처럼 말하는구나.”
속삭이듯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그제야 심장이 차가워지리만치 선명하게 실감했다.
“그래,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내가 우리의 예정된 재회를 말한대도 눈앞의 리퍼에게는 제대로 닿지 않는다.
함에도 그리 말해주는 것은 이 죽음 끝에 남을 나를 생각해서일 뿐이다.
모든 죽음의 신화가 그러하듯, 결국 남겨지는 이를 위해서였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리퍼의 마력이 헬과 달리 거의 없던 상태여서였을까.
아니면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였을까.
감싸듯이 귓가를 스치는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그는 한순간에 녹아내리듯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가 항상 말해 왔던 것처럼 수확을 마친 농부의 평온한 얼굴로.
“아아…….”
사라져버린 그의 앞에서 나는 탄식했다.
“아…….”
홀로 남아버린 것을 더는 부정하지 못한 채 그의 힘이 깃든 ‘죽음’을 내려다봤다.
-세상에는 때가 되면 마무리되어야 할 신화도 있단다.
-죽음의 형태를 빌린 세상의 정화.
-어린 죽음이여, 네가 이 땅에서 새로이 받아들여야 할 죽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테지.
두 신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신화적 죽음 앞에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킹은 그곳에 영원히 남기로 했는데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구나.
그래, 나는 여전히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의 신화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떠나간 그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서 그리 말했겠지만, 내게 죽음은 역시 영원토록 두려운 것이어야만 했다.
-언제가 닥쳐올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소중한 이들의 죽음이 고통스러워서였을까.
내가 가진 인간의 마음이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끔찍하게 두렵고 아픈 것으로 여길수록, 내 땅의 신화는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더욱 아름다워질 테니.
61장. 죽음이 죽음에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