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ed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83
81장. 모래성(4)
황탑주가 전개한 카르마 등급 필드.
나는 업경에 집중하며 황탑주를 주시했다.
기습적으로 생사결의 필드를 연 것치고 그에게서는 별다른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업으로 전개된 필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황야처럼 거칠고 고요할 뿐이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침묵 속에서 시선을 맞댄 끝에 물었다.
황탑주는 깊고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아래로 주름진 눈매가 그윽하게 휘었다.
“두 번째로 당신의 앞에 나서기 전에 우주에 청했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당신을 독대하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정말로 그 녀석이 나를 못 알아보더군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재밌지 않습니까. 던전에 맞춰 잠시 모습을 바꿨다 한들 놈의 눈이 그것을 읽지 못했을 리 없는데.”
그의 말에 필드가 열리기 직전 단군이 드물게도 당황해서 소리치던 것이 떠올랐다.
마을에 들어선 이후로 줄곧 던전의 인과를 읽고 있었으니 본래라면 황탑주에게서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지 못한 것은 황탑주가 세 번째 방법을 청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는 것도, 그 눈을 가리는 것도 결국 우주의 뜻일지니.”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을 때였다.
쿠우웅!
쿠우우웅!
필드가 흔들리면서 그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장승?”
언제든 달려들 수 있도록 검을 쥐며 그가 불러낸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크기가 무척 커서 마치 성벽처럼 드리운 두 개의 돌장승이었다.
팔다리 없이 돌로 이루어진 몸에 두 눈만은 맹수의 것처럼 형형했다.
“마을의 수호신이지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장승에게 액을 막아달라며 술과 떡으로 상을 차리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답니다.”
황탑주에게서도, 그가 불러낸 돌장승에서도 여전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긴장을 거두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반대로 장승을 해코지하면 당연히 탈을 당한다고 많이들 믿었는데, 개중에 제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승한테 벌을 받는 이야기 중에서요?”
한마디 했더니 내가 관심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미소가 깊어졌다.
“장승을 정성껏 모시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선비가 길을 가고 있었지요. 한데 홍수라도 났던 건지 마을로 향하는 길이 진흙탕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처럼 그가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짜증이 난 선비는 근처에 있던 장승을 뽑아 진흙탕에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장승을 밟고 진흙탕을 건넌 것이지요. 인간에게 어처구니없는 취급을 당한 장승은 당연히 화가 났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반응이라도 하듯 뒤에 선 돌장승들이 순간 서슬 퍼렇게 눈을 빛냈다.
“그때 지나가던 또 다른 선비가 진흙탕에 처박힌 장승을 발견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씨가 착했던 선비는 자기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손수 장승을 꺼내어 바로 세워주었지요.”
나는 이야기를 잇는 황탑주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카르마 등급 필드를 연 것은 아닐진대 그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은 그저 평온함뿐이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 선비는 이유 없이 몸이 크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비?”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물었다.
“장승을 제대로 모신 선비가 해를 입었다는 뜻입니까?”
내 물음에 황탑주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옅게 웃었다.
“역시 이 이야기를 모르시는군요.”
“…….”
생각지 못한 대답에 순간 입술을 달싹였다.
차사가 된 이후 나는 한반도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막내 차사로서 형, 누나들을 따라다니며 들은 이야기도 많았지만 분명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이야기도 많았다.
한데 지금 황탑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만큼은 그의 말대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는 것도, 그 눈을 가리는 것도 결국 우주의 뜻일지니.
그것을 의식하자 방금 전에 그가 했던 말이 다시 한번 곱씹혔다.
한순간에 심장이 차가워질 만큼 선명한 실감이었다.
“그렇습니다. 장승을 모셨던 선비가 해를 입었습니다.”
황탑주가 다시 말했다.
“어째서 그러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
업경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감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는 그가 이미 내 답을 알고 기다리는 것을 예각하며 대답했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물음에 답하자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속삭였다.
“제 목을 베시거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해체되었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카르마로 전개되었던 필드가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
찰나에 뒤바뀐 광경에 깜짝 몸을 떨었다.
“전하!”
옆에 섰던 호구별성이 바로 내 어깨를 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필드야? 싸웠어?!”
숨어 있던 황탑주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내가 사라졌으니 모두가 놀랐을 터였다.
“괜찮아요, 누나.”
나는 조심스럽게 호구별성의 팔을 내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뒤로는 서늘한 얼굴의 강림 형과 미간을 찌푸린 사라가 서있었다.
형도, 사라도 입은 열지 않았지만 내게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느껴졌다.
“싸움은 없었어요. 애초에 싸우려고 필드를 연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황탑주와 짧게 대화를 했는데…….”
차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꺼내다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제 목을 베시거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새삼 되새겨졌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실패한 설화를 토대로 필드를 설계하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그자에게 들어야 할 말이 생겼어요.”
“들어야 할 말?”
내 말에 호구별성이 더 설명을 바란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대답 대신 옅게 웃고는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황탑주는 사라진 건가요?”
“필드를 해제함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내 물음에 단군이 바로 대답했다.
“그 창에 이동 주술을 시전하는 인과도 심어두었던 것 같군요.”
그새 당황은 사라지고 평소와 같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역할을 맡았던 황탑주와 인과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설화가 진행되면 던전의 무대가 달라질 테니 자연스러운 인과라고 여겼거든요.”
어째서 황탑주를 눈치채지 못했는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럼 던전은 어떻게 되는 거죠?”
황탑주가 사라졌으니 우투리 설화를 마저 진행해야 할 터였다.
“원래라면 아버지를 위협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우투리를 묻은 곳을 알려주는 순서일 텐데요.”
[ (!) 우투베뚱몄긍똴흐흐흐 행방을 알아냈베겟땍귀룔흐흐흐다. ]난감함을 느낄 새 없이 팝업창이 떴다.
‘지리산 골짜기 – 산골마을’의 클리어 조건을 충족했다는 팝업창이었다.
어머니에게 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아버지를 위협한 것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 (!) 공간의 법칙이 바뀝니다. ]새로이 공간이 구성되면서 마을의 풍경이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 ‘지리산 골짜기 – 뒷산 바위 앞’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우벴귀몃벋렛흐흐흐 저지
“이대로 거사를 준비하는 우투리를 찾아내서 막는 거네요.”
팝업창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거친 산속이었다.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가야 할 방향은 명백했다.
우리들의 복장은 여전히 포도대장과 포졸들인 것을 보아 한창 우투리를 추적 중인 상황인 듯했다.
“안쪽에서 화기가 느껴집니다.”
산길을 살피며 단군이 말했다.
“진토(辰土)에 이어 미토(未土)로군요. 화기를 품은 여름의 흙입니다.”
사계절이 담긴 흙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황탑주가 흙과 나무의 기운으로 빚은 곰들에 이어 불의 기운이 담긴 법칙을 설계했다는 뜻이었다.
“숨어 있는 적은 없나?”
단군의 말에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르마 등급 필드에 빠져나온 직후에는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더니, 속으로 계속 황탑주의 습격을 되씹고 있던 걸까.
“없습니다.”
형의 물음에 단군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런 식의 습격은 두 번은 통하지 않을 테지요.”
형이 무엇 때문에 확인하는지 안다는 태도였다.
대답을 보건대 이미 황탑주가 자신의 눈을 속인 게 우연이 아님을 짐작한 듯했다.
“앞장서겠습니다, 대왕님.”
단군의 대답에 강림 형이 산길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흠, 확실히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가 더워지는군.”
길을 따라 걸으면서 사라가 한마디 했다.
그의 말마따나 봄바람이 불었던 처음과 달리 어느새 땀이 맺힐 정도로 더웠다.
깊이 들어갈수록 화기는 더욱더 짙어져서 마치 코앞에 보이지 않는 불이라도 피운 것 같았다.
“헛!”
어느 순간 호구별성이 놀란 듯이 숨을 삼켰다.
“저건 뭐야, 용암이야?”
그녀가 길이 뚝 끊긴 앞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시뻘건 거 봐, 완전 용암인데?”
“화기의 정체가 이거였군.”
사라가 호구별성의 말을 받으며 혀를 찼다.
우리가 걷던 길의 끝에는 어느새 작은 개천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닌 용암이었다.
검붉은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쇠라도 녹일 수 있을 만큼 지독했다.
“여길 건너야 해요, 오빠. 던전의 인과가 건너편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바리가 개천 너머를 살피며 말했다.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어요. 만약 개천을 돌아서 가려고 하면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곳을 맴돌게 될 거예요. 그렇게 설계된 법칙이에요.”
“그럼 위쪽으로 가는 건 어때?”
바리에 말에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공군을 부르면 날아서 건널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공군을 부르더라도 일행을 전부 옮기려면 한 명씩 태워줘야 할 것이다.
공군이 나를 붙잡고 날아오를 만큼 힘이 세긴 하지만 한 번에 여섯 명을 옮겨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또한 불가능할 겁니다, 염라.”
그때 지켜보던 단군이 끼어들었다.
휘이익.
그의 손에서 불쑥 부적 한 장이 던져졌다.
파지지직!
부적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검붉은 번쩍이면서 불이라도 붙인 듯 순식간에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위쪽에도 함정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결국 위로 날아서 갈 수도 없고,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맨몸으로 직접 뜨거운 용암을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놈 이거 치사하게 구네.”
상황을 파악한 호구별성이 짜증스럽게 독기를 뿜을 때였다.
촤르르륵!
불현듯 흐르던 용암이 꿀렁거리며 솟구치더니 육중한 덩어리를 그려내었다.
“염병할! 저것들은 또 뭐야!”
재차 독기를 뿜은 호구별성이 용암에서 걸어 나오는 것들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뻥 뚫려 있는 칠공에서 지독한 화기를 뿜는 그들은 뜨거운 용암으로 빚어진 무언가였다.
어떤 것은 네 발로 기고, 어떤 것은 두 발로 걷는 와중에 쩍 벌어진 입은 똑같이 짐승의 울음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쿠오오오!
앞줄에 선 용암괴물이 길게 포효하면서 총탄처럼 이리저리 불꽃이 튀었다.
“미친! 저것들은 왜 자꾸 튀어나와!”
용암괴물이 토해내는 불꽃을 피하며 호구별성이 성을 냈다.
먼저 나온 괴물들 뒤로도 또다시 크고 작은 괴물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개천 앞의 좁은 산길이 금세 괴물들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용암이 흐르는 한 괴물을 소환하는 인과는 끝나지 않아요.”
옆에 선 바리가 얼굴을 굳혔다.
“여기서 멈춰 있으면 저 괴물들이 끝없이 쏟아질 거예요.”
그녀가 말을 잇는 와중에도 건널 수 없는 용암 개천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